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요 15:7-12)

미션(cmc) 2010. 9. 25. 09:46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요 15:7-12)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저는 지난 육 개월 안식년 겸 요양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에 가장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새삼스레 깨닫게 하신 삶의 주제는 ‘사랑’이었습니다.
물론 목사로서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이론처럼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면 두 가지를 피할 수 없는데 하나는 두려워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지난 날 잘못 살아온 것을 깊이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후회한들 너무 때가 늦어서 그것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말기 암환자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가 죽음을 앞둔 1000명의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공통점 스물다섯 가지를 에세이집을 출간했는데 단 두 주 만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스물다섯 가지 리스트는 일반적으로 돈이 많이 들고 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요, 작고 소소한 것이기 때문에 평소 무시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막상 죽음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꺼리가 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것들일까요? 제일 첫 번 째로 손꼽은 후회는 “사랑하는 남편이나 부인이나 연인, 아이들, 절친한 벗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지 못한 것을 가장 많이 후회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친절을 베풀었더라면,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건강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더라면 등등의 후회들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보니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내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대부분의 여성들은 단골 화장품 가게나 외판원에게 신제품을 선전하기 위해 작은 비닐봉지나 병에 담긴 홍보용 화장품 샘플을 받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몇 번 사용해 본 결과 질과 색과 향이 좋다고 생각되기만 하면 현찰이 없으면 카드로, 일시불이 안 되면 할부로 라도 구입을 해야 직성이 풀렸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사은품으로 샘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샘플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신실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신가를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 역사요,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성경이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사은품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세상에서 얼마나 좋은 종교인가를 깨닫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은품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깨닫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샘플이십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세상’이라는 말 코스모스는 하나님께 매우 적대적이고, 악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반드시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같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그 가운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 사랑은 내게 얼마나 유익이 되는가를 따지는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비록 나를 실망시키고, 마음 아프게 할지라도 끝까지 변함이 없이 사랑하는 매우 적극적이고 열렬한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같은 사랑을 제자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심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1) 제자 선택을 통해서 보여 주신 사랑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비천한 갈릴리의 어부들과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세리를 제자로 선택하신 것은 자격 조건을 따지지 않는 적극적인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 같은 주님의 사랑은 열두 제자들만이 아니라 목사요, 장로요, 집사요, 성도가 된 오늘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어떤 사람을 구원하고 어떤 사람을 제자로 삼고, 어떤 사람을 주의 일꾼으로 택하였을까요? 물론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보다 잘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중드는 종이 되게 하신 것은 역시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2) 제자 훈련을 통해보여 주신 사랑
예수님은 삼년 동안 심혈을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지만 별다른 변화를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삼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서 긍정적인 변화는커녕 도리어 실망스러운 부분만 들어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내가 그토록 신뢰하고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좋을 때는 따르고 불리할 때는 외면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마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처지였다면 제자들에 대한 기대를 버렸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포기하고 중도에 하차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끝까지 버리지 않으신 것은 제자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적극적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오늘 나에게도 동일한 사랑으로 나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인내하시는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죽지 않고, 망하지 않고, 다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잘못으로 인해, 나의 실수로 인해, 나의 허물과 죄로 인해 당연히 받아야 할 고통이지만 예수님은 그 고통 중에서도 나를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켜 주심을 통해서 변함이 없는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3) 변함없는 신뢰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 소중한 것은 천국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중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제자들을 택하셨고 그들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었을 때 마치 설익은 밥처럼, 제자들이 주님의 사역을 위임 받기에는 너무나 미성숙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경우 관계보다는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인적쇄신이라는 미명하에 사람을 교체하기에 급급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법을 보완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 결과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복수심에 배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주님의 거듭된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다가 결국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당신의 사역을 과감히 위임하고, 양도하시는 모습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 점이 바로 주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얄팍한 사랑이지만,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변함이 없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이 어찌 베드로만 그렇게 사랑하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나의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면 그 베드로가 바로 나였고, 아직도 내가 건재하고 아직도 내가 주를 믿고 아직도 내가 주님의 일군이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그 같은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터지고, 그 사랑을 맛보았을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2.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밝은 빛 앞에 서게 되면 잘 눈에 띄지 않던 작은 상처나 점 하나까지 다 들어나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메마른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나를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사랑하시는 까닭은 첫째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나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로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사랑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여기서 ‘나으니이다’ 라는 말 (perissovteron) 은 ‘더 많고 더 풍부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도 주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도 주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통로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조건반사가 아니라, 내가 오해와 시기와 억울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금전이나 명예에 손해를 입게 되는 경우에도 그것을 참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인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물론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신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게 되면 우리가 바라는 건강도, 물질도, 명예도 얻을 수 없고, 설령 얻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다 잃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얽어 매기 위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사랑의 통로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 걸고 지켜야 할 계명은 모세의 십계명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인 사랑의 계명입니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 사랑은 상대방의 자존감을 높여주어야 합니다.
