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 26:41-46)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 26: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마 26: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마 26: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마 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현대인들이 옛날에 비하면 고학력이고, 잘 먹고,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지만 진정한 이웃이 없고 외로움을 타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사회 전 분야에 산업화가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1차 산업과 제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든 반면 사무직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계속 늘어갑니다.
따라서 점차 육체적으로 노동하는 시간이 짧아지고 기계나 컴퓨터와 씨름하는 시간은 많아지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또한 인권의 향상과 더불어 노동 시간은 줄고 상대적으로 여가 시간이 확대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여가시간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비인격적인 컴퓨터나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를 즐기면서 더욱더 인간성을 상실해 가면서 더욱 ‘군중 속에 고독’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제임스 카츠 교수와 같은 이는 “인터넷을 통해 수백만 명 이상과 새로운 우정을 쌓을 수 있게 됐으며, 오히려 이웃과 가족이라는 한계에서 해방되어 국경이 사라진 신천지를 창조하였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에 해당하는 말 일 것입니다.
노먼 니 교수와 같은 이는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은 따뜻한 말을 주고받을 수 없으며 점차 광범위하게 사회적인 고립을 유발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비인격적인 기계로는 상처난 인간의 내면을 치료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날로그 시대’라고 일컫던 예전에는 사람들이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즐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만 하였기 때문에 공동체의 모임이 활발했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라고 일컫는 현대 사회는 인터넷과 텔레비전이 발달하면서 혼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정보를 얻고, 은밀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대인 기피증이 늘어가고 군중 속에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중속에 고독이라는 말은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이질감과 고독을 느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예전에 비해 예배만 참석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면서 교회 안에 일꾼들이 변하지 않고 항상 몇몇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맡아 수고하는 가운데 기쁨이나 보람대신 육체적으로 힘들어 하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러한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오늘의 성도들은 과연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과 함께 시험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지 않게 보시고 그를 위해 하와를 지으셔서 아담과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아가게 하셨을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가정이 되었습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서로 마주하여 돕는 다는 뜻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복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유능한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가에 따라 좌우됨을 뜻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주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주변에 아는 사람은 많으나 친한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설령 친한 사람은 있다고 하나 실상 실패했을 때 도움을 주거나 좌절하게 될 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진짜 친구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고독한 현실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 홀로서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만이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도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찾아와 주셔야만 가능하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세상에 찾아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임마누엘’이라고 일컫는 것이며, 그 뜻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늘 유한한 인간들과 함께 하셔서 영적으로 무지하여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천국을 가르쳐 소망을 갖게 하시고, 각 가지 질병을 고쳐 주시고, 그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일을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현상들의 원인이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해 그렇게 하는 것 같아도 그 배후에는 사단이 주장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악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를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적하여 멸하시려고 세상에 오실을 것을 일찍이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약속하셨음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상하게’라는 말은 ‘분쇄하다, 눌러 부수다, 짓뭉개다, 박살내다’는 뜻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고 사단의 강력한 무기인 죽음을 무력화시킴으로 사단의 권세를 초토화시키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들은 예수께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귀신은 그야 말로 귀신같이 그것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막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사탄은 예수님을 여러 가지로 시험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게 되자 제자들을 시험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시험에 제일 먼저 말려 든 사람이 평소 예수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던 가룟 유다였습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 다음은 수제자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명분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반대하다가 예수님에게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는 지금도 사탄은 동일하게 우리를 시험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훼방하고 복음을 전도하거나 선교하지 못하게 하고 전도자들을 훼방하고 시험에 들게 하여 낙심하고 좌절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게 만드는 일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사탄의 역사로 알지 못하게 교묘히 위장하기 때문에 정작 사탄과의 영적 전투를 벌이지 않고 인간과의 전투를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끼리 벌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첨단 과학시대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귀신이 내린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무당에게 찾아가서 점을 치고 마귀를 달래기 위해 돼지 머리 앞에 제사를 하고 많은 돈을 드려 큰 굿을 하는 것입니다.
정작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그것을 인간적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보다는 오해하고 용서하기 보다는 미워하고 협력하기 보다는 분쟁하므로 마귀가 틈탈 기회를 제공하고 마귀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시험하던 마귀는 오늘도 성도들을 시험하고 있음을 깨닫는 다면 예수님이 그와 같은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극복하셨는가를 주목해야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과 함께 기도를
예수님은 점차 마귀가 제자들을 시험하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시험하여 예수님을 압박해 오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자세히 예고하여 주셨습니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마 20:18)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막 10:33)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눅 24:7)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
사단의 목적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알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그 일을 하시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셔야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성경을 알지 못하게 되고 선악에 대한 개념이 없이 죄 가운데 빠져 살게 되고 그래야만 사탄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마귀의 도전을 가리켜 ‘시험에 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사탄의 생각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그와 같이 시험하여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어 교회를 나오지 못하게 하고 성도들끼리 원망 불평하게 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게 하고 회의에 빠져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도록 시험하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님을 판 것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을 이미 아시고 당신 홀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 큰 시험을 목전에 두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이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것처럼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기도를 하기를 원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평소 기도하기 위해 자주 찾으시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제자들도 당신과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마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여기서 ‘매우 고민하여’ 라는 말은 극도로 괴로움과 슬픔에 젖어 있는 상태를 뜻하며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마치 파수꾼이 망대에 올라 적의 침투를 경계하는 것을 뜻하는 현재 진행형의 동사로 계속적으로 졸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유일하게 기도 뿐 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그와 같은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기 위해 몸소 깨어 기도하시되 세 번 씩이나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거듭하여 기도하시되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땅에 떨어질 때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대동하여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하신 것은 마귀의 시험에 대한 최선의 대안이 기도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만을 위해서 기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베드로를 시험하는 마귀를 아시고 베드로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마귀의 시험에 빠져 기도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였다면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하는 죄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에 고민하고 슬퍼하기는 하였으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처럼 졸며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돌아와서 그 같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심히 안타가워 하시면서 계속 기도하라고 재촉하신 후 당신은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셨습니다.
