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구원받은 성도의 감사 찬양/(사 12:1-5)

미션(cmc) 2011. 11. 30. 07:37

구원받은 성도의 감사 찬양
(사 12:1-5)

(사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사 12: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사 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사 12: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사 12: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오늘은 한 해 동안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와 가정과 범사에 베풀어 주신 영육간의 은혜에 대해서 특별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이 연례적인 행사로 그치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내면에 자리잡고 있어야만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추수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어떤 은혜가 감사하다고 생각이 됩니까? 입으로는 감사하다고 말은 하지만 가슴에 잘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우리는
1) 아무리 소중한 것도 소유하고 있을 때는 그 가치를 잘 알지 못하다가 막상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뒤늦게 아쉬워하는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는 육체보다 더 소중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육신적인 은총보다 영적으로 베풀어 주신 은혜가 더 소중한 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내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내 생각으로는 불행한 일 같아도 하나님은 미래에 그것을 통해서 내게 넘치는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불행처럼 보이는 오늘에만 집착을 할 경우에는 감사할 마음이 우러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거나 믿는 다고 하지만 어린아이와 같이 이기적인 믿음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불행으로 착각하고 불행으로 행복으로 오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깨달은 성도들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때, 비록 현실이 답답해 보일지라도 현실 너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왜 그와 같은 믿음이 필요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매일 매일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육신적인 필요가 충족되어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그와 더불어 영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져야만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우러나오게 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육신적인 행복에 대해서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소유한대로 느낄 수 있지만 영적인 행복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것을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적인 필요는 자연계시라고 하는 피조물에서 얻게 하셨고 영적인 필요는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얻게 하려고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을 하면 얻을 수 있게 하셨고, 영적인 필요는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순종할 때에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1. 그 날에
이사야 선지서에는 오늘 성경 본문 첫 절, 첫마디 ‘그 날’이라는 말씀이 무려 45 회나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주요한 시간 개념으로 일반적인 날과 차별화된 특별한 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인간은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지나가는 것만큼 죽음에 더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그 날’은 정반대로 그 날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되는 특별한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어가던 인생이 그 날부터 날마다 살게 되고 영원히 살게 되는 특별한 구원의 날입니다.
과연 ‘그 날’이 어떤 날이기에 죽어가는 자가 살게 되고, 죽은 자들이 영원히 살게 되는 구원의 날일까요?

1) 하나님의 징계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을 당했다가 다시 회복되어질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여기서 ‘그 날’은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될 구원의 날이고, ‘전에는’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아 각국에 흩어질 불행스러운 날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작정하신 ‘그 날’이 오게 되면 하나님이 그 진노를 푸시고 돌아서시겠다는 말씀이며, 진노대신에 위로를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심은 변함없는 사랑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설령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벌하시는 것일지라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그 진노를 통해서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훈계의 방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하심도 사랑의 매라는 것입니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조심해야 할 첫 번째는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과, 두 번째는 징계가 없는 자식은 사생아와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낙심하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잘못에 대해서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는 잠깐 뿐이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은 평생토록 지속되어지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 30: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2) 하나님의 자비
(사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가) 여기서 ‘돌아섰고’라는 말은 원래 상태로 회복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 성읍이 짓밟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산 사람들은 이방나라의 포로로 끌려가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온갖 고통을 겪던 자리에서 돌이켜 고국을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진노를 돌이키신다는 것만으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에서 건짐을 받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는 그것으로 다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백성들을 안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 여기서 ‘안위하시오니’라는 말은 ‘후회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인간적인 후회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진노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신 것을 ‘슬퍼하시고, 동정하시고, 위로하시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며, 당연히 받아야 할 진노를 받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진노 중에서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구체적인 위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포로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구원자이시며 위로자가 되시는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 앞장 이사야 1장에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

