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성령 충만한 종과 상전/(엡 6:5-9)

미션(cmc) 2009. 10. 11. 14:35

성령 충만한 종과 상전


(엡 6:5-9)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오늘 성경 말씀은 노예 제도가 보편화되었던 로마 제국 시대의 기록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노예 제도가 없기 때문에 필요가 없는 말씀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합리적인 질서를 위한 조직이 요청되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사라졌을 지라도 상사와 부하,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없이 그러한 조직 사회에서 어떤 사람은 고용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고용을 하고, 어떤 사람은 상사가 되어 부하직원을 거느리고, 어떤 사람은 상사를 섬기기도 합니다.
 그러한 조직 안에 서로 불화하고 갈등하고 대립을 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장기적인 집단 파업으로 심각한 노사 대립은 결과적으로 한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제는 물론 정치적인 문제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리가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다.
 만일 비약적인 발전도상에 있는 우리나라가 그와 같은 갈등문제만 잘 풀어갈 수 있다면 한국 경제의 회복과 선진화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이천 여 년 전의 기록이지만 바로 그 같은 문제에 대한근본 해결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다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인권이 말살되고 마치 물건이나 짐승 취급을 받는 잘못된 제도가 보편화된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복음이 들어가면서 성령 충만한 노예와 주인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 성령 충만한 노예와 성령 충만한 상전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성령 충만한 종과 상전의 차별성에 대해서 오늘 성경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성령 충만한 종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여기서 ‘종들아’라고 하는 말씀의 종은 로마 제국 치하에서 보편화된 ‘노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노예’는 별도의 계급인 경우도 있지만 주로 전쟁에서 패전국민을 전리품으로 잡아다가 노예 시장에 돈을 받고 팔거나 아니면 빚을 지고 갚지 못했을 때 몸으로 대신 빚을 갚기 위해 노예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예 중에는 주인보다 더 신분이 높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노예가 되기 전에는 의사나 교사나 행정가와 같이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패전국민으로 노예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로마 제국 치하에 그 숫자는 무려 6천 만명이나 되었고, 로마 도시의 전인국의 1/3 에 해당하는 30만에서 30만 가량이 공인된 노예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노예가 로마 제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제국 치하에서 어느 누구도 노예 제도가 악법이기 때문에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높은 지성을 가진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조차 ‘노예는 일종에 영혼을 가진 재산이다.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다 도구가 생명없는 노예인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까지 말했습
니다.
 로마법으로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주인의 소지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주인 마음대로 채찍을 가하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을 시키거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가기 전에는 로마 제국내의 노예들 가운데 채찍에 맞고 눈이 뽑히고, 맹수에게 던져지거나 십자가에 달려 죽기도 했습니다. 도망가다가 잡히면 불도장으로 낙인을 찍고 채찍에 맞고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되는 줄 아라면서도 탈출을 시도하거나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노예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마침내 로마 제국에도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에 다수의 노예들은 물론 노예를 거느리는 상전들까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차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그와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하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과연 노예인 종들에게 유리한 말씀일까요? 아니면 불리한 말씀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노예가 된 종들의 입장을 변호하고 보호하는 말씀이 아니라 마치 상전의 편에서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종들에게 불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1) 상전에게 순종하라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여기서 ‘두려워’하고는 그리스도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과 동일한 말로 지금까지 아내가 남편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던 것과 똑 같은 말입니다. 이어서 ‘떨며’라는 말도 같은 의미로 바울은 종들에게 상전을 폭군처럼 두려워하며 무조건 섬기라는 듯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 다음 ‘성실한 마음으로’라는 말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순수한 마음으로 상전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두려움과 떨림은 그 다음에 나오는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는 말씀과 같이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두려움으로 상전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른 종들과 분명히 차별화된 모습으로 주인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2)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눈가림’이라는 말은 주인이 보는 눈앞에서는 성실한 척 하지 말고 혹시 주인은 나를 보지 않을 지라도 나의 진짜 상전인 그리스도의 눈은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상전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동일한 마음의 자세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의 상전을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3) 주께 하듯 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종이 상전을 섬기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은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라는 말이며, 둘째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일을 하라는 권면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 한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종이 주인을 섬기는 일상적인 일도 주목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상전의 눈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여삐 여기신 것은 다른 형제와 달리 중심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짓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그 당시 노예를 짐승처럼 취급하던 시대에 종들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보이는 말입니다. 만일 종들이 이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듣게 될 때 하나님도 사람들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외면하고 부자와 힘이 있는 자를 유리하게 하는 편파적인 하나님처럼 오해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2. 성령 충만한 상전들
 우리가 지금까지 성령 충만한 부부나 부자지간의 성경적 윤리의 공통점은 편파적이 아니라 공정하게 양편에게 적절한 책임과 의무를 균형 있게 가르쳤음을 배웠습니다.
 오늘 성경에 종과 상전에 대한 윤리도 마찬가지로 종에게 불리하고 주인에게만 유리한 편파적인 노예 계약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주인에게도 동등한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고 있음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여기서 ‘상전들’이라는 말은 힘이 있는 권세자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신앙적으로 주님을 부를 때 사용되는 ‘큐리오스(kuvrio")’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신조들 중의 하나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왕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만주의 주로, 만왕의 왕이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위협을 그치라’는 말은 상전이 종들에게 일을 시킬 때 폭언이나 폭력을 휘둘러 위협하므로 일을 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상전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전을 사랑하신 것처럼 상전도 자기의 종을 사랑하라는 말씁입니다.
