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어머니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룻 1:16-18)

미션(cmc) 2011. 5. 10. 07:26

어머니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룻 1:16-18)

(룻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 1: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우리는 너나를 막론하고 다 부모님이 계시지만 어떤 사람은 부모가 유명해서 자식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담이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정반대로 부모가 배우지 못하고 직업도 보잘 것 없어서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부모가 아무리 못나고 초라할지라도 자녀는 부모를 존중하고 삼가며 예의를 차려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잠 23:22)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겔 22:6) “이스라엘 모든 방백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 있었도다”(겔 22:7) “그들이 네 가운데에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에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에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그러나 자기 부모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효도하며 귀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것입니다.
예화
아브라함 링컨 자신도 초등학교 좀 다니다 말 정도였으니 학문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지식 많고 돈 많은 귀족들이 아브라함 링컨을 헐뜯기 위해서 그 반대파에서 끝까지 괴롭혔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상원위원회에 나가서 연설을 할 때, 어느 국회의원이 말했습니다. 당신 같이 무식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우리의 다시없는 불행이라 고 했습니다. 이런 모욕을 주고도 "당신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의 아들, 그런 천한 사람의 아들을 우리가 대통령으로 모시게 됐다"고 해놓고 구두를 벗어서 들고, 이 구두도 당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라고 그랬습니다. 그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대단히 감사 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자기가 맡은 직업에 충실했고 구두를 잘 만드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어깨 너머로 배운바가 있으니 당신 구두가 고장 나거든 가져오시오 내가 수리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웃으면서 진심으로 응수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여러분 "내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떳떳하게 자랑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과 당신을 가리켜 목수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마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진정으로 부끄러운 것은 직업의 귀천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부모를 부끄러워하는 불효자의 삶을 사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싶어도 부모님이 생존에 계시지 않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로 생존해 계신 부모님을 더 잘 공경하고 고인이 되신 부모님 생전에 효도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자유의 기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던 엘리멜렉의 가정이 고향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온 가족을 데리고 이웃 모압 지방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에 가뭄이 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다 땅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고,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래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가까운 에브랏 지방 사람이었지만, 모압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 뒤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만 남게 되었습니다.그 두 아들은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습니다.
나오미와 그의 아들들은 모압에서 십 년쯤 살았습니다. 그러다 말론과 기룐마저 죽어 버리자,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 유다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나오미의 두 며느리도 함께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은 살던 곳을 떠나 유다 땅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각자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나와 죽은 내 아들을 잘 보살펴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잘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새 남편과 새 가정을 주시기를 바란다. 이 말을 한 뒤, 나오미가 작별을 하기 위해 며느리들에게 입을 맞추자, 두 며느리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며느리들이 나오미에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나라로 가겠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말했습니다. “내 딸들아, 너희 집으로 돌아가거라. 왜 나를 따라가려고 하느냐? 내가 아들을 더 낳아 너희에게 새 남편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너희 집으로 돌아가거라. 나는 다른 남편을 맞아들이기에는 너무 늙었다. 설령 내가 오늘 밤에 다른 남편을 맞아들여서 아들을 낳을 수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 아이들이 클 때까지 너희가 기다릴 수 있겠느냐? 그렇게 오랜 세월을 남편 없이 지낼 수 있겠느냐? 그러지 마라. 여호와께서 나를 치셨기 때문에 내 마음이 너무 아프구나.
그들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나오미에게 입을 맞추어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처럼 남편은 이미 죽었고, 가난하고 늙은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르는 것은 피차 짐이 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오르바도 룻과 함께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울면서 매어 달렸었습니다.
(룻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여기서 ‘붙좇았더라’는 말은 ‘찰싹 달라 붙어서 떨어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극구 만류하자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대로 자기 길을 찾아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오르바의 결정은 잘못이 없습니다. 단지 문제는 시어머니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를 하는 모압 땅으로 되돌아가는 영적 퇴보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오르바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그렇게 허비하였으나 룻은 달랐습니다. 나오미는 친정으로 돌아가는 오르바를 보면서 며느리 룻에게 친정으로 돌아갈 자유를 주었습니다.
(룻 1: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이제 룻도 마음에 부담이 없이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와 명분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오르바와 달리 끝까지 나오미를 따르기로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했습니다.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이방 땅에 와서 남편도 두 아들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된 나오미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었을까요? 효도는 결코 동정심이 아닌 것입니다. 아니면 나오미가 비록 모압 땅에서는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요? 효도는 대가성을 바라는 투자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에 대한 마음에 부담감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서도 받은 사랑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행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나오미의 영향력
빈손들고 무지한 상태로 태어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모와 스승과 이웃을 통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강한 영향은 부모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모압에서 출생한 오르바와 룻이 남편이 죽고난 후에 빈털터리가 된 나오미를 버리지 않고 그처럼 효도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평소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베푼 사랑의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나오미가 빈털터리가 되었어도 나오미를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것이며, 불확실한 미래가 훤히 보이는데도 함께 가겠다고 자청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을까요?

