속사람의 건강을 위한 기도
(엡 3:14-19)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람은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을 아울러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는 건강하지만 정신이 병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육체는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정신은 매우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싸이코패스(psychopath)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1920년대에 독일학자 슈나이더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는데 '성격 탓으로 인해 타인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를 괴롭히는 정신질환'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는 묻지 마! 살인이나, 연쇄 살인과 같은 사건들의 원인은 대부분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싸이코패스들에 의해 자행되는 범죄입로 미국의 연쇄 살인범 90% 이상이 싸이코패스이며, 우리나라도 강호순과 유영철이 전형적인 싸이코패스입니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건강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건강이 더 중요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사람들은 정신적인 건강에는 무관심한 반면 무엇이 몸에 좋고, 정력에 좋다고 방송에 나오기만 하면 싹쓸이를 할 정도로 육체적인 건강에만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육체를 겉 사람이라고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사람을 속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의 관심사는 겉 사람의 건강에 있습니까? 아니면 속사람의 건강에 있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신령한 말씀이 충족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도,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육의 사람의 건강만을 구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인지 오늘 성경 본문의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1. 기도의 자세-무릎 꿇고 비노니
사도 바울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감옥에서 갇혀서 고난을 받는 모습을 오로지 육신의 건강과 부요함을 목적으로 삼고 예수를 믿는 연약한 믿음의 성도들은 낙심하기 쉬운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바울이 그처럼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한 사람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감옥에 갇히게 하실 이가 없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가장 걱정하며 기도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엡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여기서 ‘여러 환난’이라는 말은 마치 창 끝에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뜻하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바울이 지금까지 갖가지 환난을 당한 것도 많은데 아직도 환난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이며, 또한 ‘낙심하지 말라’는 말은 현재 능동형 동사로 ‘용기를 잃어버리고, 축 늘어진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나름대로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장사가 안 되거나 암과 같은 질병에 걸리게 되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쉽게 낙심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를 막론하고 육체적으로 환난을 당할 때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장차 하나님 앞에 가서는 그 고통에 비례하여 하늘에 영원한 상급이 예비 되어 있음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환난을 당하고 있는 바울은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믿음이 연약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자신 때문에 낙심할까 염려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였습니다.
[엡 3: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물론 기도는 형식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내면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는가 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피땀 흘리는 기도를 하신 것만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도와 주셨습니다.
(눅 22:41-43)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바울은 기도하되 차디찬 감옥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은, 믿음이 연약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대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자유롭게 살면서 바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낙심하였습니다.
정작 낙심해야 할 사람은 현재 옥중에서 환난을 당하는 바울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낙심할까봐 염려하면서 도리어 바울은 그 모든 환난을 낙 영광을 이루는 것이라고 위로 하였습니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 이유는 지상에서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하늘의 영광을 보증하는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믿는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며, 바울이 당한 환난이나 핍박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이라면, 바울이 소망하는 영원한 영광도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바울과 믿음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바울처럼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쉽게 낙심하는 사람인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2. 기도의 내용- 세 가지를 위해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경전과 의식과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는 어떤 점이 다른 종교와 차별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하되 형식과 자세가 중요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무릎을 꿇고 금식하며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다면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롬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렸으며 우리는 어떤 내용을 기도하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속사람의 건강을 위한 기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감옥에 갇힌 자신 때문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낙심하지 않는 건강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엡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여기서 ‘속사람’이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사람이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까닭은 속사람이 약해지면 겉 사람인 육신의 욕망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을 누구보다 바울이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롬 7:17-19]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겉 사람은 늙고 병들어 죽게 되지만 속사람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의 건강은 겉 사람처럼 육체적인 운동이나 보약을 먹어가지고 될 수 없습니다.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서는 나의 의지나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께서 나의 내면에 임재하셔서 마음의 주인이 되시고 내 속사람을 다스려 주실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을 위해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가 마음에 주재하시기를 기도
옥중에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 두 번째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내주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대부분 사용하는 언어들이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자주 듣게 되는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또 실감이 나질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진다는 말이 매우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이제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고, 영접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영원토록 주재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여기서 ‘계시게 하시옵고’라는 말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잠깐 머물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사를 와서 함께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내 마음은 성령이 임재하여 계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수고하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만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최선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기도
바울 사도는 옥중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되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세 가지 비결은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깨달아야 하고 세 번째는 충만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넘치는’이라는 말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고 능가하고, 뛰어나는 상태가 현재 진행형인 상태입니다.
또‘알고’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고 책을 읽어서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으로 통해서 확인된 지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깨달아‘라는 말은 무엇 아래라는 말고 붙잡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안다는 정도를 앞지른 단계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완전히 붙잡았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부자유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세상에 가장 좋은 예수 그리스도의 넓고, 길고, 높고, 깊은 사랑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경험하고, 꽉 붙잡는 단계까지 이르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주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넓고 높고 깊기가 한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비는 기도였습니다.
[엡 3: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 믿음의 기도-더욱 넘치도록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도 돈으로 사거나 권력으로 빼앗을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이 들어 주셔야만 가능한 신령한 복을 구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중보 기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도의 자세가 무릎을 꿇는 기도였고, 기도의 내용이 성령과 그리스도의 내주로 말미암아 속사람의 강건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충만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되 확고한 믿음으로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기서 ‘역사하시는’ 이라는 말은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고, 부활하신 능력이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또한 ‘넘치도록’이라는 말은 대단하게, 엄청나게 라는 뜻으로 영어 성경에서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이 또는 더 지극히 풍성하도록‘으로 번역을 하였으며, 그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기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형식적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좋은 것으로 차고 넘치도록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때로 부족한 것을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세가지 반응을 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거절하고 어떤 사람은 구한 만큼만 주고 어떤 사람은 구한 것보다 모자라게 줍니다.
아마도 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는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부모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한 것보다 넘치도록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만이 아니라 능력을 의심하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의 기도는 아무리 그 형식과 내용이 그럴 듯하다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필수 조건 중에 하나는 반드시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바울은 이처럼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에베소 교회가 온전히 설수 있도록,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믿음보다도 훨씬 더 크고 풍성하심을 믿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행하심을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 용기와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엡 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울의 기도 속에서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서는 온 세상 만민을 품고도 남을 만큼 넓고, 타락한 죄인을 구원할 정도로 깊고, 그 영광이 하늘에 이르도록 높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이해하고 경험하고 붙잡아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일까요?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 뿌리 깊은 나무처럼 말씀에 깊이 뿌리를 박고 살아야 합니다.
'속사람'을 사람의 뿌리에 비유한다면 좋은 옥토는 말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속사람이 말씀에 온전히 박혀 있고 그 말씀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때, 그 성도는 뿌리가 옥토에 든든히 박혀 있는 것과 같이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으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재목이 되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늘 물이 풍성하며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것처럼 . 속사람이 건강한 사람은 무엇보다 성경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만 영적으로도 늘 푸르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 흘러넘치는 강물 같은 주님의 사랑에 잇대어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성도들이 사랑을 가장 많이 하면서도 불신자들로부터 교회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세상 어느 단체도 교회만큼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랑을 더 많이 나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터는 사랑을 말만 하지 말고, 노래만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 내가 경험한 사랑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속사람이 가장 건강한 삶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깊이와 넓이가 한이 없으면서도 항상 물이 마르지 않고 온 세상을 적시는 생명의 강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그 생명수 강에 잇대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남에게 사랑을 줌으로써 이웃도 살리고 나 자신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자신을 남에게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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