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창세기강해

[김관선 목사의 창세기 강해 (6)] 죽음과 데려감

미션(cmc) 2011. 6. 20. 08:51

   
  ▲ 김관선 목사  
요절: 창세기  5장 1~31절

창세기 5장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다. 누구라도 다 죽는다. 그러나 대조적인 한 사람이 있다. 이 “죽었더라”가 비껴간 사람이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죽었더라”

아담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무엇일까? 자기와 같은 죄인을 낳은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죄를 지은 결과 그 형상을 잃어버린 채 죄인의 형상이 그 속에 심겨진 것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이 죄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결말은 모두 죄의 결과인 “죽었더라”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죄인들은 결국은 죽는다. 므두셀라는 가장 오래산 사람으로 기록되었지만 그도 죽었다.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생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했다. 잘 살아보겠다고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것이 죄가 되었고 그것이 생명이 아닌 죽음을 가져왔으니 아이러니하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5장에 반복되는 “죽었더라”가 비껴간 유일한 사람이 에녹이다(21~24절). 가인의 아들과 이름이 같지만 삶은 전혀 달랐다. 그는 하나님과 무려 300년 동안 동행했다. 특별한 뭔가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5장에 등장하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자녀를 낳았으며”,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했다. 일상의 삶을 유지하면서 동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거나, 독신으로 살지 않아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험한 세상 살다보니 죄를 지었다는 것은 핑계다. 목사보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처럼 살아보라. 목사는 교회 안에 있으니까 그렇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살아도 동행하지 못하는 목사도 있고 세상에서 분주하게 살아도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세상 핑계될 것은 아니다. 그러면 동행이 무엇일까? 그 분과 같은 생각, 같은 방향, 같은 꿈을 갖는 것이다. 먹지 말라면 먹지 않는 것이 동행이다. 그 분이 싫어하면 나도 싫고 그 분이 좋은 것은 나도 좋은 그런 삶이 동행이다.

“데려가시므로”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은 하나님이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에녹이 5장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 그에게 “죽었더라”는 표현이 없다. 하나님이 그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신 것이다. 데려갈 곳이 공간적으로 분명히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에게 죽음이 아닌 공간이동의 복이 주어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 아닌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로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그 분과의 동거가  이루어진 것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도 죽음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웬일인지 ‘죽음’은 거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데려감’은 기대할만 하지 않겠는가?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은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삶이 끝날 때는 하나님이 데려가시므로 완전한 동거가 이루어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행은 기쁨이다. 그 분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큰 기쁨일 테니 기다려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