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잠시 잠깐 뿐인 인생/(욥 20:4-8)

미션(cmc) 2011. 11. 30. 07:39

잠시 잠깐 뿐인 인생
(욥 20:4-8)

(욥 20:4)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욥 20: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욥 20:6)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욥 20:7)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욥 20:8)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우리 모두 어린 시절 산수의 기본인 구구단을 암송하기 위해 수없이 반복해서 입으로 외우고 공책에 쓰는 일을 반복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영적인 구구단을 암송시켜 욥과 같이 예기치 못했던 위기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굳건하게 이겨나가게 하기 위해 반복학습을 시키시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우리의 믿음이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을 때는 나의 잘못으로 인해 당연히 받아야 할 고통을 마치 억울한 듯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할 때도 있습니다.

2) 그렇다면 까닭 없는 고난,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에 처하게 될 때 어찌 하나님 앞에 원망 불평을 하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믿음이 좋은 욥도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친구들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을 때 하나님은 묵묵히 듣고만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보다 조금도 선한 것이 없는 욥의 친구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욥보다 더 의로운 사람처럼 착각하고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욥의 말꼬리를 잡고 비난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책망이나 비난이나 정죄가 아니라 이해와 격려와 다독거리는 위로였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들이 욥의 변론을 듣는 중에 가장 나이 어린 나아마 사람 소발이 11장에 이어 욥을 위로하고 동정하기는커녕 자기중심의 편견을 가지고 욥을 반박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나아마 사람 소발이 하나님 앞에서 과연 무엇이 잘못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우리도 소발과 같은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1. 욥의 장단점
사람은 아무리 유능하다고 할지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버려야 할 점과 배워야 할 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서 버려야 점만 보면 비난하게 되고, 본 받아야 할 점만 보게 되면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욥과 같지 말아야 할 점
욥은 자신의 그와 같은 고통은 친구들의 잘못된 편견처럼 욥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그 지경을 만들어 놓으셨다고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분이 내 앞길을 막으시니 내가 어찌 길을 갈 수 있겠소. 그분이 내 가야 할 길을 어둠 속으로 숨겨 놓으시니 말이지. 내 재산도 모조리 가져가 버리셨어. 사람들한테서 듣던 명성도 다 그분이 무용지물이 되게 하셨다네. 그분이 사방에서 나를 마구 때리시니 이 몸 쓰러질 수밖에 더 있겠는가? 나무가 뿌리째 뽑히듯 내 희망도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네. 나에게 몹시 분통을 터뜨리시더군. 마치 원수 대하듯 말일세.”
욥은 심지어 하나님이 자기 주변에 형제이 자기를 버리고,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낯선 사람처럼, 친척들이 등을 돌리고, 친구들이 자기를 떠나버리게 하셨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줄지라도 자기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기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종들은 물로 아내와 형제들까지 자기를 몰인정하게 대하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같은 원망과 불평은 욥만이 아니라 오늘도 욥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욥처럼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와 같은 욥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욥과 같은 연약함을 깨닫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악한 마귀는 그와 같은 때를 놓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이라는 기름을 쏟아 붓고, 분노의 불을 지펴 우리의 신앙을 잿더미가 되게 합니다.
조금만 자세히 주변에 돌아보게 되면 개중에는 옛날에 지금 나보다 더 열심히 교회를 다녔었지만 그와 같은 시험과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욥에게서 배워야 할 점
그렇다면 욥은 어떤 점이 우리와 다를까요? 물론 욥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사람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끝내 하나님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욥이 한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평분자처럼 보였으나 결국에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믿음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네. 내 편 되셔서 나를 구해 주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결국 나를 감싸고 옹호하실 그분이 우뚝 땅에 서 계셔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사실 말일세. 이 병이 내 살가죽 다 뜯어먹은 뒤에라도 이 몸뚱어리로 나, 하나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 분명히 그분을 뵙고야 말리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그분을 뵙고야 말리라. 그분 뵙고자 내 마음 그리워 어찌할 줄 모르겠구나.”(욥 19:25-27)
바로 이점이 우리가 욥에게서 배워야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강한 바람 앞에서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 나무는 많지만 가지가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욥과 같은 고난 앞에서 끝까지 감사하며 티끌만큼도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아무런 일이 없이 평안할 때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큰 차이가 없거니와 욥과 같은 큰 환난의 바람이 불 때 원망하고 불평하기 쉽다는 점에서도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일시적으로 흔들렸다가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제자리가 바로 욥과 같이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그처럼 신뢰하셨는데도 실망스럽게도 친구들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에 대해서 즉각 반응을 보이시지 않고 침묵하고 기다리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만일 욥의 친구들이 정말 욥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일시적으로 흔들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어야만 옳았습니다.
‘그래 참 잘 생각했네. 그럼 세상에 믿을 이는 하나님 한 분 뿐이구 말구,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자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진실하게 믿었는지 하나님이 다 아실 것이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일세.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전화위복하게 하실 것이니 낙심하지 말게나, 희망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게나. 우리가 자네 곁에서 기도하고 있으니 힘을 내게나!’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나아마 사람 소발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향해 푸념을 하다가 돌이켜 하나님을 찾고 있는 욥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2. 소발의 문제점
욥은 자기 친구들의 한결 같은 비난에 실망한 나머지 반박하는 말을 지난 욥 19장에서 이렇게 푸념 한 적이 있습니다.
“자네들이 언제까지 내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할 작정인가? 언제까지 말로 내 마음을 찢어 놓을 셈인가? 그토록 계속해서 나를 꾸짖으며 마구 나무라면서도 부끄럽지 않은가?설령 내가 그렇게 잘못을 저질렀다해도 그 때문에 자네들에게 무슨 해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잖는가? 그것은 단지 나의 잘못일 뿐 아닌가 말일세(욥 19:2-4)”
1) 소발의 조급증
소발은 나이가 제일 어릴지라도 명석한 판단력과 논리정연한 말재주가 있었지만 자기를 지나치게 과신하는 자기 망상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발은 욥의 변론을 듣는 중에 욥의 생각이 자기의 생각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갈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욥 20: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 20:2)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여기서 ‘초조한 마음이’라는 말(#[is)은 ‘불일치, 나뉘어진 의견’이라는 이라는 뜻이고, ‘중신이 조급함’이라는 말(vWj)은 ‘재촉하다, 서두르다, 심하게 요동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소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사람과 나와 생각이 다를 때 내가 배워야 할 것이 없으면,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 대신 나의 생각은 옳고 상대방의 말은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조급한 생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을 하기 쉽습니다.

