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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기업 무를 자와 보아스 사이에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 내용이다. 앞의 단락에서 기업 무를 자는 자신의 손해 때문에 기업 무르는 것을 보아스에게 넘긴다. 그래서 정식적으로 계약을 맺은 것이다. 신을 벗어서 보아스에게 준 것인데, 이런 행동은 아마도 당시 농경 사회에서 재산의 근간인 토지를 밟고 다니는 신발을 넘김으로 재산권의 양도를 상징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토지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한 말이 흥미롭다.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고 말한 것이다 (8절) 참 재미있다. 기업을 무르는 것이 자신에게는 손해인데, 보아스에게는 이익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기업 무를 자는 무슨 의미로 이 말을 했던 것일까?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세상의 복과 하나님의 복의 근본적인 차이를 볼 수 있다. 세상적으로는 손해인데, 하나님 법칙 안에서는 복이라는 것이다. 분명 보아스는 세상적으로는 손해를 봤다. 그러나 아니다. 실제로 보아스는 엄청난 복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오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보아스는 그 너머를 본 것이다. 관점이 달랐던 것이다. 세상의 관점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을 본 것이다. 사실 보아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10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이 구절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단어는 “그”라는 단어이다. “나”가 아닌 것이다. 즉 보아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생각하는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정말 흥미롭다. 다른 사람만을 생각했던 보아스에게 최대한의 축복이 임한 것이다. 일단 11~12절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보아스를 진심으로 최대한 축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도 보아스의 헌신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전심으로 그를 축복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관점이 다른 것이 바로 축복의 통로라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은 “나”이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내”가 아니다. 관점이 다른 것이 축복이다. 생각해야 한다. 세상의 관점을 쫓아가면 우리는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없다. 세상의 복을 가득 안았던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결국 그들에게 복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되었던 것이다. 관점이 달라야 한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세상의 복이 전부이다. 더구나 이것은 우리에게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오직 하늘의 관점으로만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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