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성령 충만한 자녀와 부모/(엡 6:1-4)

미션(cmc) 2009. 10. 7. 18:14

성령 충만한 자녀와 부모


(엡 6:1-4)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세월이 갈수록 개인주의가 더욱 팽배해지는 때에 추석은 부모와 조상들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흩어졌던 가족과 친지의 끈끈한 정과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주는 전 국민의 명절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정을 통해서 태어나 자라서 또 가정을 갖지만 그 많은 가정 가운데 가정다운 가정, 행복한 가정은 그렇게 많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가정이 없이는 사회도 국가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가정은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파괴된 자녀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사회악에 물드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문제아들과 청소년들의 범죄가 대부분 아늑한 가정의 사랑을 마음껏 경험하지 못하면서 성장하였거나, 현재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먼저 부부요, 그 다음에는 자녀요 그 다음에는 또 가정을 분가하여 자녀를 낳게 되면서 사회와 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 에베소서를 통해서 성령 충만한 부부의 책임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은 이어서 성령 충만한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이 같은 구조는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내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다가 아니라, 성령 충만한 성도는 자기가 속한 가정과 사회와 국가 속에서 각기 나름대로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배의 진수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배의 균형잡기
 사도 바울은 로마서나 오늘 성경 에베소서 에서도 동일하게 처음에 바른 믿음에 대한  은혜의 교리를 말하고, 나중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실제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균형 잡힌 신앙과 삶입니다.
 그것은 마치 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배의 균형을 잡는 것처럼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적인 균형인 것입니다.
 그 같은 균형을 잘 이루어야 건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며 건강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믿음은 항상 교회에서만 불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도 항상 빚을 발하는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와 같은 영적인 균형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성령 충만한 자녀와 부모의 책임에 대해서 가르치는 말씀으로 우리도 어제는 자녀였으며, 오늘은 부모의 입장에서, 오늘은 자녀지만 내일에는 부모가 될 입장에서 각자 자신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받을 때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1. 성령 충만한 자녀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여기서 ‘순종하라’는 말은 부모의 말을 ‘귀로 듣는다’는 뜻만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대답하고, 복종하고, 따른다는 뜻으로 항상 계속해야 할 것을 명령하는 현재형입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서 자녀의 생명을 생산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녀를 양육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의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지켜야 첫 번째 명령이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부모 공경을 인간관계에서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지켜야 할 첫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나님은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부모를 공경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딤전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여기서 ‘효를 행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다, 예배하다, 경건하다, 존경하다 는 뜻으로 부모 공경은 제사와 같은 형식이 아니라 먼저 마음으로 공경해야 함을 뜻합니다.
 설령 그렇게 효도 할지라도 그것은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함은 이미 부모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식이라면 당연한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은 마치 고리채 빚을 지고 갚지 않는 사람과 같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효도는 윤리나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처럼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신앙의 차원이라는 점이 기독교의 차별성입니다.
 물론 어느 나라 민족을 막론하고 자기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대부분의 종교나 전통적인 윤리 도덕이 다 부모 공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모를 공경해야 할 사람은 자식들은 무관심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모태에서부터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 인간은 어려서부터 효도를 본보이고, 부단히 가르치지 않으면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도를 할 수 없습니다.
 1) 가정은 어떻습니까? 점차 핵가족 맞벌이 부부의 삶으로 인해 자녀들에게 부모 공경을 가르치거나 본보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형제가 있어도 서로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고 미루는 잘못된 풍토가 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학교는 어떻습니까? 입시 위주의 암기식 교육이기 때문에 도덕이나 윤리 과목은 가르치지도 않는 형편입니다.
 3) 사회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사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도덕과 윤리는 뒷전이고 오로지 경제 성장 위주의 실리주의와 황금만능주의와 출세지향주의로 전락되면서 도덕 기능은 마비가 된지 오래입니다.
