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헨리 나우웬 지음/피현희 옮김

미션(cmc) 2010. 6. 19. 10:26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헨리 나우웬 지음/피현희 옮김

두란노/1999년 9월/102쪽/4,500원

▣ 저자 헨리 나우웬

예수회의 사제이며 심리학자이다. 간결한 문장과 적절한 묘사로 영혼을 맑게 울리는 그의 저서들은 세계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의 큰 호응을 받아왔다. 그의 글은 세속 명예를 멀리한 채 기독교적 사명감에 충실했던 삶의 과정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현대 교회에 근본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는 예일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 박약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 디이브레이크에서 사역하다가 1996년 9월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0여 권의 저서가 있는데 그 중 잘 알려진 책으로는 『제네시 일기』 『마음의 길』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영적 발돋움』 『영혼의 양식』 『거울 너머의 세계』 『예수님의 이름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모든 것을 새롭게』 등이 있다.

▣ 옮긴이 피현희

두란노 편집장이며 온누리 교회 문화 사역자로 일하고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섬김은 기도이며 기도는 섬김이다.” 이 책은 사역과 영성은 절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며, 사역자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심오한 진리를 담았으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언어로 표현하는 헨리 나우웬은 가슴 깊은 곳에서 또한 자신의 경험에서 건져 올린 말로 사역자의 삶의 기쁨과 그 도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사역은 영성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음을,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처럼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예수님의 치유하심과 붙드심과 인도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행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사역자를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논의하면서 나는 다음의 세 가지를 강조하려고 했다. 첫째,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기억 위에 세워져 있다. 둘째, 현재의 안락함이라는 거짓된 망상을 벗겨 내고 사람들에게 본래의 비전을 기억나게 할 때 진정한 안내자가 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일을 통해 이런 비전이 우리의 살과 피가 된다."

▣ 차 례

프롤로그

1.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서론/ 상처/ 치유/ 치유자/ 결론

2. 예수님의 붙드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서론/ 지탱해 주는 것/ 지탱해 주기/ 지탱해 주는 사람/ 결론

3.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서론/ 인도/ 인도하심/ 안내자/ 결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헨리 나우웬 지음/피현희 옮김

