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와 그 가족을 심판으로부터 구원받게 한 도구는 방주다. 방주 ‘안’은 생명이고 방주 ‘밖’은 죽음이었다. 창세기 7장은 노아가족의 구원의 방편인 방주를 보여주고 있다.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로 들어갔고(7절), 모든 선택된 짐승들이 방주로 들어갔다(9절). 7절과 11절에서 반복하여 방주에 들어갔음을 확인하고 16절에는 방주에 들어감을 확인하신 하나님께서 그 문을 닫아 주셨다. 그리고 23절이 선언한다.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방주 밖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전혀 없었다(22절). 방주가 죽음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죽음과 삶은 방주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로 갈라졌다. 이 방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이 있다. 요즘 이것을 흔드는 세력들이 있지만 결코 다른 길은 없다. 물 위에 떠다니는 방주 노아의 가족과 또 선택된 짐승들을 태운 방주는 물 위에 떠올랐다(17절). 그리고 일 년 동안 물 위에 떠다니게 된다. 천하의 모든 것이 물에 잠겨 죽고 말았지만 물 위에 떠다니는 방주 안에 있는 사람과 동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방주에 물이 스며들어 방주가 물속으로 들어갔다면 다 함께 죽는 것이다. 방주가 생명이 되었던 것은 물 위에 떠다니고 물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는 물 위에 떠다닐 때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고 안전이 담보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방주 역할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 세상의 방주가 되어 그 안에 들어오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방주에 물이 스며들어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방주가 부력을 잃어버리므로 생명을 살리기는커녕 방주 자체의 안전조차 지켜내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 밖에 있지 않다. 교회를 총칼로 위협하던 시기에는 오히려 스스로를 잘 지켰다. 그러나 신앙의 위협이 사라지고 편안해진 이 세상의 교회는 스스로 무너진다. 자발적으로 세상의 온갖 천박한 성공주의와 물질주의적 흐름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버리므로 안팎에 역청을 칠하지 못한 배처럼 물이 스며드는 위기를 만난 것이다. 방주가 물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한국교회가 세상의 가치관과 더러운 문화의 바다 위에 안전하게 떠 있어야 한다. 가라앉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과연 방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교회 안에서 안전한가? 방주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살아남은 것처럼 그렇게 보호를 하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건강하던 교인들조차 잘못된 가르침과 잘못된 교회관에 의해 병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교회의 위기는 건강한 교회의 가치관을 지키지 못하는 교회 안에 있다. 풍랑이 이는 험한 바다에 든든하게 자리 잡고 흔들리지 않고 교회다움을 지켜내는 교회를 가꾸기 위해 건강한 가치관으로서의 역청을 제대로 칠했는지 점검해야 한다. 아직 교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방주는 물 위에 떠있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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