 4) 흔히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으로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권위를 동등하게 여기는 군사부일체라는 좋은 전통을 지켜왔던 민족이었으나 지금은 부모와 스승을 구타하고 집단이기주의가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는 동방무례지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를,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위를, 국가에서 공권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오늘 우리 사회는 짐을 가득 실은 자동차가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브레이크가 파열되어 제동이 되지 않는 상태처럼, 아무리 경제가 성장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근본 윤리 도덕이 회복되지 않는 한 국가적으로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07-12-31 동아 컴 뉴스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부모의 소득이 낮을수록 자녀들의 발길이 줄어든다는 충격적인 조사결과가 나왔다.  정재기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의 '한국 가족· 친족 간 접촉 빈도와 사회적 지원양상 : 국제간 비교' 논문에 따르면 자녀와 동거하지 않는 60세 이상 부모의 소득 교육 연령 성별 결혼상태 등 각 속성이 자녀와의 대면(對面) 접촉 빈도에 미치는 영향 정도를 분석한 결과, 통계적으로는 부모 소득이 1% 높아지면 부모가 자녀와 1주일에 한 번 이상 대면 접촉할 가능성이 2.07배나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14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만이 부모의 소득이 높아야 자녀들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서글픈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외국은 정반대로 부모의 재산의 적으면 적을수록 오히려 자녀들이 그 부모를 불쌍히 여겨 많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예화
지난여름 지구 온난화로 점차 녹아가고 있는 빙하를 사진에 담기 위해 알라스카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출항을 하였는데 1900여명의 관광객 가운데 젊은이나 동양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캐나다와 미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노인들이 상당수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고령자와 거동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탄 노인들이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에 담기 위해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부모를 모시는 자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캐나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캐나다 사람들이 사는 밴쿠버가 세계서 가장 사람 살기 좋은 지역으로 항상 일위를 점하고 있음은 자연 환경이 좋기 때문만은 아님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엡 6: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기독교를 가리켜 복음이라고 하는 까닭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닮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됨으로 인해 가정과 사회와 교회가 회복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갈수록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기는커녕 불효하는 자식들이 많아져 가는 세상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불신자들에게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증인이 되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기독교가 있기 전에 이미 세상의 종교나 도덕이나 윤리가 가르쳐 온 부모 공경에 대해서 또 다시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옳은 줄은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강요하는 잔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연 오늘 성경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이 전통 종교나 윤리 도덕과 같은 수준의 효도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잘 믿음으로 영생 구원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장수와 형통의 축복을 받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이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상 최초로 성령이 강림하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 중에는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어른만이 아니라 자녀들도 부모와 함께 참석한 자리라면 성령이 각 사람 머리 위에 머물렀다고 하는 것은 부모는 물론 자녀들에게도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심으로 요엘 선지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행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자녀들이 바로 성령 충만한 자녀들이요, 성령 충만한 자녀들이 바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모인 곳이 교회와 가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니며 성령 충만한 자녀들은 갈수록 세상 풍조가 불효하는 세상이지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고 그것만이 나와 내 자손이 복을 받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열심히 돈을 벌고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고하고 맞벌이를 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만일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창조주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보여 주신 모습을 따라,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복인 것입니다.
(골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님과 관계성을 의미하며, 주님과 연합된 상태를 의미하며, 주님이 원인이 되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순종하라’는 말씀처럼 부모에 대한 순종이 의무감이 아니라 주안에서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명령이라는 점에서 일반 도덕과 차별화된 명령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남이 아닌 내 부모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녀가 아니고서는 부모에게 진심으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마음에 깨우치는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죄송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여도 좋은 일이 있다면 하물며 부모를 공경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에게 어찌 축복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믿음의 자녀 성령 충만한 자녀들에게 하늘에 상급만이 아니라 지상에서 자신은 물로 그 자녀 손들에게 까지 잘되고 형통하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2. 성령 충만한 부모의 책임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를 보게 되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이 다 짝이 있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밝은 낮이 있으면, 어두운 밤이 있고, 추운 겨울이 있으면 무더운 여름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부모가 있으면 자식이 있는데, 하나님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책임을 자녀에게만이 아니라 부모에게도 동등하게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와 윤리 도덕이 강조하고 있지만 오늘 성경 말씀처럼 부모에게도 자녀에 대한 책임을 균형 있게 강조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 기독교의 차별성입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자녀의 생명을 생산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녀를 양육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하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부모 공경의 계명을 내리심으로써 부모를 공경함이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도리임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위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권위는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자기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감정이 자녀 교육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자녀를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엡 5: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노엽게 하지 말고’라는 말은 부모들의 일방적인 권위주의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아 부모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좋은 학교 좋은 학원에 보내는 것처럼 외형적으로 무엇을 잘해주고 못해주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먼저 자녀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것은 자녀에게도 상처가 되고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자녀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임을 이해하는 마음의 자세가 최우선임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골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여기서 ‘낙심할까'라는 말은 '의기소침하다, 심령이 상하다'는 의미를 가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때 그렇게 되기 쉬울까요?