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 3:3-10)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동물의 세계를 유심히 관찰하면 새끼가 어렸을 때는 어미가 먹이를 삼켜 어느 정도 소화한 것을 다시 토하여 먹이지만, 좀 자라면 통째로 잡아주어 먹게 하고, 다 자라면 먹이를 산채로 잡아다가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사냥 방법까지 가르쳐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무 책이나 보기만 하면 다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준에 맞는 책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수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성경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은 획일적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진적으로 자라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고, 어떤 사람은 소년과 같고, 어떤 사람은 청년과 같고, 어떤 사람은 장년의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마다 성경을 적용해야 할 기준이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항상 힘써야 할 것 중에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잘 분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만 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은 사람이며, 어떻게 하면 마음을 새롭게 변화되는 복을 받을 수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아지는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1.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의 첫 단계입니다.
모든 생명은 성장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어린아이로 태어나 점차 자라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이 초보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는 중생’의 단계입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여기서 ‘다시 살리심’ 이라는 말은 동사 쉬네게이로는 ‘함께’ 라는 쉰(suvn)과 일어난다는 에게이로(ejgeivrw, )라는 두 말의 합성어로 '어떤 사람을 자리에서 일어나게 돕다, 함께 일으키다'를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영적 상태로부터, 하나님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를 다시 살리셨음을 뜻합니다.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 유명한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중생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 3:1-5) “1” 바리새파 사람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2” 그가 어느 날 밤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선생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내가 분명히 너에게 말하지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4”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묻자 “5”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해두지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니고데모는 세인들이 부러워하는 권력, 재력, 젊음을 다 갖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천시하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님이라고 인정할 만큼 믿음이 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같은 니고데모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만일 오늘 우리라면 크게 상처를 받고도 남을 정도의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중생이란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다 허물과 죄로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만물을 말씀으로 말씀과 성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그 영혼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살리시는 재창조 사역이 바로 중생입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거듭남을 위해서 아무것도 노력한 것이 없습니다. 아니 아무런 노력도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 피동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거듭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영적인 질서요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교회 안에는 자신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사회적인 부귀 권세가 있다고,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국의 일꾼이 되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중생이라는 거듭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주님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주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기 높아지려고 하고, 자기주장을 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결과적으로 교회 부흥의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신 후에 삼년동안 훈련시키셨지만 거듭나지 못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는 사단의 앞잡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중생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무슨 일을 잘하려고 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지난날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깊이 배우는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거듭나는 체험하는 기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2.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는 남에게 자랑 할 정도로 신앙의 최고 단계가 아니라, 최저 단계로 마치 어린아이가 모태에서 갓 태어난 것과 같은 수준입니다.
만일 어린아이가 첫돌이 지나고 두 세 살이 되었는데도 엄마 소리도 못하고 걷지도 못할 때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아이를 볼 때 마다 귀여워서 죽겠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서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생한 신자의 믿음이 어떻게 해야 무럭무럭 자라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시절을 좇아 결실을 맺음으로 그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엡 4:14-15)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가 싸워야 할 죄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근원입니다.
이 죄는 우리 속에 있을 아니라 우리 존재의 구석구석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을 치지 않고서는 이 내적 원수를 타격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정죄하지 않고서는 그 죄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죽지 않고서는 이 죄를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와의 싸움은 미묘합니다, 왜냐하면 죄와 대항하는 싸움은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약할지라도 적과 싸워 이기려면 무엇보다 적보다 우세한 무기로 무장을 하고 나를 도와 함께 싸워줄 지원군이 있다면 나도 적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 3:5)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미움, 시기, 분노 등 잡다한 것들이 우리를 자주 넘어지게 하고, 패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 책임에 대해서 무서운 진노로 물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 3: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그러므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으려면 그와 같은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이라’는 단어는 ‘네크로사테’라는 말은 죽음에 처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가 위축되고 쇠퇴되는 것을 의미로 질질 끌지 말고, 매우 단호하게 완전히 죽여 없애 버리라고 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위대한 믿음의 사도입니다. 헌신의 사람으로 엄청난 업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여기서 ‘죽노라’는 단어는 현재 능동태로 한번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목숨은 하나인데 어떻게 매번 죽는단 말입니까?
기독교는 살인이나 자살이나 동일한 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살고 죽는 것은 인간의 권한이 아니라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매일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죄의 속성을 날마다 죽여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기서 ‘죽이라’는 말은 죽음에 처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가 위축되고 쇠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남을 죽이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남을 위해 내가 죽는 종교입니다.
오늘 우리 세계와 국가와 가정과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미움, 시기, 질투, 분쟁, 폭력, 살인과 같은 크고 작은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은 타락한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에 대한 해결책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죽음 뿐 입니다.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만 죽이면 되는 것입니다. 남이 아니라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심, 나의 욕심, 나의 분노와 시기와 자랑과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기만 하면 내가 살고 내가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고 내게 요구하시는 겸손이고, 희생이고, 사랑이고, 인내인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이론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나 결심만으로 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부정적인 나 자신의 성품이나 습관이나 죄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내 힘만으로 내안에서 몰아내고, 죽여 버리고, 두 번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깨끗이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만 아니라 마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포기해버리면 나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마귀의 조롱거리가 되고, 나는 건강이나 물질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쟁 영화나 실화를 보면 강한 적과 마주쳤을 때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기가 죽지 말아야하고, 내가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된다는 일사각오가 최우선이고, 그 다음은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신무기로 무장을 해야 하고, 내가 힘이 약할 때는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공중에는 비행기가 떠서 폭격을 해주고, 후방에서는 포사격을 해주고, 전쟁에 능한 특공대를 지원군으로 보내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나는 안 돼! 며칠이나 가겠어? 라고 포기하지 말고 무엇보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상세한 보고를 하고,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 그리스도에게 새로운 무기와 지원군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시 35:17)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지난 번 동해에서 벌린 한미 연합 군사훈련처럼 하나님께서 강력한 지원을 해 주실 것입니다.