3) 예루살렘으로 귀환
오늘 성경에 ‘그 날에’라는 말은 그 메시아가 세상에 오시는 날을 가리키며 그 날에는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고,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시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그렇다면 이 예언의 말씀은 다 이루어졌을까요? 이 같이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대로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게, 남쪽 유다는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가 되어 자그만 치 칠십년의 기나긴 기간을 이방나라에 붙잡혀 있다고 마침내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일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 서입니다.
(느 7:6)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느 7:7)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물론 신기하게도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 예언의 말씀대로 바벨론에서 귀환을 하여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였습니다.
(느 12:27)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 있는 바벨론 땅에서 자그만 치 70 여년간 정착을 했던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수만 명의 남녀 노소가 노비와 가축까지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습니다.
(느 7:66) “온 회중의 합계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느 7:67) “그 외에 노비가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그들에게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사십오 명이 있었고” (느 7:68) “말이 칠백삼십육 마리요 노새가 이백사십오 마리요” (느 7:69) “낙타가 사백삼십오 마리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 마리였느니라”
그것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는 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이 도우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라 8:31)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혈통과 신분을 초월하여 만민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애굽과 같이 죄악과 고통과 죽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다가 때로 징계를 받는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도 자주자주 넘어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늘 성경 말씀처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돌이켜 구원하시고 수없이 위로해 주시며 늘 근심과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인생살이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2. 구원받은 성도의 책무
오늘 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진노를 돌이키시고 안위해주시며 구원해 주시는 주님께 구원받은 백성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무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1) 감사하라
(사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여기서 ‘감사’라는 말(hd:y)은 ‘던지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는 뜻의 미완료형으로 하나님께 대한 지속적인 감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 12: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노래한 가장 모범적인 시편을 손꼽는다면 당연히 시 136편으로 (시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로 시작해서, 마지막 (시 136:25)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씀까지 매절마다 ‘감사하라’는 말씀을 단 한절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감사는 추수감사를 뛰어 넘어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처럼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qevlhma)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원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일 년 동안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고 건강을 지켜주신 일반적인 은총도 감사한 일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먹이시고 영적으로 지켜주신 특별한 은총에 대해서 더욱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만 감사하는 하루살이 감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먹든지 마시든지, 돈을 벌든지 쓰든지, 열심히 일을 하든지 쉬든지,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모든 경우에 전 전후 감사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오늘 성경 말씀처럼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깃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마르지 않고 샘솟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 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여기서 ‘물’은 메마르고 척박한 팔레스틴 땅에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즐겨 활용되었던 말로, 신약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대낮에 물을 길러 나온 수가성 여인에게 물을 구원으로 상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오늘 이렇게 모여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은 이미 그와 같은 샘물을 날마다 퍼마시고 있는 사람들임을 깨닫고 그와 같은 은혜와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이해시키기 위해 눈에 보이는 사물로 대치해서 ‘마음이 꽃처럼 곱다, 산소처럼 순수하다, 대나무처럼 곧다’는 식으로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시되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신 분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이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예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성경을 볼 때 유형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로만 보지 말고 그 역사의 이면에 하나님의 계시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2) 만민 중에 알게 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구원하신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만민들에게 그 사실을 전파하여 그들도 여호아 하나님을 믿고 동일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만민 중에 알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 12: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사 12: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여기서 ‘행하심’(hl;yli[}(5949, 알릴라) )이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행하신 활동으로 일찍이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바벨론 포로 중에 구원하신 모든 일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의 역사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대속의 고난과 부활 사건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 세상에 전파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 9: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시 105:1)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것이 바로 가깝게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도하는 일이고, 멀리서는 복음을 선교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고, 하나님께서 지상에 ry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것에 인간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보다 더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것처럼, 무엇이 감사한가? 가 아니라 감사가 무엇인가? 하는 본질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 현실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경제가 잘 풀리고, 계획한 것들이 하나하나 다 이루어져 가고, 가정이나 사업이나 직장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순탄하기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각자가 다 나름대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문제들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업적으로 한 가지 이상은 다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난 한 해 동안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하면 감사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어느 해보다 시련을 많이 주셨다고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필요와 요구를 이미 다 아시며, 또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즉시 채워주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지 않으심에 대해서 때때로 불만과 불평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는 우리 인간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매사를 좀 부족하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채워 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행복은 아귀까지 다 채운 상태가 아니라 좀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 화
요즘 청소년들이 가장 되고 싶어하는 꿈이 한류의 붐을 일으키는 유명한 스타가 되고 운동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모든 년령 계층을 막론하고 인기 집중인 프로그램 중에 ‘나는 가수다’를 많이 시청하고 있습니다.
내노라 하는 유명한 가수들 가운데 유난히 키가 작고 평범한 외모를 가진 박정현이라는 가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고조되어 일약 고액의 출연료를 받고 심지어 모 화장품 CF 까지 찍었다는 소식을 다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가정에서 자라나면서 키가 작고 동양적인 눈매를 가지고 외모 때문에 미국에서 학창시절에 미국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잡아당기고 심지어 침을 뱉는 등 심한 인종차별을 겪으면서 학교에 가면 말 한마디 안하는 벙어리 소녀로 자랐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가 목회자가 되기를 기대하고 신학을 보냈지만 그의 꿈은 늘 가수가 되는 것이었고 가수가 되기 위해 무조건 한국 땅에 건너왔으나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국어를 잘 하지 못했고, 돈이 없어서 어느 때는 만원으로 한달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그의 작은 키가 열등감을 가져다주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작은 키 대문에 요정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놀림꺼리였던 그의 작은 동양적인 눈매 때문에 오히려 화장품 모델이 되었고, 불과 150센티에 불과 그의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귀여운 요정이라는 애칭을 붙여졌고 이제는 어디서든 당당하게 웃음을 잃지 않고 노래를 부르면서 ‘키가 작은 것이 감사하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대담에서 난 정말 가수로 데뷔하면서 얼굴로 밀면 안 되는 가수였기 때문에 옥심이 없었다고 말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실력을 높여야만 하였던 것이 오늘의 박정현이 되어 여러 방송과 CF를 출연하며 최고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기자가 박정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의 사전에 없는 유일한 단어는 Ingratitude(배은망덕)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마음이 그녀에게는 없었습니다. 무대에서도 길을 지나며 싸인을 요청하는 팬들에게도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자동차도 선물해드리고 이제 경제적으로도 부담 없는 꿈을 이룬 그녀에게 남은 것은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더 이상 어릴 적 놀림 받던 박정현도, 한국어를 못해 서러웠던 박정현도, 돈이 없어 만원으로 살아야 했던 박정현도 아닌 요정 박정현으로 우리 곁에 남아주기를 기대해 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마음이 유쾌해집니다. 몸이 가벼워집니다. 은혜가 흘러 들어옵니다.적절한 환경이 조성됩니다.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사랑과 능력이 생깁니다. 건강해집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고 부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전화위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드리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무엇이 가장 큰 불만입니까? 무엇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까? 이미 그 크고 놀라운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내가 볼 때는 불만스러운 그것이 감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에서는 얼마든지 행복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믿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