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라
(눅 19:1-4)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눅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눅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눅 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우리가 자주 쓰는 ‘은혜’라는 말은 어떤 조건이 충족된 결과가 아니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을 값없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기 전 ‘인과응보’사상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혜’라는 말씀도 인과응보 적으로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이를 테면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선하든지 열심히 특심했기 때문에 당연히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믿음이나 열심이나 착한 성품이나 선행을 한적이 없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제외시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러한 조건이 충족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정죄와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물어 메마른 땅에 비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민족으로는 이스라엘이요 개인적으로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은 믿음의 조상이나 예수님의 제자나 칭찬받는 성도가 되기는커녕 구원조차 받기 어려운 무자격자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시고, 부르시고, 연단하시고, 세우시고, 일꾼으로 귀히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주인공 삭개오가 그와 같은 은혜를 받은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 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은 우리교회와 성도들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 내일부터 심령 부흥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금번 부흥회에 온 교우들이 더욱 큰 은혜를 받아 성령이 충만하며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로 신앙이 업그레이드되는 천국 잔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 마지막 순회 전도 사역 기간에 예수님이 여리고를 방문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하시는 사역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이 방문하신 여리고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여리고는 사해 북쪽 연안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예루살렘 동북동쪽으로 28km, 요단강 서쪽으로 11km 지점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의 첫 번 째 성으로 천연한 오아시스가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 비옥한 곳으로 사람들이 부요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크고 작은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리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여리고를 방문하셨을 때 시력을 잃고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쳤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소리 지를지 못하도록 꾸짖었으나 개의치 않고 더욱 심히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였을 예수께서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 맹인을 고쳐주셨습니다.
(눅 18: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눅 18: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눅 18: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눅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오늘 성경은 그 후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나시고자 하실 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더욱 큰 은혜를 받게 된 이야기입니다.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눅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러한 삭개오는 예수님과 너무나 대조적인 신분의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셨지만 삭개오는 부자였고, 예수님은 사회적인 지위가 없었지만 삭개오는 세리장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삭개오 중 누가 더 부자이고 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당연히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가 가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을 도와야 할 사람입니다.
물론 세상 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등식이 성립이 되겠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돈과 권력은 있었으나, 믿음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소망이 없었고 친구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돈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돈으로 그 모든 것들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하며 늘 외롭게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삭개오가 예수님이 자기가 사는 여리고에 오셔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을 하게 되었고 여리고에 찾아오신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을 꼭 한 번 만나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며 그 마음이 곧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반드시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만 건강을 유지하고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은 먹기를 사모합니다. 끼니를 거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맛있게 먹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병들면 소화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억지로 먹다가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체하게 되고 도리어 병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병이 들게 되면 입맛을 잃게 되고 아무리 좋은 음식도 먹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적 세계입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신령한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여기서 ‘사모하는’이라는 말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뛰다, 돌진하다, 이리저리 달려가다’는 말씀처럼 적극적인 말씀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서 ‘사모하라’는 말씀은 열정적이고, 부러워하며 본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마음만 아니라 자세와 행동을 뜻하는 현재 진행형 동명사로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이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돈이 많은 부자였고 세리장이라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권력을 사모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삭개오처럼 금번 부흥회에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시간마다 참석하는 사람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2.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큰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목이 마른 사람은 우물에 가야하고 배가 곺은 사람은 식당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주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도, 아무리 예수님을 사모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매우 평범하고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면서도 더욱 큰 은혜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님께로 나오기를 주저하고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그것을 마귀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안팎으로 훼방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삭개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전에 어느 누구보다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애물은 그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 당시 여리고는 요단강 동편 지역으로부터 반입되는 물품이 여리고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세금을 내야만 하였습니다. 그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부정을 범하지 않았다면 그가 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삭개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미 나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돈은 벌었지만 돈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만일 사람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면 사람을 잃게 되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기면 신앙을 잃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삭개오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선한 생각을 품고 그것을 이루고자 시도하는 사람은 자주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더욱 큰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본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증거 되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물론 당시에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찾아나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누가 권해서가 아니라 자원하여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으나 안팎으로 장애물이 많았습니다.
