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예수님과 직접 만나라/스킵 하이지그 지음/김성녀 옮김

미션(cmc) 2010. 6. 19. 10:29

예수님과 직접 만나라

스킵 하이지그 지음/김성녀 옮김

가이드포스트/2003년 8월/361쪽/11,000원

▣ 저 자 스킵 하이지그

미국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는 교회 중 하나인 앨버쿼크 갈보리 교회의 창립자이며 목사로 재직중이다. 성경을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풀어 주는 재능을 가진 그는 이십 년 넘게 성경 공부를 가르쳐 왔다. 설교와 집필,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How to Study the Bible and Enjoy It(성경을 연구하고 즐기는 법)』과 『Relationships : Connecting the Knots in the Theads of Life(관계 : 인생의 매듭을 연결하기)』 등이 있다.

▣ 역 자 김성녀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와 미국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광고언론학(석사)을 공부했고, IVP에서 수년 간 사역하였다. 역서로는 다수의 성경 공부 교재와 『말씀으로 여는 하루』를 비롯하여, 『미디어 시대, 당신의 자녀는 안전한가?』『전도 길라잡이』『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의 77가지 습관』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소크라테스는 40년을 가르쳤고, 플라톤은 50년, 아리스토텔레스는 40년, 그리고 예수님은 겨우 3년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3년 사역이 끼친 영향력은, 고대 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하다고들 하는 위의 세 사람의 영향력을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어떻게 하면 나도 그분을 만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변화시키시도록 내어드릴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만나라. 이전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언제인가? 우리는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분을 찬양한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예수님을 만났는가? 매우 인격적이시며, 나와 아주 가까이 계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분을 만나라.

▣ 차 례

서언

감사의 글

서론

1부 예수님의 인격

1. 소리로 임한 메신저

2. 종교는 한계가 있다

3. 상한 마음의 치유자

4. 두 죄인 이야기

5. 가장 회심할 것 같지 않은 사람

2부 예수님의 능력

6. 예수님의 만지심의 능력

7.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

8.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

9. 예수님의 죄 사함의 능력

10. 예수님의 긍휼의 능력

3부 예수님의 영광

11. 회복의 영광

12. 변화의 영광

13. 부활의 영광

14. 계시의 영광

에필로그 - 당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라

예수님과 직접 만나라

스킵 하이지그 지음/김성녀 옮김

가이드포스트/2003년 8월/361쪽/11,000원

제1부 예수님의 인격

소리로 임한 메신저(세례 요한, 목적의식이 분명했던 사람)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역청과 메뚜기를 먹으며 단순하고 은둔적인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했고 혹시 메시아가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아니라는 분명한 대답에도 사람들이 계속 묻자 그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선지자적인 말로 대답한다.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그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다가올 심판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요엘, 에스겔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본받은 것이었다. 요한은 사람들의 급소를 찔렀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은 질퍽거리는 요단강 물 속에 들어와 요한에게로 나아와 세례 받을 차례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요한은 거부했다. “저야말로 당신이 주시는 세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제게로 오십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이제 하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요한아,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은 중요하단다. 그 세례를 통해 내가 죄 된 인간들과 동일시되기 때문이지. 네가 죄를 비난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는 죄를 치유할 수가 없단다.”

요한은 깨달았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는 타락한 인간들과 동일시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예수님은 죄 된 사람들 속에서, 인생에서 새로운 일이 벌어지려면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죄 된 세상을 심판하고 모든 것을 올바르게 잡아 줄 메시아를 선포해 왔던 요한은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그런 예수님의 의중을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마침내 요한은 주님의 명령에 순복하여 그분께 세례를 베풀었고, 그 순간 놀라운 표적이 일어났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요한은 너무나 확실한 음성을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음성은 분명 예수님이 흔히 말하는 ‘인자’ 그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선언이었다.

요한이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은 몇 주 후였다. 그 시점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보내면서 사단과 대면하여 승리하신 후였다. 예수님은 요한을 만나기 위해 요단강으로 오셨다. 예수님을 본 요한은 그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우러나온 듯한 선언을 한 마디 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 : 29)."

요한의 인식이 이처럼 엄청나게 변화된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그렇게 중대한 역할을 하실 분의 삶에 대해 꾸준히 연구는 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행동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아주 모호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을 깜짝 놀라게 하셨고 그를 변화시켰으며 그의 사명을 굳건하게 해 주셨다.

