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신 나의 하나님(시 145:1-4)
“1” [다윗의 찬송시]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4”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우리가 자고 깨면 새로운 사물들과 사건들을 접하게 될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충동은 도대체 그 물건이 무엇에 쓰는 것이며, 왜 그 사람이 그러한 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궁금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무엇보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한 삶인가?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지금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고, 자신이 지금 기뻐해야 할 때인지? 아니면 근심하고 슬퍼해야 할 때인지를 바로 알지 못한 채 마치 계곡 물을 타고 가는 낙엽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동과 더불어 힘차게 솟아오르는 일출,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밥상에 오른 온갖 음식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먹을거리로 주신 동식물들이요,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이 함께 사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먹구름이 몰려오고 폭우가 쏟아지고 벼락이 떨어지고 폭설이 내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기상 이변으로 인한 재해를 볼 때 창조주 앞에 인간의 왜소함과 무능력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무미 건조한 신학적인 이론이나 진부한 종교 형식을 반복하는 것으로 신앙이 다 된 줄 알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지만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1. 인생의 목적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으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살라고 우리를 지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1) 돈을 벌기 위해서 잠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몸에 병이 들도록 밤낮 일을 하며 살아가는 돈벌레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2) 평생을 책상 앞에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평생을 남을 가르치는 책벌레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3) 깊은 산속이나 토굴에서 도를 닦는 수도사처럼 세상 욕심을 버리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아 헤매는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을까요?
4) 아니면 잠깐 왔다가는 인생이니 더 늙고 병들기 전에 가난하게 되기 전에 젊었을 때 돈이 있을 때 마음껏 즐기고 놀기를 좋아하는 쾌락주의자들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을까요? 물론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 중에 하나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의 주권과 존재 이유는 자신이 아닌 주인에게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은 우리의 존재이유와 의미는 내가 아닌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그 목적이 무엇이었다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을까요?
(엡 1:11-13)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제외한 다른 피조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목적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 만물을 볼 때마다 늘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며, 휴가철이면 산과 계곡과 바닷가에는 도심에서 모여든 인파들로 몸살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시 19: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그처럼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면 만물의 영장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더 말할 것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제일 되는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욕심을 부렸다가 범죄 함으로 타락하면서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신성시하고 우상화하면서 영적으로 어리석음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여 본래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보자로 삼으셨습니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목적을 상실한 인간들과 달리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음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돈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권세로가 아니라 오로지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본래 창조의 목적이었고 그 목적을 상실한 우리를 구원하신 재창조의 근본 목적입니다.
한번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인가 아닌가? 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시작이요, 구원받은 인간의 새로운 시작이요, 천국에서 영원한 누리게 될 인간 창조의 최종 목적입니다. 어떤 시인이 이런 노래를 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나면 온 땅을 비추던 태양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이다.
눈물이 바다를 이루는 중에
땅 속에 들어간 저 창백한 형체가 묻힌 차가운 대지에도....
그대의 형상은 그 넓은 바다에도 대지위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개인적으로 지냈던 모든 흔적들은 사라질 것이라네
그대는 땅의 원소와 결합되어 흙덩어리 속으로 빨려 들 것이라네
지나간 시대, 이 땅에 살았던 지혜로운 자들
그리고 거룩한 선지자들, 귀여운 아기와 백발의 노인이
그대 곁에 하나씩 누울 것이며 때가 오면 그를 눕힌 자들도 곁에 눕게 될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땅위에 살았던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때가 되면 다 땅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땅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광을 돌리던 자들은, (시 86:12)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라는 말씀처럼 죽음 이후에도 하늘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의 존재의미는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림에 있고, 그럴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답고 존귀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2. 바르지 못한 예배
우리는 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하시는 분이며 그 일에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며 교회는 그 일꾼들을 공급하는 용역회사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처럼 누구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허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도움이 없이 단 엿새 만에 천지와 만물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창조하실 정도로 완벽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허물과 실수가 많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그와 같은 인간에 전적으로 맡기시거나 동역을 하신다면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 혼자서 하는 것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리콜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태여 인간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종종 그와 같은 인간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택하시고 부르신 경우가 많이 있으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와 제사장들이며, 신약 시대에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그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돕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는 일에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 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바로 알고 그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해야 하는 최상의 일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들이기보다 오히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근심되게 노하시게 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여러 가지 일이 있지만 100% 하나님만을 위한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예배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엿새 동안은 우리를 위해 일을 했다면 주일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만족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불만족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공통된 말은 “설교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분위기가 고리타분하다. 찬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도가 안 된다” 기타 등등의 구실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정답은 예배를 참석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은혜로 받고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한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드리는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예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만 목적을 둔 예배와는 근본이 판이하게 다는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주일 중에 하루를 주의 날로 구별하시고 주일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일이 예배인 까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시기를 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며 그 첫 번 째 방법이 바로 주일에 모여 드리는 예배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는 그 목적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한 일이며, 그 방법이 찬송이든지 기도이든지 헌금이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같은 예배를 요구하시는 것이 당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처럼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예배자에게 가장 큰 은혜와 축복이 되는 순서가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어디든지 아니 계시는 곳이 없으시고, 예수님은 이미 부활 승천하셨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영적으로 만나주시며 임재하시는 복을 맛보게 됨으로 결과적으로 내게 복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찬미의 제사를 드릴 때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만 그 찬송을 통해서 기쁨을 맛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배자인 우리 자신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와 같이 감사할 수 있는 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복을 받지 않고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그 사람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요 또한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반면에 예배가 순전히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순전히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위한 기복적인 예배라면 그 사람은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지도 않지만 본인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게 됩니다. 오히려 가인의 예배처럼 오히려 해를 받게 됩니다.
