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늘 둘로 나뉜다. 인간의 타락 후에는 예배의 성공자와 실패자로, 노아 홍수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로 갈렸다. 그리고 홍수 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세 아들들도 둘로 나뉘었다. 축복을 받는 자와 저주를 받는 자다. 아버지의 실수 홍수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의로운 노아, 그러나 그는 정작 살아남은 후 실수한다(20,21절). 누구라도 조심해야 한다.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며(고전10:12) 승리 후가 위험함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낼 만큼 취했다. 세상에 취해 우리의 어리석음이나 추한 꼴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특히 성공했다 싶을 때 더욱 그러해야 한다. 이런 아버지의 실수 앞에서 아들들은 둘로 나뉜다. 한 편은 축복을, 또 다른 편은 저주를 받는다. 보고 알리는 아들 함이 아버지의 허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렸다. 소문냈다(22절). 그런 그에게 저주가 임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의 허물이다. 그것은 은밀한 일이었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본 아들이 아버지를 더 부끄럽게 만든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관계다. 부모의 작은 실수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권위를 본다. 상대가 누구든 작은 실수마저 용납하지 않고 들추고 알리면서 존중되어야 할 인격에 손상을 주는 경우들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다 들추신다면 누가 서겠는가?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알린 함은 저주를 받았다(25절). 덮고 보지 않는 아들들 함과 달리 셈과 야벳은 함으로부터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덮어주고 보지 않았다(23절). 아버지의 허물,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것은 아들된 자의 당연한 도리다.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그런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주고 모른 척 해주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고 세워주는 아름다운 자세다. 이들은 축복을 받는다(26,27절). 주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덮어주시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보이지 않는 허물까지 드러내려고 애쓰는 경우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형제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의 보이는 허물과 실수에 대해 덮어주고 이해하는 것이 복 받는 사람들의 모습임을 드러내는 사건이 아닐까. 보이는 세상의 악과 부조리, 불의함에 대해서는 애써 못 본체 하거나 덮어버리면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야 할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것까지 들춰내고 알리려는 자세는 스스로에게 위험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아들인가? 축복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아들이 되는 것은 나의 이 작은 자세에 달렸다.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들추어내고 들여다봐야 할 대상은 바로 ‘나’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건 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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