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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답은 본문에 나온다. 4절에서 그는 처음 보아스의 제의에 흔쾌히 기업을 무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어서 보아스가 그 밭을 살 경우에는, 모압 여인 룻과 결혼을 하고 죽은 자의 기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자, 그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6절)”라고 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손해가 생겨서 그랬던 것이다. 그의 동기는 근본적으로 “나를 위하여”였던 것이다. 처음에 그가 기업을 무르고자 한 이유는,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들이 다 죽었기에, 그 밭이 자신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그 밭이 자신의 것이 되는 줄 알고 기꺼이 승낙했지만, 후에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알고 거절한 것이다. 사실 세상 모든 사람들도 본문의 기업 무를 자와 근본적으로 같다. 전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해쳐서라도 자신을 위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우리들을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오늘도 사랑해 주시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잘 생각해 보자. 내가 하나님을 믿고서 하나님께 드린 것이 더 많았는가 아니면 받은 것이 더 많았는가? 정말 나는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사는가? 아닐 것이다. 사실 그 정도가 아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까지 주신 것이다. 본문의 보아스의 모습이다. 보아스는 룻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룻은 그럴만한 그릇이었다. 그는 보아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고,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그릇들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늘 신실하게 우리를 대하시고, 늘 위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나를 위하시는 변함없는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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