당신도 예수님을 만나면 선입견들이 산산조각 날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각한 대로 행동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열린 마음과 종교계의 속물들에 대한 분노, 혹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무관심 등을 알게 되면, 그런 예수님 때문에 당신은 깜짝 놀랄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시는 열망으로 당신의 죄를 사해 주시고, 당신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시려는 열망으로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하실 수도 있다. 요한이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부하지 말고 예수님이 당신을 만들어 가기 원하시는 방식대로 당신의 마음을 열라.

예수님과의 만남은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요한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강물 속에서 계실 때 그분의 긍휼을 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면, 보통 아주 기본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 우리를 변화시키는 훌륭한 진리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그분을 더 깊이 알게 되며 더욱더 사랑하고 섬기고 싶어질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발견해 가고 깨달음이 자라가면 예수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메시지도 달라진다. 요한은 광야로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었다. 그는 목적 없는 심령들에게 영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요한의 외침이었다. 무리들이 요한에게로 나아오자 그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근원되신 분을 가르쳐 주었다. 요한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숨김없이 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 : 30)." 창조 세계를 창조주께 돌려 드리고 죄인들을 구세주께 돌려 드리며 소망 없는 자들을 소망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특징이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삶의 목적이 있다.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에는 당신만이 성취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추구할 것 중의 하나는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러한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것이 문화가 말하는 것과 역행하지 않나 싶을 때조차도 말이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을 만드셨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 계획에 순종하여 광야에서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사명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됨으로써 요한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있다는 성취감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가? 더 이상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살지 않는 분을 도대체 어떻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 생각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우선 당신을 예수님께 소개하라. 물론 그분은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지만 말이다.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싶다고 말씀드려라. 허공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당신의 말을 들으신다는 사실을 믿으라. 다음에는 예수님에 대해 배우라. 성경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을 누리라. 그분의 거룩한 본성을 관찰하다 보면 예수님이 마음 아파하거나 싫어하실 행동을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 것이며,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 가면서 당신은 그분을 더욱 누리게 될 것이다.

종교는 한계가 있다(종교인 니고데모, 예수님을 만나다)

니고데모는 부유하고 유명한 데다가 바리새인으로서 의로운 자가 되기로, 즉 온갖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별하기로 서약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는 평생토록 율법의 모든 상세한 것들을 준수하기로 맹세했고, 그런 규칙들을 완벽하게 지키면 천국행 티켓을 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것으로 충분치가 못했다. 그의 영혼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종교의 우물 옆에서 오랜 동안 그 물을 마셔 왔지만, 니고데모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영혼이 고갈되어 있다는 것을.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런 갈증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 사람의 가장 큰 필요가 무엇인지 바로 그 핵심을 찔렀다. 니고데모가 육체적 탄생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듯이, 하나님 나라는 또 다른 탄생, 즉 영적인 탄생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예수님은 강력히 주장하신다.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생명만 재생산할 뿐, 영적인 생명은 생산할 수 없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그 무엇도 니고데모가 그토록 필요로 하는 그런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다. 그의 많은 동시대인들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생명 없는 종교 의식을 통해 생명을 가져오려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하셨다.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만한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구약 선생인 니고데모는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을 기억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 : 25~26)."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신선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니고데모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정결함이 필요했다.

니고데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음을 좀 더 밀어부쳤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 : 8)." 바람은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바람의 효과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이때 예수님은 부드럽게 도전을 주신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아니더냐? 이것은 너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신 것이다. 이 유식한 바리새인의 진정한 문제는 지성이 아니라 불신이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 : 12)." 이제 니고데모의 마음 상태는 완전히 발가벗긴 채 드러났다.

“하늘에게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 : 13)."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천국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시점에서 니고데모는 하늘나라에서 직접 내려온 사람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지성과 지성을 맞대고, 마음과 마음을 맞대고 만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영생의 길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는 권세도 가지고 있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 : 14~15)."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분의 구속 사역에 대한 가장 분명한 통찰 중 하나를 얻게 되었다.

