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교회와 성도
(엡 6:18-24)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엡 6: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엡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 거룩한 교회, 거룩한 성도, 거룩한 삶 등과 같은 ‘거룩’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실상 교회 밖에서는 거룩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조차 믿음이 좋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근엄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먼저 연상하기 때문에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정말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이라는 말은 마치 물위를 맨발로 걷는 것처럼 아무나 할 수 없는 비범한 삶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어느 도시보다 추악한 고린도 도시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모인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한결같이 다 음란하게 우상을 숭배하며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고린도에 세우신 교회와 성도들을 가리켜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처럼 살았던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셨기 때문에 거룩해진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신앙고백을 대신하는 사도신경 가운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서 ‘성령의 교통’이라는 말은 소통한다는 의미보다는 ‘서로 교제하고, 참여하고, 나눈다’는 뜻으로 널리 알려진 친교 (koinwniva)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이 거룩한 교회인가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요소 중에 예배와 교육과 전도와 봉사와 더불어 친교가 필수적인 요소로 손꼽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예배와 교육과 전도가 있을 지라도 성도들 간에 친교가 없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교회의 성도들이 마땅히 나누어야 할 친교는 어떤 것일까요? 함께 차를 마시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친교는 거룩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도 더 즐겨하는 교제의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교회의 성도들이 나누어야 할 진정한 친교와 나눔의 삶일까요?
1. 기도를 나누는 교회
오늘 마지막으로 살피고 있는 에베소 교회는 바울 사도가 개척한 고린도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들 가운데 어느 교회보다 많은 삼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며 정성을 쏟아 목회를 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바울이 마게도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밀레도에 이르러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을 하고 눈물로 작별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거룩한 교회의 성도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교제와 나눔을 삶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는 마지막 이별을 눈물로 작별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행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행 20: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와 작별한 이후에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죄수가 되었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갈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옥중에서도 에베소 교회의 영적 성숙을 위해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물론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은 바울의 도움기도가 필요할 정도로 미성숙하고 부족한 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존중하고 귀히 여기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세 가지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1)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2) 바울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바울은 이처럼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되 한시 바삐 자유 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비록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하였습니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공간적으로 먼 거리에 있고 다시 만날 기약을 할 수 없는 창살이 가로 막고 있지만, 기도는 그 같은 장애물을 뛰어 넘어 돈독한 교제와 나눔의 기회임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인들이 다 자기 살기에 바쁘고 남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남을 위해 기도를 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문제를 놓고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러나 거룩한 교회의 성도들은 기도할 때 자기 문제를 위한 기도는 맨 나중으로 미루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과 교역자와 선교사들을 위해, 교회 부흥과 나라의 경제와, 민족의 통일과 위정자와 지역 복음화를 위해 나눔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손해나 희생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그것을 위해 언제든지 달려 나와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교회는 제든지 기도할 수 있도록 24 시간 개방하고 있으며, 매일 새벽기도회와 이웃기도 단과 각종 기도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2. 위로를 나누는 교회
바울 사도가 로마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교회와 성도에게 보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가리켜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물론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과 전도한 성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바울을 정성을 다해 위로 한 교회는 유일하게 빌립보 교회 하나 뿐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복음을 처음 듣던 그날부터 오늘까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 협력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도우라고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선교비를 보내 주었기 때문에 바울이 큰 위로를 받고 친형제처럼 함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을 그처럼 위로한 빌립보 교회를 향해 바울은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이렇게 편지를 하였습니다.