전함과 같은 성령의 도우심, 미사일보다 강력한 말씀과 찬양이라는 무기, 지원군보다 더 많은 천군과 천사들을 지원해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대장되시는 주님이 나의 총사령관이 되셔서 내 안에서 나의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철저하게 죽게 하실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내가 나의 옛사람, 옛 성품, 옛 생활의 죽음을 나의 밖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육의 속성을 얼마나 철저하게 죽이는가의 여부에 따라 그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그의 마음에 평강이 있고, 그가 더욱 크게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에 의하여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자신을 날마다 죽이는 삶은 손해가 아닙니다. 고통이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유익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의 주님이 날마다 죽는 나에게 부활의 선물을 주시기 때문에 유익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3. 벗어버리고 입으라
(골 3:9-10)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요즘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흉악범이 많아져가고 있습니다. 누가 흉악범인지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사가 끝나고 재판을 받게 되면 제일 먼저 평복을 벗고 번호가 붙은 수의로 바꿔 입게 됩니다.
교도소에 가보면 다 죄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들과 면회객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죄수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단번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입은 옷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죄수는 반드시 수의를 입고 있습니다.
죄수는 형기를 다 마치기 전에는 잠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항상 수의를 벗을 수 없습니다. 정해진 형기를 다 마치고 출옥을 하게 될 때 반드시 수의를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게 됩니다. 출옥을 하면서 수의를 요구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죄인인지 의인인지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인류의 조상 아담의 원죄로 인해 다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잘 실감이 나질 않을 것입니다. 동의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수가 입는 수의를 입고 다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신사복과 양장을 입고 다닐 때는 신사숙녀로 보이지 죄수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나는 수의를 입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걸치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벗어 버릴 생각도 안하고 무슨 턱시도처럼 착각하고 걸치고 있는 수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골 3:8)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여기서 분함과 노여움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마음에 품고 있는 악한 감정과 남을 해 하려는 독한 마음,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모함하는 입술, 남의 인격에 손상을 주고 자신의 인격을 실추시키는 더럽고 추잡한 말이 바로 감옥에서 죄수가 입는 수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감옥에서 입는 수의와 다른 수의를 입고 사는 죄수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옷이 없어도 감옥에서 내내 입었던 수의를 달라고 해서 그것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집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를 나올 때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 수의를 입고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벌이 아니라 여러 벌을 끼어 입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분노하고 남을 비방하고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벗어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미련이 남았습니까? 한시 바삐 어서 벗어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하나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벗어 버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골 3:8,9)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여기서 ‘벗어 버리라’는 말은 옷을 벗는 것만이 아니라 감옥에 쳐 넣는 것을 뜻하는 말로 어서 빨리 잘못된 습관이나 성품이나 행동을 수의처럼 벗어 던지고 단념하고 포기하고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더럽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벗어버려야만 좋은 옷으로 갈아 입을 수 있는데 그 옷이 겉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닮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깊은 속 심령까지 새로워진 새사람이라는 옷입니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여기서 입었으니 라는 말 ejnduvw 은 과거에 이미 입은 상태로 그 때문에 그 마음과 생각과 삶이 매일 새롭게 갱신된 삶 ajnakainouvmenon 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좋은 마음에서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산에 가서 도를 닦고 몇 권의 책을 읽고 몇날 며칠 금식하고 명상하고 수행을 하고, 누구에게 가르침과 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해결되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새롭게 된다는 것은 겉으로 누구를 모방하고, 좋은 설교 한편을 듣고 감동을 받고,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으로 시작은 할 수 있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나의 내면의 사람이 변하여야 합니다.
나의 잘못된 성품이 새로워지고 나의 더러운 심령이 깨끗하게 되는 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내 지식이 새로워지고, 내 영혼이 새로워져야만 새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제사장이 성전을 출입할 때 물두멍에 손을 씻는 것처럼,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십자가 보혈의 물두멍을 놓아 두어, 어떤 생각이나 말이 드나들 때 반드시 그 십자가 피로 정화되어져야만 비로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계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십자가를 붙들어야 하고,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야만 하고, 십자가만 자랑하여야 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육의 속성을 얼마나 철저하게 죽이는가의 여부에 따라 그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그의 마음에 평강이 있고, 그가 더욱 크게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됩니다.
만일 내가 신앙 연조는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나의 믿음이 유치원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반드시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만, 반대로 악한 마귀는 싫어합니다. 마귀는 마치 알곡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잡초처럼 내 곁에, 내 안에서 나의 약점과 욕망을 자극하여 나를 유혹하고 시험하여 넘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내게 그 약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마치 농부가 피살 이를 하고 김매기를 할 때 어설프게 뽑게 되면 오히려 더 잘 자라기 때문에 뿌리까지 확실하게 뽑아 버려야 하는 것처럼, 나의 믿음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이론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나 결심만으로 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아지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하고 또한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으면 되고, 나만 죽이면 되고,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심, 나의 욕심, 나의 분노와 시기와 자랑과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내가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롭게 된 믿음이요, 주님을 닮은 겸손이요, 십자가 사랑이요, 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되신 것처럼, 오늘 우리 세계와 국가와 가정과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미움 시기 질투 분쟁 폭력 살인과 같은 크고 작은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은 타락한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해결책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남을 죽이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처럼 나도 그리스도와 교회와 남을 위해 죽어야 하는 종교입니다.
자신을 날마다 죽이는 삶은 손해가 아닙니다. 고통이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유익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의 주님이, 날마다 죽는 나에게 날마다 새롭게 사는 부활의 선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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