그날 밤 이후 니고데모의 삶은 어땠는가?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니고데모가 강력한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으로 밀어넣는 것에 대해 기꺼이 동료들과 맞섰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시신을 돌봤다.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이 호기심 많은 질문가는 용감한 지지자로 성숙했다. 새 생명의 신호가 니고데모 안에서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상당히 의미 깊은 영적 성장이다. 바람은 불고 있었고, 그 효과는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니고데모를 만나 주신 예수님은 오늘 당신과도 만나고 싶어하신다. 당신은 이 초청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니고데모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성상 매우 호기심 많고 태어날 때부터 인생에 대해 질문하는 존재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여정은 시작된다. 무엇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지, 이 세상은 왜 창조되었는지, 왜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수많은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호기심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당신도 당신의 영적 호기심에 답변해 줄 근원 되신 분께 직접 가 보았는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신학적, 철학적 견해를 따라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영혼의 갈망은 피상적인 만남으로는 만족될 수가 없다. 지성과 지성을 맞대고, 마음과 마음을 맞대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헌신하라. 니고데모와의 만남에 있어서 예수님께 뭔가 목표가 있었던 것처럼, 그분은 당신의 삶에 대해서도 선한 계획과 목적들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과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신다. 당신을 그분의 나라로 데려가시고 당신이 변화되도록 돕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길을 억지로 강요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 예수님은 누구나 받아들이시지만, 먼저 당신이 예수님을 믿을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기까지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믿고 나아오라. 그리고 그분 나라의 일원이 될 준비를 하라.

상한 마음의 치유자(예수님과 상처 입은 자들)

우리의 문화 속에서는 행복을 찾는 것이 일종의 강박증이 되어 가고 있다.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권은 너무도 성스러운 것이어서 헌법에까지 명시되어 있지만, 행복은 결코 끝이 없는 추구이다. 행복을 잘못된 곳에서 찾으려고 할 때는 특히 그렇다. 사마리아의 옛 도시인 수가성의 우물가에도 온갖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던 한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인생이 평탄치 못했다. 그녀의 과거는 실패한 관계의 파편들로 얼룩져 있었다. 한 번씩 이혼할 때마다 그녀의 꿈은 조금씩 더 깨졌을 것이고 쓰라림도 점점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매번 쓰라림을 경험할 때마다 불신감도 커졌으리라.

이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우물에 왔을 때 한 유대 남자가 우물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상태가 어떠했을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은 여행을 할 때 사마리아 땅은 밟지도 않을 정도로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몰랐던 것이 있었다. 바로 오늘 우물에 물 길러 온 발걸음은 거룩한 선약이었다는 사실. 거기 있는 남자는 바로 그 시간에, 바로 그 장소에 오기 위해서 일부러 먼 길을 돌아온 것이었다. 예수님은 정중한 요청으로 이 상호작용의 주도권을 잡으셨다. “물을 좀 달라(요 4 : 7)." 이 말은 그저 서로의 무장을 풀고 대화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다가간 예수님을 맞이한 것은 회의주의였다.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예수님은 좀더 깊이 파고들어 소망이라는 신경을 건드리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 : 10)."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 13~14)." 그러나 이 말씀에 반응하는 이 여인의 목소리에는 영적인 갈증과 현실적인 비관주의가 뒤섞여 있는 듯하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그녀의 말이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과거 경험들이 영적인 감수성을 둔하게 만들었다. 이제 좀 더 개인적으로 접근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명사수처럼 예수님은 그녀 개인의 삶을 겨냥한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단 한 마디 말로 그녀의 전 인생이 이 이방인 앞에 발가벗겨졌다. 그분은 죄악과 상처의 해골들이 쌓여 있는, 그녀가 꼭꼭 잠궈 버린 벽장문을 열어 버렸다. 왜 예수님은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 깊은 상처를 덮고 있는 딱지를 왜 떼어내는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그녀가 받아 마시고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갈증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녀의 태도가 변했다. 그녀는 존경을 표하면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예수님을 좀 더 시험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것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질문은 어느 성전이 진짜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은 잠정적으로 분열을 유발할 수 있었고, 따라서 대화를 끝장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진리를 균형 있게 종합하면서, 지역성은 부적절하며 성전 자체도 불필요해질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 : 21~24)."

이제 이 여인은 예수님과 영적인 진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자세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깊은 소망을 피력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그녀의 이 말은 하나님의 개입을 꿈꾸는 믿음의 선언이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자신을 그녀에게 한 켜씩 벗겨 보여 주셨고, 결국 그분이 누구신지 깨닫게 해 주셨다.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이 여인의 반응은 아주 극적이다.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마침내 깨닫게 되자,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해 주려고 동네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것은 그곳 전 지역에서 일어날 뭔가 놀라운 일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변화는 더 큰 변화들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천 년 전 중동 땅의 한 우물가에서 어떤 천한 여인에게 일어났던 이 이야기가 당신과 나에게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모두 ‘사연 보따리’가 있다. 그 보따리 속에는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 낸 경험들과 꿈, 계획과 성공, 그리고 실패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것들이 당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하려면, 과거를 솔직하게 직면하고 그 과거를 당신에게 유익하게 활용하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일상 생활의 맥락 속에서 다가오신 것처럼 현재 당신이 처한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실 것이며, 또한 당신이 처해 있는 지금의 그 장소에서 당신을 사용하실 것이다.

