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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의 두려운 고백이 끝난 후에, 보아스는 룻에게 안심하라고 말한다. 보아스는 룻의 됨됨이를 알기 때문에 이제 보아스가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아스는 자신보다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사람이 있기 때문에 룻에게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에 룻은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향한다. (3:11~14) 이 때 보아스는 룻에게 추수한 보리를 준다. 룻의 겉옷을 펴도록 해서 그곳에 여섯 번 부어 준 것이다. 그런데 왜 보아스는 여섯 번만 보리를 부어 주었을까? 왜 일곱 번 이상 보리를 주지 않았을까? 보리가 아까워서 그랬을까? 본문에 보면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 지워 주었다고 되어 있다. 탈굼이나 랍비의 전승에 따르면 이 양은 두 에바(약44리터)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이 가져 갈 수 있는 양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보아스가 그녀에게 가져갈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곱 번 이상 주지 않은 이유는 룻이 그 양을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할 것이 하나 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분량이다. 보아스가 룻에게 선물을 최대한 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항상 은혜를 가득히 최대한으로 주시는 것이다. 만약 룻이 더 지고 갈 수 있었다면 보아스는 기꺼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을 생각해서 그녀가 가져갈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준 것이다.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았다. 부족했다면, 서운했을 것이고, 넘쳤다면 가져가기에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알맞은 양만큼 준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신다. 늘 최대한 주신다.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시며,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보리의 양은 이것을 상징한다. 룻이 겉옷 가득 가져 온 보리를 보고서, 나오미와 룻은 무엇을 느꼈을까? 보아스의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나오미와 룻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보아스의 마음을 느낀 것이다. 그녀들의 눈 앞에 펼쳐진 가득한 보리는 보아스의 마음을 나타냈던 것이다. 바로 오늘날 하나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때때로 주시는 은혜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더 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과연 우리들은 그 양을 감당할 그릇인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 이상 주시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혜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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