2) 소발의 자만
소발은 욥의 변론을 들으면서 욥이 왜 그러한 말을 하는지 저의(底意)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욥이 자기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책망을 한다고 오해를 하였습니다. 소발은 욥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욥보다 훨씬 더 의롭고 욥보다 더 슬기롭기 때문에 욥으로부터 책망이나 비난을 듣는다는 것은 자존심과 직결되는 일이라는 자가 당착에 빠졌습니다.
(욥 20:3)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여기서 '부끄럽게‘라는 말(hM;liK)은 ’모욕, 수치, 망신, 치욕‘이라는 뜻이고, ’슬기로운‘이라는 말(hn;yB)은 ’이해력, 통찰력‘이라는 뜻으로 소발은 자신이 욥보다 더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을 훈계하고 가르칠지언정 자기는 욥에게 훈계나 교훈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존귀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지만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못하게 여기고 잘난 체 하는 자만심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도 냉철하게 자신을 돌이켜 보는 일이 없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심에 빠져서 마구 지껄여 대기 쉽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 94:4)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3) 소발의 편견
욥은 동일한 상황을 놓고서 욥과 자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처럼 편견을 가지고 욥을 정죄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욥이 누렸던 부귀를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보지 않고 악인 누리는 일시적인 부귀로 매도 하였습니다.
(욥 20:4)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욥 20: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여기서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는 말(hn:n:r)은 악인 일시적으로 득세하여 큰소리를 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라는 말([g'r)은 흔히 '찰라‘라고 말하는 절박한 순간을 뜻하는 말로, “악인의 형통은 잠시뿐이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의 기쁨은 아주 잠시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다 거두어 가버리시기 때문에 꿈같이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는 욥이 일순간에 그 많은 부귀권세를 다 잃어버린 원인이 바로 악인의 삶, 경건하지 못한 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잠시 잠깐 후에는 몽땅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욥이 빈털터리가 된 근본 원인도 바로 욥이 악한 살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꿈처럼 환상처럼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욥 20:8)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그렇다면 소발의 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며 소발의 말처럼 악인에 부귀영화는 꿈같은 것이고,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잠시 잠깐 뿐일까요?