영국의 전도자인 집시 스미스는 어떻게 부흥을 일으키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집으로 가서 당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당신 주변에 둥그런 원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원 안에서부터 부흥이 시작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순간부터 부흥은 시작될 것입니다.”

제2부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만지심의 능력(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던 문둥병자)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들은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능력을 직접 만난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손마른 자의 근육을 회복시켜 주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경이로움에 사로잡혔고, 소경의 시력을 회복시키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고침 받은 육신과 메시아적인 증거 그 이상을 보았다. 그들은 인간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의 활동 무대로 발을 들여놓으시고 그들의 일상적인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신 창조주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어루만짐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무력한 문둥병자였다.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는 기록하기를, 그 당시 문둥병자들은 죽은 사람처럼 혹은 추방당한 범죄자들처럼 사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 떼 지어 몰려든 사람들 무리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놓여졌다. 만지면 안 되는 이 문둥병자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접근하실 것인가? 예수님은 그 사람 때문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자기 앞에 엎드려 있는 이 찌그러진 남자에게 온전히 관심을 쏟으셨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마 8 : 2)." 이 말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에 대한 순전한 확신을 표현한 말이었다. 그에게 문제는 예수님의 능력 여부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은 치유해 주셨지만, 자기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이 문둥병자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당연시할 수 없었다. 오로지 예수님의 권위 있는 의지에 자신을 내맡겼다.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셨다." 그리고 나서 모든 사람이 놀라서 숨이 막힐 만한 행동을 하셨다. 손을 내밀어서 그 사람을 만지신 것이었다. “내가 원하노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고 싶은 열망을 보여 준다. 치유의 능력은 예수님의 의지와 그분의 말씀 속에 있었다.

모세의 율법은 문둥병자를 만지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치유는 즉각적이었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만지신 시점에 그는 이미 문둥병자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율법을 범한 것은 없었다. 예수님의 만지심은 치유의 어루만짐인 동시에 또한 회복의 어루만짐이었다. 이 뒤틀린 사람이 변화되는 순간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 무리들의 눈앞에 펼쳐졌겠는가! 예수님의 만지심은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보살핌의 어루만짐이었다. 예수님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으셨다. 이 즉각적인 반응. 그것은 바로 인간을 보살피시는 그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얼마나 눈에 선한 정경인가!

이 순간의 경이로움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무게 있는 명령 때문에 약간 무색해진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 8 : 4)." 이 사람은 성경의 규정을 따라야 했다. 그는 먼저 성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이 사건이 진실로 기적적인 치유임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 절차를 지킴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 속에도 기꺼이 들어가시길 원하신다. 당신의 고통을 어루만지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이 병든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자신은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임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타락 이후로 고통은 인간의 삶에 일부가 되어 버렸다. 누구나 고난을 겪는다. 심지어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들도 예외는 아니다. 고통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와 그 고통을 직접 다루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도망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 사람의 눈동자를 직시하면서 그의 필요에 맞게 사역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삶 속에서도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으며, 잔인한 고문 도구인 로마의 십자가형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다.

『두려울 만큼 경이롭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책에서 의사이자 작가인 폴 브랜드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체적 접촉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재고하고 있다. “나는 가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계셨던 동안에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되새겨 본다. 그분은 손을 내밀어 눈 먼 자의 눈을 만져 주시고, 문둥병자의 피부를 만져 주셨으며, 절름발이의 다리를 만져 주셨다. 그분이 만지시면 능력이 전달되었다. 예수님의 능력 정도면 마술 지팡이로 한 번만 휘둘러도 됐을 텐데. 사실 지팡이를 휘두르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또한 예수님은 무리들을 비슷한 집단별로 나누어서 조직적으로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분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분의 사랑과 따스함과, 그리고 그들과 완전히 한 마음이 되어 주심을 느끼길 바라셨다. 예수님은 일단의 무리를 상대로 쉽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대체로 사랑은 어루만짐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인간에게 한 걸음 가까이 오셔서 얼굴을 맞대고 만나 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예수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기 원해야 하며, 그분의 능력과 사랑을 얼굴을 맞대고 접해 보기를 원해야 한다. 육체적인 고통은 사람을 자기에게만 몰두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접근한 방식을 보면, 그것은 자기의 고통을 경감시켜 달라는 요청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며 예배의 행동을 취했다. 그는 축복이 오기도 전에 예배를 드렸다. 예배란 하나님이 해 주신 것에 대해서보다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이다. 하나님은 그 본성 자체로 예배받으실 분이시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능력을 행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 사후에 사도들이 어린 시절부터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한 앉은뱅이와 맞닥뜨렸던 것으로 보아 모든 사람이 다 치유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사람을 고쳐 주시지 않고 남겨두셨는가? 여기서 요점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의 의지에 맡겨 드렸다.