두란노/1999년 9월/102쪽/4,500원

프롤로그

사역자들의 영적인 자원은 무엇입니까? 많은 과업과 계획과 약속에 파묻혀 있지만 그 속에서 실상 자신의 가슴을 어딘가에 잃어버리고 만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역이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섬김입니다. 곧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고 억압된 자를 풀어 주며 주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영성이란 우리 안에 있는 영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영성은 광야로 나가든지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성은 주님 앞에 열린 가슴과 생각으로 서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역과 영성을, 섬김과 기도를 분리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은 위험합니다.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롭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 사역과 영성의 관계를 찾아서 어떻게 섬김이 기도이며 기도가 섬김인지를 보여 주고자 합니다. 이런 탐구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사역을 ‘기억’으로, 사역자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공동체를 세우는 일 외에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그들이 받은 그래서 이미 알고 있거나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들을 신실하게 ‘기억나게 해주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1944년 헝가리의 시게라는 도시의 유대인들은 모두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었습니다. 현재 유명한 소설가이자 보스턴 대학교 교수인 엘리 비젤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살에서 살아남았으며 이십 년이 지난 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시게 주민들이 그들의 기억 속에서 유대인들을 지워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시게 주민들이 어제의 자신들의 이웃을 쫓아낸 데 대해서 아니면 그들을 부인한 데 대해서 내가 화가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가 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웃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빨리, 그렇게도 완벽하게 유대인들은 그 도시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도 쫓겨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죄악을 망각하는 것이 우리가 죄를 짓는 것 자체보다 더 큰 죄임을 암시합니다. 잊혀진 것은 치유 받을 수도 없고 쉽게 치유 받을 수 없는 것은 더 큰 악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잘라 버림으로써 우리의 미래도 함께 마비됩니다. 즉 우리 뒤에 있는 악을 잊어버리면서 우리 앞에 있는 악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먼저 예수님의 치유를 생각나게 하는 사역자가 우리의 상처 입은 과거를 치유함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가장 빈번히 부딪히는 고통은 바로 기억에 의한 고통이라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 고통들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상처 입은 고통들입니다. 소외감, 외로움, 분리감, 불안과 두려움, 불신감, 신경 쇠약, 불면이나 손톱을 물어뜯는 것 같은 이 모든 증세들은 바로 어떤 기억들이 취하고 있는 양상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들입니다. 이런 기억들은 때로는 우리 존재의 핵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고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잊어버리는 일은 우리의 가장 친밀한 선생이 우리의 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고통스런 기억들과 직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회개하는 가운데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처를 직면하는 자만이 치유가 가능하며 새로운 방식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확증합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 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막 2: 17)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상처 입은 기억들을 치료할 수 있을까요? 사역자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 임무는 과거의 상한 기억들에 접근하고 그런 기억들이 두려움 없이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비가 내릴 때 땅을 갈지 않으면 씨앗에 닿을 수가 없습니다. 잎들을 다 긁어 내지 않으면 나무의 가려진 부분들에는 태양이 자양분을 공급할 수가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기억들도 두려움과 불안과 의혹으로 덮인 채 남아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치유 과정의 한 측면일 뿐이며, 사역자의 위대한 사명은 인간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는 상처가 하나님이 직접 겪는 고통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치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의 작은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겪으시는 엄청난 고통에 대한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아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아주 은밀한 영역에서 우리의 고통스러운 잊혀진 기억들을 끄집어내심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들을 모든 인류의 고통, 자신이 짊어지셔서 새롭게 바꾸신 고통과 연결하십니다. 그러므로 치유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이 더 큰 고통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슬픔이 더 큰 슬픔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경험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 26)고 하신 그리스도의 더 큰 경험의 한 부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은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의 영역을 벗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양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자신의 이야기의 일부를 숨기면서 스스로 경건한 체 하려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과거의 심판관이 되어서 자비를 제한하며 두려움에 떱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고통에서부터 자신들을 단절시킵니다.

도전적인 사역은 아주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즉 병든 사람들이나 슬퍼하는 사람들,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난과 억압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세상이나 종교 기관의 복잡한 망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업의 한 부분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통찰과 경험을 통한 치유는 아주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여 전에는 단지 파괴적으로 보이던 기억들이 지금은 구원의 한 부분으로 되찾아지는 ‘새로운 연합’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치유자로서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런 것처럼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욕구와 생각과 행동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의 방식으로, 기도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님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정사와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서 단절시킵니다. 얼마나 바쁜 활동들과 쉼 없는 염려들이 우리를 단절시키면서 자신의 무질서한 방향과 헌신밖에는 기억시켜 주지 않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잊어버린 낯선 땅에서 곧 이방인이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 방해가 되며,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악순환 가운데로 끌어당깁니다.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과의 친밀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일단 듣고, 보았고, 상고했고, 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 있는 기억 장치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의무가 아니라 자유롭고 자율적인 반응으로 그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반응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또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필요에 맞추기 위해서 훈련과 체계화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생생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2. 예수님의 붙드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벽 너머의 도시』와 『예루살렘의 걸인』에서 엘리 비젤은 한 인간을 지탱해 주는 우정의 힘에 대해 아주 탁월한 방법으로 이야기합니다. 두 책 모두에서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흘러나는 것은 단순히 친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친구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입니다. 『벽 너머의 도시』에서 마이클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곁에 없는 친구 페드로에 대한 기억이 슬픔 가운데서도 그를 지탱해 주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걸인』에서 데이빗은 이스라엘의 6일 전쟁에서 죽은 친구 캐트리엘에 대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다. 비젤은 자신의 소설에서 ‘기억’이 우리를 과거와 연결해 줄뿐만 아니라 현재를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심오한 진리를 표출합니다.

그는 여기서 성경에 깊이 뿌리내린 한 신비를 만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긍휼의 역사를 기억할 때 이스라엘은 그들 스스로 이런 역사 속에 들어갑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로 이끌어 오며 현재 이곳에서 그 사건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은 참여를 의미합니다.