1) 사랑의 본보기
룻이 나오미에게 받은 가장 큰 영향력은 사랑이었습니다. 룻은 그 시어머니의 사랑을 잊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 시어머니를 버리고 자기만 행복하겠다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2151
성경은 사랑이 제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사랑은 영원하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 8: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만일 나오미가 평소에 이방 며느리들을 구박하고 관계가 나빴다면 나오미는 위기를 만났을 때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들이 평소에 자녀나 며느리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도리어 상처를 많이 주고서도 노후에는 자녀들에게 효도를 요구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를 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의 죄를 속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효도는 지극히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식은 노년에 자녀에게 효도를 받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심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마치 강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이 서로 소통을 하게 만들고, 사랑은 마치 이자 놀이와 같이 적은 것을 주었지만 많은 것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는 확실한 투자인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몰인정한 사람,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을 싫다고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지식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기도 하지만 가장 큰 영향력은 사랑의 본보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신앙의 본보기
평소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본 보여준 사랑의 원동력은 선한 성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심이 그 원동력이었습니다.
룻이 시집을 오기 전에 자라난 곳은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불신 가정이었에서 나오미의 가정으로 시집을 와서 뒤늦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적응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 접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룻의 마음속에 우상은 무너져 내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인이 되셨습니다. 나오미가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이방 땅에 와서 다 잃고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굳건하게 이기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심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자기들에게 베풀어주는 사랑이 발 그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룻도 오르바처럼 친정으로 돌아갈 자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믿게 된 여호와를 버리고 다시 옛날에 숭배했던 다른 신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졌습니다.
비록 동서 오르바는 옛 신에게 돌아갔으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게 된 룻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룻은 이제 나오미와 죽음이 갈라놓지 않은 한 헤어질 수 없는 공동 운명체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나오미는 룻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자유를 주었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다른 신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나오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오미가믿고 따르는 여호아 하나님을 자기도 생명을 걸고 따르기로 결단을 한 것입니다.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2) 나오미는 룻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신앙의 영향력은 룻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3) 나오미는 룻에게 과거의 신에게 돌아가라고 권하였으나 신앙의 영향력은 룻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의 영향력은 이처럼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룻의 고백은 진실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 되신다는 올바른 신앙 고백입니다. 룻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재혼하여 여생을 편안한 보낼 안식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이 자기의 부모, 친척, 그리고 신을 떠나 아무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결심은 단순한 효성이나 애정을 초월하여 완전한 자기희생을 감수한 위대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은 나오미가 우상의 나라 모압에서 오래 살면서도 그 신앙의 빛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적으로 며느리들을 교훈시켰기 때문에 이처럼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 전도 중에서 가장 요긴한 가족전도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이 같은 룻의 모습은 남편과 두 아들과 재산을 모두 다 잃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던 나오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효도인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가 자녀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신앙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3. 효도의 책임과 축복
하나님은 마땅히 해야 할 효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또한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놀라운 축복을 성경에 약속하셨습니다.
(신 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룻은 얼마든지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자유가 있었지만 룻은 그 자유를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랑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효도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에게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룻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을까요?

