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는 과정은 이렇다. 유다 왕국의 마지막 성군 요시야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대상 3:15). 애굽과의 전쟁에서 요시야 왕이 갑자기 전사하자 백성들이 추대한 왕은 둘째 왕자였다(여호아하스 또는 요하난으로 불리는 둘째가 먼저 왕이 되었기에 족보에는 맏이로 기록되고 있다. 왕하 23:30-36).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애굽 왕이 첫째 왕자를 내세워 괴뢰정권을 세웠다. 그런데 BC605년 느부갓네살 왕이 즉위하자마자 첫 전투에 나서(렘 46:2) 유프라테스 강 상류 갈그미스까지 쳐들어온 애굽 군대를 대파해 버렸다. 이를 지켜본 유다 왕국의 여호야김 왕은 얼른 친 바벨론 정권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그렇지만 BC601년이 되자 애굽 군과 바벨론 군은 팽팽한 세력균형을 보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유다 왕 여호야김은 등거리 자주노선을 천명했다. 정복왕 느부갓네살의 위력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대규모 공세를 취하여 애굽 군대를 아예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몰아냈으며 BC597년 괘씸한 유다 왕을 사로잡아 갔다. 이때 잡혀간 유다왕이 여호야긴이었으며 그 아비 여호야김은 다행스럽게도 1년 전 병사함으로써 포로 신세를 면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 왕국에서 쓸 만한 것은 인재뿐 아니라 재물까지 싹쓸이했으며 유다 왕의 두 번째 숙부인 시드기야를 앞세워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했다(왕하 24:10-12, 17).
멸망의 직접 원인은 시드기야가 애굽의 강경파 군부와 짜고 기습적으로 애굽 군대를 끌어들여 예루살렘에 남은 바벨론 세력을 몰아냈고(렘 37:1-5, 11), 이에 대노한 느부갓네살이 BC588년 대군을 이끌고 재침하여 3년 만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함락되었다(왕하 25:1-7).
느부갓네살 왕은 BC605년 친 바벨론 노선으로 돌아선 유다 왕에게서 귀족자녀들을 인질로 받아 3년간 왕궁에서 교육시켜 양국 문물을 아는 학자와 통역관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그 가운데서 가장 빼어났다. 느부갓네살 왕은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았다(단 2:48-49, 3:30). 이것은 갈대아 인들의 신 바벨론 제국이 명실상부한 패권국이며 다민족 제국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능력만 있으면 중용될 수 있는 열린 제국이었기에 소수의 갈대아 인들이 찬란한 제국을 경영할 수 있었다. 또 느부갓네살 다니엘과 유대 인들의 여호와가 왕과 왕국의 흥망성쇠까지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체험으로 깨닫게 되고 이를 고백한 왕이기도 하다(단 2:47, 3:29, 4:30-37).
느부갓네살 왕이 유대인 현자들의 지혜를 빌리고 그들의 신 여호와의 능력을 칭송했다고는 하지만 유대인 백성들에게 완전한 신체적, 종교적 자유를 준 것은 아니었다. 이 일은 그가 죽고 나서 23년이 지난 후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천하통일을 했을 때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과 비교할 때 분명히 신 바벨론 제국은 열린 다민족사회였다. 그런 관점에서 유다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생활은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의 앗수르 포로 생활과 상당히 다르다.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의 식민정책과 혼혈정책으로 종족의 순수성마저 말살되었지만 유다 백성들은 종교적, 신체적 자유를 어느 정도 누리면서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는 페르샤 제국 시대까지 만날 수 있었다.
'묵 상 > 하나님이 그들과 만났을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에 쓰임 받지 못한 '권력의 화신'[41 ▶메대 왕조의 다리오 왕] (0) | 2009.08.08 |
---|---|
세속적 실용주의에 빠져 망국의 원흉이 된오만한 지도자/ 바벨론의벨사살왕 (0) | 2009.08.08 |
하룻밤 새 무너져버린 오만한 패권 ▶38 앗수르의 산헤립 왕 (0) | 2009.08.08 |
복음의 시대를 미리 내다본 묵시의 예언자 ▶ 다니엘] (0) | 2009.05.18 |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의 부활을 예언하다 [에스겔] (0) | 2009.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