인생의 신비 중 하나는 가끔 우리는 마주 대할 때보다 서로를 기억할 때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서로 보지 않고 있을 때 기억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방법으로 서로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를 기억할 때 우리는 서로의 영혼을 불러내 영적인 연합이라는 새로운 친밀감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의 창조적인 기억과 연결된 만남과 헤어짐의 계속적인 상호 관계성은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순화하고 깊게 하며 지속하는 한 통로입니다.

이런 지탱해 주는 힘에 대한 기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서 가장 신비롭게 보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기억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돌보시고 지탱해 주시는 그런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 7, 13)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변화산에서 그분을 뵈었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의 귀와 눈은 닫혀 있었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분이 떠나간 후에야 그분의 진리의 영이 자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드러냈고 더욱 더 새롭고 친밀한 만남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한 임재가 고난 가운데서 제자들을 돌보고 지탱해 주었으며, 그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소망을 일으켰고, 또한 그분을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의 구원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기억, 즉 현재 여기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고 세워 주면서 일상의 많은 위기 가운데서 우리의 참 존재의식을 뿌리내리게 해주는 기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붙드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사역자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현존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재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주님을 기억하게 하는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떠나는 것이 성령님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주며, 우리의 부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새로운 방법으로 임재하실 수 있음을 깊이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 현존이 없는 부재는 단지 공허함이며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탱해 주는 사역을 할 때 사역자는 창조적으로 물러날 줄 아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제네시 수도원에 계시던 나의 영적인 스승은 일주일에 하루를 수도원에 딸린 한 조그마한 암자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이런 부재가 내게 아주 위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그가 곁에 있는 것을 그리워했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온종일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한 관심이 바로 하나님이며, 그가 사람들의 모든 염려들을 가져가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의논하며, 그가 떠나 있지만 실제로는 어느 때보다도 더 나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기운이 나고 힘을 얻고 강건하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떠난다는 것이 하나님과 특별한 만남을 의미할 때 그 부재는 또한 우리 자신을 붙들어 주는 부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 하나님과의 기도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자신의 사역의 중심으로, 시작과 끝으로 간주하십니다. 기도나 하나님과 홀로 하는 날들이나 침묵하는 시간들을 가지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 있을 때 사람들과도 친밀해질 수 있으며, 우리의 사역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심장부에 닿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철저히 무력함을 기도로 표현하고 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미소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며, 우리가 염려하는 일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기도를 생각해 보면, 어떨 때는 마치 하나님과 작은 세미나를 하는 것처럼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기도문을 읽고, 심오한 생각들을 하고, 인상에 남을 말들을 하면서 아주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점수를 받을지 아주 고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용한 사람이 되어 침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해드리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훈련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좀더 무용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 자신의 유용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새로운 삶으로 부르고 계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역이란 무엇보다도 이런 ‘무용의’ 기도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뻗어 우리를 지탱해 주는 힘인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침묵의 기도에서 비롯됩니다. 참으로 그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3.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엘리 비젤은 자신의 소설 『숲으로 난 문들』에서 그레골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레골은 과거의 끔찍한 시련들을 겪은 후에 새로운 미래를 찾아 파리로 옵니다. 그곳에서 그는 친구의 충고에 따라 주저하지 않고 랍비를 찾아갑니다. 랍비가 그레골에게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고 묻자, “저를 울게 해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랍비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걸로는 충분치가 않아요. 노래할 수 있도록 가르쳐 드릴게요. 다 큰 사람은 울지 않습니다. 거지도 울지 않습니다... 우는 것은 아이들이 하는 짓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아이입니까? 당신의 삶이 아이의 꿈을 이루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니 울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랍비 선생님은 저에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모든 것을요.” 그러자 그레골이 저항하기 시작했고, 랍비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했고 그를 이겼습니다. 천사는 새벽이 가까웠으니 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야곱이 그를 가게 해주었고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천사는 그에게 사닥다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저에게 이 사닥다리를 가져다주세요.” “우리 중에 누가 야곱이죠? 그리고 누가 천사죠?”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아나요?” 랍비는 다정하게 윙크를 했습니다. 그레골이 일어나고 랍비가 문으로 그를 배웅했습니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해 줘요.” 랍비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우리 축제에도 오실래요?” “그러겠습니다.”