(마 26: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마 26: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예수님과 함께 기도의 동산으로 올라가는 것은 칭찬 받을 일처럼 생각되지만 기도해야 할 시간에 졸며 자는 것은 주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임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교회에 올라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지만 교회에 나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주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제자들처럼 졸며 자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나마 믿음을 지키고 육신의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나는 주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하고 있으나,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기서 ‘간구하시는’이라는 단어는 '간청하다, 청원하다, 호소하다‘ 는 뜻으로 역시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동사입니다.
그 주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실 뿐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신 것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 우리들과 더불어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 26:40-41)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마 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닥쳐올 십자가의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가실 것을 보여주는 당당하게 의연하신 모습입니다.
사탄의 시험을 기도로 이기신 예수님은 비록 원수들이 당신을 잡으려고 오는 것을 아시면서 피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맞이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들처럼 도피처를 찾는 소극적인 기도가 아니라 승리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이길 힘을 구하시는 적극적인 기도를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위기 때마다 번번이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을 도와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눅 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여기서 ‘힘을 더하더라’는 말은 ‘강해지게 하다’라는 뜻으로 계속해서 돕는 현재 진행형의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기도하는 자들을 계속적으로 더욱 강해지게 하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졸린 눈을 부비면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이 예고하신 것처럼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버리는 패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원인은 주님이 누차 말씀하신 것처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어 기도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 졸며 잠을 잤기 때문에 시험하는 자 마귀를 이길 만한 영적인 힘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조상 아담이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에 마귀의 시험에 빠져 죄와 죽음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또 십자가를 져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에게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남겨 두신 것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승리하심으로 하늘의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예 화
아버지가 목사님이시고 세계적인 유명한 골프 선수 신지애눈 큰 대회서만 5승 ‘통큰 지존’ 신지애는 무려 30만 달러의 우승상금을 거머쥐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평소 대회를 대비하여 피나는 연습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인 것입니다.
신지애의 성공 비결은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성실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열한 살 때 골프채를 처음 잡은 신지애는 교회 나가는 주말을 제외하곤 하루 10시간씩 골프연습을 한다. 지난 2004년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어린 두 동생이 병원에 입원하면서 병원 더부살이를 하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악착같이 운동을 한 성실함이 원동력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지애를 가리켜 골프를 하기엔 손이 너무작고 키도 작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지애는 오로지 연습에 매어 달려 하루에 1000번 이상 드라이버 샷 연습을 반복하고 퍼팅연습은 7시간동안 내리했다는 것입니다.
15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경영인 오찬 모임에 나온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53)은 "하루 14시간 연습하는 신지애 보면서 부끄러웠다 과연 내가 저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얼마전 남촌CC내 신지애 프로가 연습하는 곳을 들른 적이 있습니다. 전용으로 사용하는 코너를 가봤는데 공을 얼마나 열심히 쳤는지 코치에게 물어보니 매일 14시간 이상 연습을 하는 바람에 1주일마다 바닥매트를 갈아야 할 정도라고 귀띔합디다. 내가 저 정도로 열심히 사는가 반성하게 되더군요. "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와의 지속적인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최상의 훈련은 말씀과 기도 훈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을 기도하지 못하게 시험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치는 영적 패배자가 되게 하기 위해 여전히 우리를 시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된 우리들이지만 우리에게 무엇이 약점인지를 잘 아는 마귀는 때로 사업에 실패하게 하고 육신에 병이 들게 하고 인간관계에 배신을 당하게 하고 물질과 정욕에 빠져 신앙에서 등을 돌리게 하고 좌절하고 낙심하여 신앙에 열심히 식어지게 하여 우리를 넘어뜨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 전도에 제동을 걸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그러한 시험에서 건지시기 위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당신과 함께 기도하자고 우리를 부르시며,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 힘있게 기도하게 하시고 온갖 은사와 능력을 부어 신바람 나게 예수를 믿게 하시고 자신이 받은 은혜와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널리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때로는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 끄트머리를 우리에게 과제로 남기셔서 그것을 지고 감으로 주님이 승리하신 후에 받은 영광의 자리에 우리도 함께 가게 하기 위해 “일어나라 함께
가자“ 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영적 전투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고 예수님처럼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기도는 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말이며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노동하는 것처럼 기도가 지겨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나 홀로 지려고 하면 질 수 없으나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지면 주님이 나를 이기게 하여 주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과 더불어 영광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는 그 비밀을 모르고 하나님이 왜 내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가 원망하고 불평했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나를 사랑하심인 것을 깨닫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고 주님과 함께 일어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주제와 더불어 특별새벽기도회와 심령 부흥회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제자들처럼 졸던 자리를 떨고 일어나 기도의 동산에 주님과 함께 올라가 주님과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될 것이며, 약속된 천국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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