회복의 하나님께서는 이 소외된 한 사람을 어루만지사 그를 열정적인 전도자로 만드셨다. 당신도 스스로를 소외된 자로 여기고 있을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을 당신의 그 고통스러운 장소로 들어오시게 하라. 그분이 당신을 개인적으로 보살피신다는 사실에 안심하라. 그분이 당신을 인격적으로 보살피시도록 내어드려라. 가장 좋은 출발점은 지금 당장 잠시 멈추어서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고통 중에도 당신에게 가장 힘을 주는 장소는, 바로 당신이 하나님 앞에 절하며 그분을 예배하는 곳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죽어 가는 아들을 살리려고 몸부림치는 아버지)

이 사람에 대해 우리는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사람이 상당히 고위층이었다고 믿고 있다. 아마도 당시 헤롯 안티파스의 궁정 조신이나 왕의 사무관이었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에 들어가 보면, 그보다는 아주 처절한 아버지로 등장하고 있다. 헤롯이 디베랴를 왕족이 사는 마을로 전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원래 디베랴에서 사는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죽음이 임박한 그의 아들을 싣고 디베랴에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왔던 것이다. 예수님은 초기에 가버나움을 기지로 삼고 활동하셨으므로 그곳에 가면 예수님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신하가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안 계셨다. 남서쪽에 있는 가나로 가셨던 것이다. 이때쯤 이 사람의 아들은 더 이상 여행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가버나움에 놔둔 채, 이 정부 고관은 처절한 마음으로 가나를 향해 출발했을 것이다. 도보로 40km 거리를 말이다. 그는 예수님만 찾아다녔다. 예수님이 계신 곳 외에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한 상황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그의 아들은 소망이 거의 없었고, 그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아들의 병을 고치는 것에만 온통 마음이 쏠려 있었다. 이 시점까지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저 얄팍하고 세속적인 수준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발견하자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상당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 간곡한 부탁에는 절망이 스며 있다. 아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상황은 쓰라린 경험이었으리라. 믿음의 근육을 견고히 세우는 3단계 훈련이 시작되는 시점도 바로 이 시점이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그는 가장 초보적인 1단계 믿음, 즉 능력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감지하셨다. 그래서 첫 마디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였다. 사람들은 믿기 전에 먼저 거창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2단계로 약속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셨다. 이 신하의 유약하고 초보적인 믿음을 취해서 좀 더 강인한 믿음으로 이끄신 것이다. 이 사람은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더 강하게 요구했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더 높은 분의 능력에 대한 처절한 믿음을 가진 이 사람은 이제 생명을 구할 능력이 있는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신하가 좀 더 깊은 영적 현실을 깨닫게 되길 바라셨다. 이 얼마나 절묘한 그림인가. 죽어 가는 아들의 아버지가, 죽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아들 앞에 선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간청에 또 한 번 급작스러운 말로 대꾸하셨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명령이자 약속이다. 예수님의 이 명령 속에는 대담한 도전이 들어 있다. 예수님은 왜 이 사람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믿음을 더 강하게 하기 원하셨고, 그래서 그의 영적인 삶에 영원한 유익이 되는 방법을 택하신 것이었다. “가라!”는 이 명령에 그는 순종할 것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만을 일삼던 그가 과연 이 명령을 받들어 행동할 것인가? 그러나 마침내 이 사람은 그 도전에 응수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이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 발걸음은 되돌렸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알았다. 아들이 회복되고 있음을. 그의 믿음의 근육이 탄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가버나움에 있는 아들의 병상에 좀 더 가까워진 지금, 곧 또 한 번 믿음의 향상을 이룰 참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믿음으로의 도약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대여섯 시간 가량 걸렸을 것이다. 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 아버지의 마음속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종들이 그에게 달려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그의 가슴은 분명 쿵쿵 뛰었을 것이다. 그는 즉시 상황을 연결시켰다.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해 본 뒤,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 시나리오 안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게 되자, 그의 믿음의 여정은 드디어 완성되었다. 그의 개인적인 믿음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치까지 상승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정인가! 그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완전한 굴복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 땅의 왕을 섬기던 신하는 이제 왕 중의 왕이신 분을 믿고 섬기게 된 것이었다.

