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부터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가 시작한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명령을 하셨다. 바로 익숙한 것으로부터 탈출하여 생소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떠나라!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명령이 오랜 세월 익숙한 자기 터전을 떠나라는 것이었다(1절).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은 매우 친숙한 곳이다. 태어나서 자라난 곳이며 그 사람 자신이다. 그런 곳을 떠나라는 것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탈출할 때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한 것이 오랫동안 앉아 있던 그 자리를 벗어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대를 이으며 정신적, 문화적으로 애굽에 익숙해졌을 때 그곳을 떠나도록 압박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를 분명히 하는 길은 그 익숙한 애굽을 떠나는 것이다. 매우 큰 장애물이 있음에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애굽을 벗어난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 중 그들이 보여준 잦은 과거회귀는 익숙한 것을 벗어던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틈만 나면 애굽에서 먹던 것을 추억하고 그 때로 돌아가자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멸하고 싶을 만큼 치명적인 금송아지 사건은 바로 애굽에서 오랜 세월 보아 익숙했던 우상이었다(출32장). 그리스도인들에게 ‘새사람을 입으라’는 권면은 익숙하던 것을 벗자는 말씀이다. 익숙한 과거로부터 탈출하는 것에서 새사람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한,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의 문제는 떠나지 않는 것에 있다. 여전히 세상의 줄을 놓지 않고 있다. 세상과 너무 친하다. 가라! 떠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했다(1절). 이미 보여준 땅이 아니다. 전혀 보지 못한 곳이다.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간다. 그것이 그 아브라함을 만들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 히브리 기자의 해석이다(히11:8). 익숙한 곳을 벗어나서 새로운 곳, 전혀 가보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곳이지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는 것은 놀라운 자기 혁명이다. 그것은 모험이며, 그래서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아울러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떠나지’도 못하고 ‘가는 것’은 더욱 못한다. 분명히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하늘에 속한 자의 삶도 없다. 계속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를 방황할 뿐이다. 떠난 것 같은데 떠나지 못했고 들어간 것 같은데 들어가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들을 이끌고 가야 할 교회의 리더십이 여전히 방황을 많이 하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며 세상과의 차별성도 없는 것이다. ‘가라’는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당시 종교인들에게 생소한 분이셨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지금의 교회가 정말 주님이 ‘가라’고 하신 그 곳에 있는 교회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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