자존감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남을 고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하며 부단히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려는 마음 자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자학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 때문에 무엇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성공하기가 쉽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최고의 존재였으나, 아담의 범죄 이후 만물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면서 자존감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만물의 찌기 같은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귀의 자녀가 되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죄만 짓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한 평생 삶은 곤고해지고 인간에게 죽음은 지옥이라는 공포를 가져다 주었고, 사나 죽으나 인간에게는 희망이나 기쁨이 없고, 자기 비하와 자기 학대와 열등감과 죄의식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본래 우리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시고 그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 사함을 받게 되고,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 신분을 승화시켜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그러한 축복을 받은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통로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이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남을 비하하고, 비난하고, 무시하지 말고, 이해하고, 칭찬하고, 높여주는 말과 행동으로 자존감을 높여 주고, 희망을 주고, 용기를 갖게 하는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2) 약점과 허물은 침묵을 하고 장점은 칭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두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볼 때 분명히 장점과 단점을 아울러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단점부터 말합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듣는 다른 사람은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장점을 말합니다.그런 사람의 말은 듣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사랑의 통로가 됩니다.
삭개오는 동족들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 정부에 상납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동족들에게 과하게 세금을 거두어서 전부다 다 상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일부는 자기의 것으로 빼돌리는 수법으로 부자가 된 것을 동족들이 다 알기 때문에 삭개오를 가리켜 이구동성으로 죄인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7”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저분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대접을 받다니' 하며 모두 수군거렸다.
여기서 ‘수군거린다’는 말은 ‘불평하다, 불만을 표현하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불평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감으로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게 될 것도 다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잘못된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말씀을 단 한마디고 하시지 않고 침묵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악에 대한 비호나 불의에 대한 타협이 아니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 예수님의 강요가 아니라 삭개오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기다리신 것이며, 돈 앞에서 동족을 배신하고 양심을 팔던 과거의 모습을 청산하고 자신의 소유를 팔아 선을 실천하겠다고 결단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윽고 삭개오가 예수님이 기대하셨던 대로 입을 열어 지난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남은 날을 예수님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사람들의 비난에도 시종 침묵만 하시던 예수님은 비로소 입을 열어 즉석에서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찬하시고 사죄와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비난과 정죄는 사람을 죽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3) 예수님에게 연합되어 지속적으로 사랑을 공급받아야합니다.
물론 사랑에 대한 설교를 오늘 들었다고 해서 당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당을 나서면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아는 마귀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옛날 성질과 습관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내 힘으로는 그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미움을 버리고 사랑의 삶을 살며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 영양분을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요 1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여기서 ‘붙어 있다’는 말은 ‘떠나다’는 말의 반대로 ‘머물러 있다’는 말로 주안에서 계속해서 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더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랑나무가 될 것입니다.
또한 ‘주안에서 거한다. 주안에서 산다’는 말이 추상적이긴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을 하면 어디서나 어느 때나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마다 주님의 집인 교회를 나오는 것이며,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주께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신령한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바로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될 때 사랑의 성령께서 내안에 사랑의 오아시스가 터지게 하시고 그것이 넘쳐 흘러 이웃 사랑으로 흘러가는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은 나의 기분에 따라 선택할 사항이 아니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을 실천헤 옮겨야 하는 명령임을 깨닫고 즉각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이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끊임없이 흘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린 시절 부모나 유치원에서 제일 먼저 배운 셈수는 하나에다 하나를 더 하면 몇이지? 라는 기초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무척 쉬운 것 같지만 아주 어렸을 때는 그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손가락이나 사과를 가지고 눈으로 보면서 늘 둘이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하나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마 19: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그것이 바로 사랑의 원리입니다. 세상에서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몇일까요?
부부의 사랑만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에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를 더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온전한 사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첫째 사랑인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보이는 가족이나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나를 향한 주님의 내가 믿고 받아드리고 본받는 것입니다.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사랑을 감사 감격하는 일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일들이 억지가 아니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핑계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요 15:17)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명령은 결코 나의 기분에 좌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기분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물론 미운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주님의 명령은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설령 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순종하여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말을 걸고, 나의 잘못을 시인하고, 내가 먼저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고자 하는 순간 하나님은 내게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상대방에 품고 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사라지게 되고 어둡던 내 마음에 평안함과 기쁨이 찾아들게 되고 좋은 관계로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내게 그 같은 축복을 주시려고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분쟁하고 불화하게 하는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삶입니다. 그 때 비로소 마귀는 울면서 내 곁을 떠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곧 사랑 충만 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하기에 이웃 사랑을 더하면 온전한 하나의 사랑이 결실되어지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고전 13:2-8)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8)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없어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