예수님은 당신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만나 주실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이 당신의 믿음을 성장시키도록 자신을 내어드리기로 선택한다면, 몇 가지 작업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첫 번째 조언은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를 일깨워 주며 우리 개인의 믿음에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 조언은 구체적인 약속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고, 세 번째 조언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적인 근육들을 사용하시게 하라는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유행이다. 신성에서 인격성을 다 빼버린 채, 모호하고 이름도 없는 존재인 초자연적인 것들을 예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신 개념’이다. 보다 상위의 능력을 기꺼이 인정하는 이 사람들은 불행히도 그 능력의 근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그 힘 자체를 경험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의 동기는 전적으로 실용주의적이고 자기 위주이다. 그들의 접근법은 단순하다. ‘내게 문제가 있으니, 이 문제를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주시오!’라는 태도다. 그러나 이것은 초보적인 믿음이며 불가지론자의 믿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인 성경의 구체적인 명령을 신뢰할 때, 우리 믿음의 근육은 강해진다.

당신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는 동안 내면에서 자라 가는 믿음은 당신의 영적인 용량을 키워 줄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보고 들음으로써,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북돋우는 데 꼭 필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당신의 영향력은 그 신하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집안 사람들에게만 한정될 수도 있다. 당신은 사도 바울처럼 온 세상에, 혹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온 동네에 손을 뻗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삶의 시련과 압박들에 직면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들에 굳건히 기대는 것을 배우게 되면 당신의 믿음은 활짝 꽃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 아름다움을 보고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3부 예수님의 영광

회복의 영광(어둠의 나라에서 온 사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나는 장난삼아 신비술에 잠깐 손을 댄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친구가 하는 타롯 카드, 강령회, 귀로 읽기 등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실험으로 연결되었다. 자가 최면술과 유체이탈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은 뒤, 나는 이 분야에 대해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내 영혼이 우주를 여행하면서 보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해 두었다. 심지어는 유체이탈을 통해 내 친구 집을 들여다보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내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무엇인가를 건드렸는데, 그것은 중독과도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신다면, 내가 왜 쓸데없이 이런 것들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영적 울타리의 어두운 쪽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옳지 못한 쪽에도 이렇게 엄청난 능력이 있다면, 반대편 옳은 쪽에는 삶에 필요한 훨씬 더 큰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에 관해 진정으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진리를 찾고 싶었다. 비록 영적 지하 세계에 잠깐 손을 댔지만, 나의 호기심은 과거의 경험에서 돌이켜 미래의 삶 쪽으로 나아갔다. 영원한 것들은 질서정연할 거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싶었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나의 결심에는 어떤 형태의 신비술도 거부하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었다. 내 삶을 장악하고 있던 사단의 영향력을 끊어 버릴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어느 날 아침,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의 반대편으로 길을 떠나셨다. 거기서 영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쪽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은 귀신이 들려 있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귀신들로부터 고통받고 있었다. 그 더러운 존재들은 한때 그가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 한때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를 내몰았다. 그는 너무도 위험한 존재가 되어 마치 짐승처럼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놓아야 할 지경이었다. 이 고통 받는 영혼은 그런 비참한 상태에서 악을 쓰며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복음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 안에 살고 있던 귀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 이름은 ‘군대’로, 흉악한 귀신들 한 떼가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 악마적인 존재들은 이 사람 안에 살면서, 행동을 포함한 그의 전 존재를 통제하고 있었다. 격렬한 발작은 그로서는 통제 불능이었다. 마가복음은 그가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광기에서 나오는 자학적인 행동으로 인해, 이 귀신 들린 사람은 때때로 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처럼 자기 파괴적이었으며 혐오스럽고 소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뿐만 아니라, 이 사람과 전혀 상관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의 가족들과 그 동네 사람들까지도 어루만지기를 원하셨다.