그레골에게 자전적인 특성들을 많이 부여한 엘리 비젤은 이 대화에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자신의 희망을 표현합니다. 눈물 뒤에 노래가 있고, 슬픔 뒤에 축제가 있습니다. 투쟁 뒤에는 감사함으로 천사에게 내려오는 사닥다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랍비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대화에게 그레골은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랍비는 대답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와 투쟁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로 향한 사닥다리를 역시 보내 주십니다. 비젤은 우리가 과거를 잊지 않기를 원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믿음 또한 잃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인 사역자들은 치유자와 붙들어 주는 자일 뿐만 아니라 안내자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우리를 지탱시키는 기억은 또한 우리의 미래를 인도하고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줍니다. 살아 있는 기억 장치가 된다는 것은 기억하는 일을 통해 자신들이 맡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는 선지자가 됨을 의미합니다.

좋은 기억은 좋은 인도함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 가운데 친절한 말, 사랑의 표식들, 염려해 주는 몸짓들, 평화로운 침묵, 즐거운 축제 등의 좋은 기억들은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너무 당연하고 단순하고 어떤 많은 결실들도 없었지만 그런 것들이 기억이 되었을 때는 혼란과 두려움과 어두움 가운데서 우리를 구해 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기억들은 의식적인 기억이나 성찰 이전 단계에서 우리를 인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서 피와 살이 되어 우리 존재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 존재 자체가 우리의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문화와 비틀거리는 사회와 어두운 세상 한 가운데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기억하는 데 있습니다. 그 기억들은 우리 미래의 청사진으로서, 우리를 도와 믿음으로 이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가 노예 되었던 땅을 떠나게 합니다. 또한 약속의 땅이 여전히 우리 앞에 있다고 말하는 그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돕습니다.

사역자들은 기억에 대해서 대항하거나 기억에 영감을 불어넣는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이상을 우리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자기 만족에 겨워 질식할 정도로 좁게 끌어내리는 것을 모든 개혁자들이 대항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이상들이 확신에 찬 호소력을 잃고 희미해져 버리는 그런 형태의 삶에 대항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는 이런 거짓된 벽들을 무너뜨리고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대항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도전합니다. 그러나 또한 인도는 대항하는 일 이상을 요구합니다. 위대한 영감이 시작되었던 그 지점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영감을 불어넣는 일을 통해 사역자는 다시금 새로운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위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랍비들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우리들은 이야기꾼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엄청난 능력 가운데 하나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대항하지만 억압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영감을 불어넣지만 술수를 쓰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어떤 공간으로 우리를 초청하여 만나게 하고 대화를 함께 나누게 합니다. 비젤은 “하나님은 이야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만드셨다.”고 씁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사람들의 생애를 상기시켜 줄 수 있는 한, 새로운 이야기가 숨겨진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상담자와 안내자가 나타나게 하는 그런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묵상과 기도에 있습니다.

... 묵상한다는 것은 본문을 읽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의 완전한 의미는 존재 전체로 깨닫는 것입니다. 즉, 입으로 그것을 낼 때 몸으로, 그것을 고정시키는 기억으로, 그 의미를 이해하는 지성으로, 또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의지로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또한 모든 것의 근원이 됩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추진하는 힘입니다. 기도는 또한 모든 것의 인도자입니다. 만일 기도가 옳다면 모든 것이 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어떤 것도 잘못되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성숙을 이루도록 인도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을 것이며 많은 함정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어나는 영적인 요구를 부인하는 것은 이 지극히 민감한 현대 경험의 영역에서 아마추어리즘을 부추기는 형식으로 맞불을 지피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에게 성령의 삶이란 아직 낯선 분야입니다. 따라서 수많은 거룩하지 않은 영들이 장악하여 엄청난 파괴를 일삼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여 사람들의 영과 몸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인간 관계에도 활발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영 분별자들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런 분별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오직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 훈련을 통해 형성되고 다듬어진 사역자의 영적인 삶이야말로 영적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우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계속 교제하고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을 사로잡힌 데서 불러낼 수 있으며 희망을 주는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