(빌 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감옥에 갇힌 바울을 위해 무엇으로 어떻게 도움과 위로를 주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물론 에베소 교회가 바울의 고난에 대해서 모르는 체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지금 어떻게 감옥에서 보내고 있는지 걱정하며 염려하고 있음을 바울이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빌립보 교회와 달리 아무런 위로를 보내지 않았을 지라도 자기를 위하여 궁금해 하고 걱정하는 에베소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 지금 자기에게 가장 요긴한 사람 두기고를 에베소 교회에 위로의 사절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엡 6: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엡 6: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여기서 두기고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는 존재요, 눈치나 보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는 지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너무나 요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해 염려하고 걱정하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두기고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도 옳지 않은 것이 없고 다 진리의 말씀이지만, 특별히 산에 올라가셔서 팔복을 선포하신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되는 산상보훈은 복음의 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산상 보훈 가운데 기독교의 황금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기서 ‘대접하라’는 말씀은 거역할 수 없는 현재 능동형으로 지금 현재 남을 대접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먼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율법의 핵심인 사랑이요,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고, 내가 잘 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나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위로나 도움은커녕 못본 체 하거나, 오히려 잘됐다고 고소해 하거나,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을 칭찬보다 시기와 비난을 하거나, 모르는 체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본받아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로나 도움을 받으려고 요구하지 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도움을 주려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경험하게 하심은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간에,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들과 성도들 간에 서로 위로를 나누는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축복을 나누는 교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을 막론하고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종교를 갖고 자신이 하는 일이 잘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며 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사람 중이지만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본질은 나만 잘되자는 기복주의 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시고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브라함 한 사람만 잘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보람된 일일 수는 있겠지만 즐거운 일은 아니며 수고와 고통이 따르는 일임을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려고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통해 잘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근본 사상이요 정신이라면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도 동일한 맥락으로 자신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울에게서 편지를 받는 교회와 성도들은 바울에 비해 더 많은 자유와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위해 축복을 빌어야 하는 사람입니까? 온 교회와 성도들이 옥중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해 축복을 빌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바울은 자유와 해방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여러 교회들을 위해 축복을 비는 기도를 드렸으며, 또한 축복의 편지들을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처음과 마지막 인사말이 축복을 비는 말이었습니다.
(엡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엡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물론 그것이 당시 편지 형식일 수 있겠지만 바울 사도 바울은 그 형식을 삶으로 실천하고 접목한 것처럼, 우리도 바울처럼 남을 축복하는 나눔의 삶을 모델로 접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복 주시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여기 우리 중에 예수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생은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배워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사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하기 위해 당신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남을 복되게 하기 위해 내가 십자가를 지고 내가 손해를 보는 삶이 곧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리심을 받았고,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지옥의 저주를 받아야 할 우리가 도리어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골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것은 먼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변화되면 자연스럽게 남을 시기하고 모함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던 사람이, 남을 축복하고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땅위에 사는 모습은 각기 다른 것 같으나 남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남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는 해악의 삶을 사는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은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살다가 죽음이 오면 그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황급히 세상을 떠나 둘 중에 한 곳으로 가게 됨을 양과 염소의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 이유는 양의 삶이 남에게 복을 나누는 삶을 살았기 때문인 반면에 염소는 남에게 무관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의 학력 수준과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가난하고 어려울 때보다 더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고, 배신하고, 비난하고, 모함하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이 서로에게 축복을 나누는 통로가 될지언정,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저주의 통로로 쓰임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는 성도들은 무엇보다 먼저 입술에 잠금장치를 확실히 하여 함부로 남을 비난하고 저주하는 입술이 되지 말고, 도리어 남을 축복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게 사는 것이 바보 같은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이며, 손해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나와 후손이 잘되는 복을 받는 영적인 복지보험인 것입니다.
(시 41:1)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 41: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시 41: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거룩한 교회의 성도들이 마땅히 나누어야 할 차별화된 나눔 실천의 삶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소 피곤할지라도 기도를 나누고, 나보다 더 힘든 자에게 위로를 나누고,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 대신 축복의 말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때가 되면 이 땅에서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두고 떠나야만 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땅의 모든 기업이 싹쓸이를 당하는 불신앙의 삶을 살지 말고 하늘에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을 황태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고 설령 빚을 지고 있을지라도 나눔의 통로인 선교나 구제를 중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는 피곤할지라도 기도를 나누고, 나보다 더 힘든 자에게 위로를 나누고,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 대신 축복의 말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때가 되면 이 땅에서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두고 떠나야만 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땅의 모든 기업이 싹쓸이를 당하는 불신앙의 삶을 살지 말고 하늘에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을 황태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고 설령 빚을 지고 있을지라도 나눔의 통로인 선교나 구제를 중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그 동안 내가 무엇을 나누지 못하는 삶을 살았으며, 앞으로 무엇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대로 실천에 옮기는 거룩한 나눔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나눔은 어쩌다가 마음이 내킬 때 한두 번 할 일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변함없이 계속해야 만 할 값진 일입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고달프고 어려울지라도 그러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에게 기도와 위로와 축복을 나누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엡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여기서 ‘변함없이’라는 말은 썩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썩기 전에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는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한없는 은혜를 주시며, 장차 주님 앞에 가서는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한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서로 기도를 나누고, 위로를 나누고, 축복을 나누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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