예수님과 이 사람과의 만남은 정면충돌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만남에서 두 왕국이 부딪쳤다. 바로 어두움의 왕국과 빛의 왕국이었다. 예수님이 이 상황에 나타나시자, 그 남자는 예수님께 다가갔다. 상당히 긴장되고 감정이 고조되는 만남이었다. 또한 지극히 역설적인 만남이기도 했다.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심상치 않은 행동을 했다. 그는 예수님께로 달려가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고서 이렇게 외쳤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마가의 기록을 보면 이 사람이 “달려와 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신보다 더 큰 힘에 이끌린 듯이, 그는 땅에 엎드려 예수님을 경배했다. 이 사람 속에 있던 귀신들은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고백했다. 이 사단의 존재들조차도 자기들이 하나님 아들의 권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예수님의 목적은 이 사악한 테러의 희생자를 자유케 해 주는 것이었다. 이제 그가 자유케 되는 순간이 왔다. 절대적인 권위와 단호함으로 예수님은 능력 있는 말씀을 선포하셨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이것은 영광스러운 주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늘 그러하듯이, 예수님은 주어진 상황의 주인이셨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 때문에 그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을 떠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귀신들은 긴급대책을 들고 나온다. 그들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대신 근처에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한다. 이 악령들은 확실히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정죄되어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될 때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해진 때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악령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복종했다. 사악한 영들은 그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천사장 미키엘과 같이 순종적인 천사들에 비견될 만큼 능력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머뭇거림도 투쟁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마자, 돼지 떼는 비탈길을 내리달아 호수 속에 빠져 자멸하고 말았다.

이 시골 마을에는 금방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동네 사람들은 그 남자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직접 눈으로 보려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 사람이 완전히 변화된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귀신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엄청나게 감사했던 반면, 무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두려움만이 가득하여 예수님더러 그 지역을 떠나 달라고 사정했다. 그들은 뭔가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리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들의 수입원인 소중한 돼지 떼에 더 관심이 있었다.

현대 사회는 인격적 악에 대한 개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악한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사단이 사악한 인격적 존재라는 생각은 거부한다. 하지만 우리의 세상을 잠깐 둘러보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 마귀의 사업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는 수천 년 전부터 하나님의 전체 계획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우리 인간은 창조주의 영광을 반영한다.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더 많이 반영하면 반영할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점점 더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사단도 자기 나름의 목적이 있다. 사단의 계략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창조물인 인간을 파괴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어둠의 왕국과 빛의 왕국 간의 충돌은 극적이다. 사단은 파괴적이나 예수님은 건설적이시기 때문이다. 사단은 무너뜨리지만 예수님은 세우신다. 사단은 생명을 앗아가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주신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이 사람의 상태도 극적인 변화를 이룬다. 예수님의 목적은 사단이 훔쳐간 것을 되찾아 오고, 원수가 무너뜨린 것을 고치는 분이시다.

지금 당신은 깊은 절망감 속에 빠져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죄가 당신의 삶 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서,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사로잡힌 어떤 습관이나 사단의 압제가 너무도 커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할지 모르겠다. 아니, 이미 다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사단이 당신에게 거짓말을 믿게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사단의 능력은 제한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은 오로지 하나님이 허용하신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전능하시다. 그분은 전적인 권위를 지니시며 영원하다. 사단은 심판과 파멸에 이를 유한한 시공간 속에 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반면 사단은 피조물일 뿐이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많은 경우에 그러하듯이, 그날 거라사에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광 주변에 모여들어 그것을 흠뻑 누렸다. 특히 귀신이 떠나간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할 일을 주어 돌려보내셨다. 예수님은 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날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맡기셨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감사로 가득했던 그 사람은 즉시 자기 집뿐만 아니라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했다.

계시의 영광(미리 가 본 영광)

솔로몬의 말이 옳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우리는 하늘나라 -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러 가신다고 약속하신 곳 - 에서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날이 오기 전까지는 결코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하늘나라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영원에 대해 그저 잠시 곁눈질해 볼 뿐이다. 그런 슬쩍 훔쳐보기 중의 하나가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다. 성경은 ‘실낙원’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제는 ‘안락원’ 이야기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이 마지막 만남을 씀으로써, 오고 오는 세대에 하늘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사도 요한이었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도 최측근 그룹에 속해 있었으며 스스로를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지칭했다. 제자들이 모두 함께 한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고 앉아 있던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다. 이제 예수님의 이 특별한 친구가 영원의 비전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비전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여러 시련을 겪을 수많은 신자들에게 위로를 가져다줄 비전이었다. 요한은 이 광대한 비전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부른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하늘나라의 커튼을 걷으셔서 요한으로 하여금 영광된 예수님의 모습, 즉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시는 모습을 보게 해 주신 것과도 같다.