1) 가난한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보리 이삭을 주으려고 베들레헴 들판에 나아갔다가 베들레헴의 소문난 부자 보아스에게 현숙한 여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룻 3: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 3: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2)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 그동안 무너졌던 가문을 재건하여 나오미의 한을 풀어주는 효부가 되었습니다.
(룻 4: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3)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음으로 그 후손 다윗의 가문을 통해 세상에 오실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룻 4: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4)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된 신약 성경에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러나 동일한 나오미의 가정에서 며느리 노릇을 한 오르바는 룻과 달리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돌아갔으나 룻과 같은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상 빚은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원금은 물론 높은 이자를 합쳐서 돌려주는 것이지만, 효도라는 빚은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 중 지극히 적은 일부만을 되돌려 드리는 사랑의 빚 갚기입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자식의 도리로 당연히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명으로 명령하시고 순종하는 자에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이 약속된 축복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풍요로움은 우연히 아닙니다. 이 시대가 다 완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어른들의 희생과 수고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부모들에게서 두 가지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가난을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 오늘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의 기틀을 이룬 부모들의 공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누리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발전과 국제사회에서의 높은 위상은 한 마디로 부모세대의 희생 위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부모들은 6.25 동란 폐허가 된 이 땅을 오늘날 자유경제체제하에서 풍요한 사회를 구가할 수 있도록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세대입니다.
우리나라의 초기 수출품을 보면 봉제와 가발, 신발, 흑백 TV 등 손으로 만드는 제품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반도체와 자동차처럼 기술로 승부하는 첨단제품이 아니라, 싼 가격으로 승부하는 경공업 제품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 우리 부모들의 ‘값싼 노동력’이 없었으면, 70-80년대에 이룩한 ‘수출 신화’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산업화의 주역으로 어려운 시기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또 부모를 부양하며 희생하며 살아 왔습니다.
우리가 산업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풍부한 고학력의 인적 자원이 뒷받침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던 지난세월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자녀들의 공부만은 시켜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 노력의 결실로 이룩된 것이 오늘의 고학력사회(高學力社會)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젊은이들이 우리나라가 자기들의 힘으로만 잘된 줄 착각하고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존재감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불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며, 자녀들이 잘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갈수록 자녀들이 부모 봉양을 값싼 동정으로 취급하거나, 지겨운 의무 정도로 생각하여, 부모를 길거리로 내모는 경우도 있은 이것이 자녀의 도리는 아닌 것입니다.
신문, 방송과 같은 문화 미디어에서는 온통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만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노인들의 접근 자체가 어려운 인터넷 세상은 말할 것도 없이 ‘젊은이들만의 공간’입니다.
그 이유는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세상이 온통 상업주의에 빠져서 노인들의 주머니에 돈이 떨어졌음을 알고 소비 성향이 강한 젊은이들을 겨냥한 상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오늘의 부모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을 숭배오던 이 땅위에 뿌려진 한 알의 밀알과 같은 복음을 눈물로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르 부흥시키고 가난한 중에서도 정성껏 헌금하여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단과 자유주의 신학과 싸워서 교회를 지켜온 자랑스러운 세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부모들로부터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앙적 유산까지 물려받은 축복된 자손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잘나고 잘해서 이처럼 복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부모들이 영육간에 복의 기틀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명이 부모를 통해서 왔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부모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노후를 의지 받을 당연한 권리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자녀들이 부모들로부터 물려받아야 할 두 가지 유산이 바로 한탕주의를 버리고 매사에 성실과 근면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신앙의 대물림입니다.
무엇보다 어떠한 이유로든지 어버이를 무시하면 그것은 자녀 자신의 존립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부모가 초라하든지 못났든지 자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모는 하늘이 정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믿는 성도에게 있어서 부모 공경은 의무요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된 자녀는 부모를 어떻게 봉양해야 하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물질로 봉양해야 합니다.
요셉은 가나안에 있던 그 아비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한 후에 애굽의 좋은 것으로 그를 효도하였습니다.
(창 47:12)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어버이에 대한 공경은 마음이나 생각, 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에 따라야 합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 드러야 불편함이 없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용돈을 좀 넉넉하게 드리고 따로 살 경우에는 생활비를 공급해 드리는 것이 지식으로서의 합당한 태도입니다.
부모가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치게 하는 것은 자식의 수치임을 알고 열심히 일하여 필요한 것을 드리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2)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노인들은 통상 4고(四苦) 즉, 질병고, 고독고, 무위고, 빈고 등의 어려움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중에 노인의 여가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것은 무위 고와 고독 고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한 부모들에게 효도는 마음을 기쁘게 하는 보약입니다.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3) 신앙의 명문 가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평생 예수를 믿고 살아온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소원은 용돈이 아니라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부모가 피땀 흘려 물려준 가업과 유산을 말아 먹는 것도 불효지만 부모가 눈물 뿌려 기도하며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자식이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은 더 큰 불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나는 예수를 믿지만 부모님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과 영생 천국을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부모님을 전도하여 예수를 믿으시고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부모님의 육신의 질병을 고쳐드리는 것 보다 더 큰 효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그래서 내 대부터라도 우리 가정이 신앙의 명문 가문이 되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축복을 가문 대대로 이어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부모가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나와 우리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예수를 잘 믿는 것은 명문 가문의 지름길이요 효도 중에 제일 큰 효도인 것입니다.
(잠 23: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잠 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