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책임은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무조건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순종과 복종만을 강요할 때 자녀들이 낙심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부모는 자신의 자녀이지만 아이들은 잘못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 있다면 잘못하는 것만 가지고 계속적인 책망을 하기보다는 잘하는 것에 대해서  칭찬이 보약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그러나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위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권위는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녀를 낙심하게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소극적으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함으로써 자녀 교육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녀 교육의 기준이요 교과서가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오늘 성경에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는 말씀처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성경 말씀이 주 교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입술이 아니라 행동으로 본을 보이신 것처럼 본을 보임으로서 자녀들로 하여금 그 본을 보고 그대로 따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신의 행위를 자녀들에게 완벽하게 보이라는 말이 아니라 부모 스스로가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그 교훈을 실천하는 모습을 본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자녀들은 입으로만 가르치는 것보다 더 쉽게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법과 서로 사랑하는 법과 믿음으로 정직하게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 화
 지난 1월에 태어난 지리산 새끼 반달가슴곰이 최근 어미와 함께 월동 준비 중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통상 곰은 가을이 시작되면 동면 준비에 들어가기 위해 왕성한 먹이 활동을 하는데 어미는 새끼 곁에 머물면서 수시로 나무 타는 방법, 먹이 섭취 방법등 새끼가 자연에 스스로 적응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도 그러하거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더 말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기록될 당시 부모의 권위는 대단한 시대였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시대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자녀들을 종으로 팔수도 있었고 심지어 사슬에 묵은 채 일을 시키고, 마음대로 벌을 내리고, 심지어 사형을 시켜도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처럼 가부장 중심의 권위주의 시대에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선택이나 자유의지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충만한 부모들이라고 해서 과거에 반 기독교적인 문화에 익숙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과거의 습관이나 사회적인 풍습이나 통념을 깨뜨리고 자기 나름대로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자녀들을 양육할 때 세상 기준으로 키우지 말고 오직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따라 자녀들을 가르치라고 하는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경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하는 가치 기준이 절대적이지 못하고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나의 행동이 좌우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이는 마치 예수를 믿지 않거나 믿는다고 할지라도 성령 충만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자녀들을 주일날 교회로 보내지 않고 학교나 학원으로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설령 내 자식이 학교 공부를 잘한다고 할지라도 남들처럼 주일날 학교나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우리 아이가 뒤떨어질 것 같고 입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 것 같은 불안감을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성령충만한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는 마치 주일에는 반드시 자녀들을 주일학교로 보내어 믿음으로 성경을 배우게 하고 기도를 배우게 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훈련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령 충만한 부모는 소극적으로는 자녀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가르치는 기준이 세상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녀들의 진정한 부모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녀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로 성령 충만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고 사랑으로 잘 감싸야 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어제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던 어린아이였었고 오늘의 어린아이는 내일이면 부모가 되어 자녀를 낳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녀 교육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모는 권위주의 형으로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는가 하면, 어떤 부모는 마치 남의 자식처럼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최초의 가장 훌륭한 인간관계라고 페스탈로치'(Pestalozzi)가 말한 것과 같이 가정이 지니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총명한 아이도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좋은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서 그 교육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1) 가정은 인간의 성장과 발달의 최초의 환경이며, 부모는 최초의 교사입니다. 인간 누구나 가정에서 부모를 통해서 삶에 필요한 기초적인 행동양식을 배우고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2) 가정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녀들이 유일하고도 특별한 존재임을 배울 수 있는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러나 산업 사회가 형성되면서 가정과 부모의 교육적 기능과 신앙적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중요성까지 약화된 것은 아니며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에 하루 빨리 가정이 회복되어져야만 합니다.
 어떤 부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장차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세상에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어제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던 어린아이였었고 오늘의 어린아이는 내일이면 부모가 되어 자녀를 낳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부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장차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예수를 잘 믿어 성령이 충만한 내적인 체험이 다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가정과 사회와 국가 속에서 성령 충만한 성도는 각기 나름대로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자녀가 되어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성령 충만한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 좋은 자녀가 자라서 또 좋은 부모가 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