상전은 종에게 위협을 가하여 억지로 일을 시키지 말고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대하여 마음에 감동을 주어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치하에서는 상전이 종을 부릴 때 채찍질을 하고 굶기는 방법을 일을 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상전들은 그들과 달리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종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모습을 통해서 신자와 불신자, 성령 충만한 자와 충만하지 못한 자를 차별화시킴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하나님의 대행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상전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에 감동을 받은 종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당시 문화와는 맞지 않을 것이며, 종들에게 그렇게 하면 버릇이 나빠지거나 일의 능률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에 염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한 상전들이 자신의 종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대할 때 하늘에 게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상하여 주심을 믿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상전이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은 영원한 상전이 아니라 자기를 상전되게 하신 분은 진짜 상전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자신도 그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 지극 정성으로 섬겨야 할 자임을 신실한 종의 모습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상전 자신은 땅에서 상전이지만 자신의 상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종의 마음 중심을 보지 못하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사람들처럼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중심으로 자신의 종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렇게 할 때 상전도 장차 자신의 영원한 주인되신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아야 할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는 섬겨야 하는 종과 섬김을 받는 상전의 구별이 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땅에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처럼, 땅의 상전도 하늘에 계신 상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종을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차별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본을 보이신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이신 예수님이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다고 하였으며, 우리는 주님의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시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이 이같은 말씀을 깨닫고 난 후에 자신을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자신만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마치 특권층처럼 소개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도 동일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골 4: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성령 충만한 종과 상전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에 대한 교훈이 바로 빌레몬 서에 나오는 오상전인 빌레몬과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와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빌레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마땅히 당시 노예법으로는 가혹한 벌을 받아야 마땅한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에 대해 관대히 대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몬 1:16-18)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사도 바울이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노예법을 어기고 도망친 범법자임에도 불구하고 관대하게 대하라고 가르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오네시모가 옥중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은 이미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과 빌레몬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역자가 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감옥에서 변화시킨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잘 영접하여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형제처럼 대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바울을 영접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받아야 할 빚을 자신이 대신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보상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여기서 ‘그대로 받을 줄 앎이라’는 말은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마치 부메랑처럼 자신이 한 행위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심는 대로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종은 육체의 상전이 어떻게 자기에게 대하는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대하지 말고 주를 변함없이 섬기는 신앙자세로 상전을 섬길 때 원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보상하여 주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 내 노예는 자유 시민의 4배나 되었고, 로마 시에서만 65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노예가 되는 원인은 부채를 갚을 길이 없어 몸이 팔려 가는 경우,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된 경우입니다. 당시 노예 한 명의 가격은 은 30세겔이었고 보통 소 한 마리 값에 해당합니다.
 당시 노예의 생활은 너무나 처참하였고 인격은 전혀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가축과 같이 살아 있는 상품에 지나지 않았고,  주인에게 불복종하면 채찍질을 당하였고 심할 경우는 십자가에 달렸으며, 맹수에게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대다수의 상전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종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늘 성경을 통해서 성령 충만한 상전들을 통해서 그 상식을 뒤엎고 잘못된 노예 제도의 관행을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 성령 충만한 종은 믿음이 없는 상전에 감동을 주게 되면, 그렇게 함으로 인해 성령 충만한 상전은 믿음이 없는 종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더 나아가서 종과 상전이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게 하며, 그 결과 황제 숭배와 우상 숭배로 가득 찬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무너뜨리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남편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육신의 부모를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하는 가정이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될 수 있으며, 육신의 부모를 하나님처럼 육신의 자식을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할 때 성령 충만한 가족이 되는 것처럼, 종이 상전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하고, 상전이 종을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사회가 될 때 종과 상전이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로마 제국의 복음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으로 일한 백성에게는 약속하신 상급을 주시고 불충성한 자에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루십니다.
 성령 충만한 종이 자신의 상전을 섬길 때 그리스도에게 하는 것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손해를 보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하나도 손해가 없고 오히려 칭찬과 상급이라는 보상이 따르는 복된 일인 것입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노예 제도가 로마 시대와 달리 인간 평등과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에 오늘 성경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날에 노예 제도가 없을 지라도 사회 구조 속에서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 피지배자와 지배자가 있습니다.
 오늘 내가 어떤 부류에 속하든지 오늘 성경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아 섬기는 종이면 겸손하고 진실하게, 섬김을 받는 자라면 아무리 불신자들이 임금을 착취하고 인간을 차별하고 인격적으로 상처를 준다고 할지라도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며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 부분을 우리가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 주부는 마치 남편을위해 음식을 만들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드실 것처럼 음식을 요리하고, 손님을 대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접하듯이 한다면 소홀함이 없을 것이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칠 때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고 간호할 때, 변호사가 의뢰인을 도울 때, 점원이 손님에게 물건을 팔 때, 회계사가 장부를 정리할 때, 근로자가 현장에서 일을 할 때 각각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가장 민감한 노사 문제는 경제 성장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까?
 물론 그 답을 노사가 다 알고 있습니다. 노는 열심히 일을 할 의무를 가지고 사는 정당한 임금을 지불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사의 갈등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강하지만 자기의 책임에는 소홀히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의 답은 노사가 각가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 집중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안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그것은 책임과 의무감에 억지로가 아니라 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면되고 사는 노에게 이득을 보려고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하신 것처럼 노에게 사랑을 베풀면 되는 것입니다.
(골 3:23-25)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과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면 저절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사주와 직원이 모두 다 크리스천들인 기업들마저 심각한 노사 갈등을 겪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화해와 일치와 연합을 통한 상생과 번영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성령 충만한 부부와 성령 충만한 가족과 성령 충만한 노사가 되는 새로운 사회의 출현입니다.
 빈부귀천이나 유무식의 차이를 갈등의 원인으로 삼지 말고 다양성으로 삼아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여 조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사회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한 하나님을 믿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상대방에게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적용하는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빈부귀천 유무식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종이나 자유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죄인들로 차별이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