3. 바람직한 예배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바람직한 예배는 어떤 예배이며 어떻게 드리는 예배일까요? 물론 예배의 주체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실 것인가 아니면 받지 않으실 것인가? 하는 결정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형식이나 방법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찾되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달리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디든지 계십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시 139:7-10) “7”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으며 주 앞에서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주는 거기 계시며 내가 하계에 가서 누워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타고 바다 저편 가장 먼 곳에 가서 살지라도 “10” 주는 거기서도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디서나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인간의 한계요 현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당신의 존재하심을 사람들에게 들어내시고, 사람들을 만나주실 때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영광의 구름과 불기둥 가운데 여호아 하나님은 성막의 지성소에 임재하셨습니다.
2) 솔로몬이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하였을 때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대하 7: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3)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가 대립을 할 때 하나님은 아무 때나 임재하신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응답을 비는 기도를 마쳤을 때 비로소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왕상 18:37-39)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 오순절 성령 강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공공연하게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셨으나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을 때 마침내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행 2: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안에 일정한 자연 법칙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하나님의 임재에는 일정한 영적 법칙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지금까지 무미건조했던 우리의 신앙에 대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예배 의식이나, 음악이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만나주시고, 성령이 임하시는 변함없는 영적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1)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예배의 자리에 임하십니다. 그 자리가 구약 시대는 성막 성전이었다면 오늘에는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요즘은 왕국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잘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시편기자 다윗은 자신이 왕이면서도 불구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종이라고 낮추고,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영광과 찬송을 드렸습니다.
(시 145:1-4) “1” [다윗의 찬송시]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4”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날마다 하나님을 높이고, 송축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3)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영적인 제사이기 때문에 제물은 짐승의 고기가 아니며 예수님의 피로 속죄 받은 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나의 입술이나 나의 손만이 아니라 나의 몸 전체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송축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롬 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4)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야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만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5)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말씀을 들을 때 입으로나 귀로만이 아니라 머리로 그림을 그리고 마음으로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테면 십자가라는 말이 나올 때 갈보리 십자가를 연상하며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히 10:19-20)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렇게 할 때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만나주시고 죄를 씻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은 말씀을 읽고,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중에 예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게 되고, 감격하게 되고, 성령이 나를 치료하시고 위로하심으로 마음에 깊은 감격과 감사가 마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처럼 마음에 솟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뜨겁게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게 되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지으셨고 나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달아 그 일에 헌신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전에는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마치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죄를 반복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다는 능동적인 의지를 발동하여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를 경험할 때 개인과 그 가정과 교회도 덩달아 변하게 된다면 지금이 바로 우리에게 그 같은 은혜와 변화가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가 아닙니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나 훌륭한 시민이 되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입만 열면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기고 만사가 형통하고 잘 되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방교회의 기도문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시여, 주님의 권능은 비할 데 없고 그 영광은 무한하며 주의 바비는 헤아릴 수 없고 그 자비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주여 주의 사랑으로 저희와 거룩한 집을 굽어 살피시고 저희와 또 함께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의 지극한 자비와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모든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드림이 마땅하나이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 드리는 주일은 안식 후 첫날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고대 교회 성도들은 주일을 어떻게 지켰을까요?
주후 115년 교부 이그나시우스는 마그네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과 그의 죽음 때문에 우리의 삶과 또한 모든 이의 삶이 빛난 주일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조지 바르나(George Barna)는 ‘주일 날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 중에 반 정도는 지난 한 해 예배 가운데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게 대답할 수 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을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더불어 대화를 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하며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행복 기쁨 경이 희망 감사 격려 용기 감격하는 마음을 얻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그와 같은 감정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입으로는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눈으로는 성경에 기록된 창조주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가운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을 보며, 귀로 주의 말씀을 기울여 듣고, 두 손을 들어 하나님을 높여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릴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울이 예배의 체험을 통해서 삶이 변화된 데살로니가 교회를 가리켜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 1:5)’고 한 것처럼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는 신전 의식을 가지고 다윗 왕처럼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과 기도와 헌신의 삶을 살고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찬송하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말씀을 읽고 듣는 중에, 평범한 일상생활 중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안에 계시고 나를 붙들고 계심을 확신하게 될 것이고, 내가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성도들이 다 될 것입니다.
'설 교 > 이규왕목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관심사(욥 1:6-12) (0) | 2010.09.25 |
---|---|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 3:3-10) (0) | 2010.09.25 |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요 15:7-12) (0) | 2010.09.25 |
귀국을 앞둔 담임 목사의 마지막 편지 (0) | 2010.08.10 |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담임목사의 편지 #4 (0) | 2010.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