요한이 이때 들은 나팔 소리와도 같은 음성은 바로 그가 한때 갈릴리와 유대 주변에서 따르던 주인님의 익숙하고도 근엄한 음성이었다. 요한과 다른 제자들을 자신과의 만남으로 부르셨던 그분이 위에서 다시 그를 초청하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영적인 경험들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언젠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 불러 올려 그분과 더 발전되고 더 충만한 만남을 가지게 하실 것이다. 하늘나라를 이 땅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분명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비전은 우리의 현재 삶에 시작을 제공해 주고 우리가 미래에 경험하게 될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열정을 자극한다.

몇몇 성경학자들은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의 나이를 95세쯤으로 추정한다. 그에게 밧모섬은 여러 면에서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였다. 요한에게 있어 세상의 문에 닫혀지고 있을 즈음 하늘에서는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 세상이 요한에게 더 이상 말해 줄 것이 없었을 때, 다음 세상은 그에게 위를 향해 나아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요한은 한때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인격과 능력과 영광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야말로 단연 최고의 만남이었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끊어진 고통스런 고립 속에서 요한은 다음 차원의 삶과 접촉하게 된 것이다.

고난 받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나는 이런 역설을 여러 번 보았다. 가장 격려를 잘하고 쾌활하고 낙천적인 신자들 중에서 몇몇 사람들은 극한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병실이나 요양원에 갇혀 있는 사람들, 심지어는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종종 그런 장소에서 그들을 지탱해 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에 대해 말하곤 한다. 치명적인 암 진단을 받고 몇 주밖에 못 산다는 사형선고를 받은 여인이 누워 있는 병실에 찾아갔을 때의 경험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충격이나 회한에 사로잡혀 있기는커녕, 그녀는 우리가 이 비극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도록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가 앓고 있는 이 마지막 기간 동안에 예수님이 훨씬 실제적으로 느껴지고 있다고 말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이제 그녀가 가게 될 하늘나라 문턱 너머에 있는 것들을 살짝 엿볼 수 있게 하신 것 같았다.

하늘나라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만남일 것이다. 이제 요한은 하늘나라에 있지만, 우리를 위해서 기록을 남겨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고대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려고 말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인격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은 하늘나라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묘사했다. 하늘나라는 찬란한 곳이지만, 어린양은 고통스런 죽음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분은 상처들을 지닌 채로 승천하셨다. 그 상처들은 우리의 죄가 고난과 희생을 통해 지워졌다는 증거가 될 것이며 영원한 침묵으로 증거할 것이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도착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사역 덕택이라는 사실을.

또한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볼 것이다. 사랑 어린 공의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세계를 강력하게 판결하실 것이요 어린양 예수께서 그 심판을 시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요한이 묘사한 마지막 그림은 이 영원한 제국의 한 모습으로,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빛이 환하게 비추이는 곳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도마보다 훨씬 더 큰 경이로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만남이며 예수님의 영광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들을 볼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들 외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당신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다 보게 될 것이다. 얼마나 멋진 재결합이 되겠는가!

우리는 그곳에서 이 모든 이들과 함께 예배에 참예할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믿기 어려울 만큼 충만하고 완전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과 땅의 통치자를 예배할 것이다. 만만이요 천천이나 되는 구속받은 사람들이 연합하여 합창을 부르며 경축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예배의 어느 순간에 내 자신이 하늘로 들려 올려져서 곧바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물론 그 경험은 곧 끝나고 나는 평상시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그런 경험이 다가올 때면 감사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내 스스로 그런 예배 경험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단지 이것은 일종의 영적인 전채 요리로서 하나님께서 미래의, 그러니까 그런 예배가 끊임없이 온전하게 계속될 그 날을 마음껏 누리도록 준비시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즐겁게 섬길 것이다. 가장 순수하고 지고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과 연합해서 다스릴 것이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다스림으로써 예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것이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장차 어느 날 예수님은 당신을 그분께로 이끄실 것이다. 아마도 당신이 죽는 순간 혹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순간에 그렇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분을 만날 것이며 그분과 함께 갈 것이다. 당신은 영원히 변화된 몸으로 당신의 창조주이자 구세주이신 분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끝없이 나눌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당신이 온다는 것을 알고 계시며, 그 궁극적이고 영원한 만남에 당신이 준비되어 있기를 바라신다. 당신은 준비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