만약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 오늘 우리 주변에 있다면 그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아무도 그에게 전도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과 방법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습니다.
(눅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여기서 ‘할 수 없어’라는 말은 미완료 동사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계속 시도를 했지만 그것이 이루어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1) 내적인 장애물
삭개오는 돈은 많았으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게 되면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고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장애물을 통과해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여기서 ‘수군거린다는 말은 불평한다는 미완료 동사이고 이르되라는 말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삭개오를 비난하였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삭개오의 입장이라면 대인 기피증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그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하였습니다.
2) 외적인 장애물
외적인 장애물은 예수님을 마치 독점한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기득권층들이 삭개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적대감을 극복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그 같은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유달리 다른 사람에 비해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좀 더 잘 보기 위해서 세리장이라는 체면을 무릅쓰고 예수님 통과 지점으로 예상되는 곳에 심겨져 있는 돌 무화과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걸터 앉아 예수님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눅 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여기서 ‘달려가서’ 라는 앞으로 라는 말고 뛴다는 말의 합성어로 예수님의 일행을 제치고 앞질러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나름대로 장애물들을 극복하려고 하는 의지가 부족하여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금번 부흥회에 우리는 그 같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기필코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3. 주님께 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 주님이 지나가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주님이 마침내 그 아래를 지나시다가 삭개오를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여기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Zakcai'o")의 뜻은 순전하다 의롭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의 현재의 삶은 정반대로 돈만 좋아하고, 돈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약자를 등쳐서 자기 배만 불리는 불의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순전하고 의로운 사람, 삭개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삭개오처럼 그 같은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과연 나는 이름값을 하고 살아왔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나는 언제까지 이율배반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반성하는 마음이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삭개오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동일하게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오늘 우리가 이처럼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엡 4:1, 개정)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살전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예수님은 삭개오를 부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한다는 말은 어떤 장소를 떠나지 않고 변함이 없이 지속적으로 남아있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유한다는 말은 흔들지 않고 굴하지 않고 굳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삭개오를 만나시기 전 예수님은 본래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중이었으나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여 돌 무화과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삭개오를 만나신 후 주님은 여리고를 지나가시려는 계획을 바꾸시고 삭개오의 집에 머무시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주님의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기를 원하였었으나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머무시겠다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정말 삭개오는 기대이상의 넘치는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삭개오는 주님으로부터 무슨 황금덩어리를 받은 것도 아니고, 암을 고침 받은 것도 아니고 단지 하루밤 주님과 더불어 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섬겨야하는 수고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크게 즐거워하면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여기서 ‘즐거워’라는 말은 중단 없는 지속적인 기쁨을 뜻하는 것이고, 영접했다는 말은 쌍수를 들고 주님을 환영하였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같은 즐거움이 삭개오 만의 기쁨이 되지 않고 오늘 저와 여러분도 삭개오처럼 마르지 않은 기쁨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삭개오처럼 주님을 두 손 들고 환영하며 내 마음에 영접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삭개오만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과도 유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금번 부흥회가 지금까지 머리로만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던 주님을 가슴으로 받아 드리시고 마음을 열고 영원한 나의 주님으로 모셔드리는 영적인 체험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도 삭개오처럼 놀라운 변화가 안팎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 바람직하게 긍정적으로 변화가 동반되어지는 큰 은혜가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오로지 돈만을 위해 불의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 관계가 완전히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고 이웃에 손해를 끼치는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과거의 죄를 돌이켜 회개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베푸는 긍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죄인 삭개오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삭개오로 변신하는 더욱 큰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춘계 심령부흥회에 삭개오처럼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되,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핑계하지 말고 그것을 극복하고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중에 주님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영접하고, 지난날의 죄를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더욱 큰 은혜를 기필코 받아야합니다.
(시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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