3. 인생의 양면성
소발의 말처럼 자기만을 위해 현세에만 집착하고, 탐욕에 사로잡혀 이웃을 괴롭히는 악인은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인과응보라는 단순논리를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적용할 경우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하면,
1) 가난하고 병들고 망각되고 박탈당한 사람들은 다 지은 죄 때문에 징벌을 받는 것이 됩니다.
2) 반대로 잘살고, 건강하고, 유명하고, 온갖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 선을 쌓았기에 보상을 받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될 경우 기득권을 가지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자기 합리화에 빠지고 정반대로, 가난하고 병들어서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는 죄책감과 열등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세상에서 고난 받는 사람은 다 죄 때문만은 아닌 것입니다.
인생은 동전의 양면이 다른 것처럼 양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면만 부각시키게 되면 당연히 본질과 다른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일평생 고난 받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일평생 부귀와 영화를 대대로 누리는 악인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인생의 양면을 보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소발은 악인의 삶만 잠시 잠깐이라고 한 것은 마치 의인의 한평생의 부귀영화는 마치 영원한 것처럼 편견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그러한 불공평한 세상을 보면서 한때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면서 그의 믿음이 흔들렸던 것을 시 73 편에 이렇게 탄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지시고 마음 깨끗한 이에게 어지신 분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하였다. 걸음을 잘못 걸어 넘어질 뻔하였다. 못돼 먹은 것들이 잘사는 꼴을 본 까닭이라. 그저 몸이 건강하니 살만 피둥피둥 저들은 고생이란 것도 모르지. 남들이 겪는 고생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남들이 겪는 어려움도 도무지 겪어 보질 않았지. 하여 저들은 교만을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고 폭력을 옷처럼 온몸에 두르고 다니지. 배불러 눈 아래 보이는게 없고 탐욕이 마음의 소원보다 더 크지. 저들은 남 욕하고 비웃기나 하며 높은 자리에 앉아서는 거들먹거리며 남 짓누를 계획이나 세우고 있지. 입을 마구 놀려 대어 하늘을 욕하고 혀를 날름거리며 땅을 우습게나 여기지. 그리하여 주님의 백성을 제 뒤나 뒤따르게 하고 제가하는 말이면 허튼 소리라도 귀 기울여 듣게 만들지.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 안담. 지존하시다 해도 어떻게 다 안담' 하니 보라, 이들이야말로 정말 못된 것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몸은 늘 편안하고 늘어가는 것은 재산뿐이니 마음을 늘 깨끗이 하고 작은 허물조차 없이하려고 내 손 씻어야 헛일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악인의 삶이 소발의 말처럼 단명하게 끝이 나는 사람도 있지만, 시편 73편의 기자가 본 것처럼, 의롭게 사는 사람보다 세상에서 더 부귀장수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의인이나 악인에게 공통점은 시편 90편에서 시편 기자 모세가 고백한 인생관처럼 ‘인생은 잠시 잠깐이다’ 라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마르는 풀입니다. 우리의 수명은 칠십 년, 힘이 있으면 팔십 년이지만, 인생은 고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날아가듯 인생은 빨리 지나갑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깨닫게 해 주소서.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신 날만큼 이제 우리에게 기쁨의 날들을 되돌려 주소서. 우리가 괴로워한 그 날만큼 우리가 즐거운 인생을 보내게 하소서.”
소발의 말처럼 악인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이 잠시 잠깐 뿐임을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여기서 ‘날아가나이다’라는 말이 오늘 성경 욥 20:8에 나오는 ‘사라지이다’ 라는 말고 같은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 소발은 마치 악인의 삶만이 잠시 잠깐 뿐인 것처럼 편견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인생의 한 평생은 악인의 삶을 살거나 의인의 삶을 살거나 잠시 잠깐 뿐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짧은 인생을 무엇을 위해 살다가 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불완전한 곳으로 악인과 의인의 심판이 정확하게 집행되고 있지 않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이 필요한 것이며, 다시 오시는 주님은 초림의 구세주와 달리 철장 권세를 가지고 심판주로 오셔서 의인과 악인 양과 염소를 정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결 론
오늘은 2011년을 마지막 한 달 앞둔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는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를 고민하여야 하는 년 말입니다. 이맘때면 누구나 입버릇처럼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참 세월 빠르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옛날에 비하면 모든 것들이 다 빨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빠른 자동차, 더 빠른 기차, 더 빠른 비행기, 더 빠른 우주선, 더 빠른 인터넷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속도 시대를 사노라면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가려는 욕망 때문에 늘 쫓기는 삶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보다 뒤쳐졌다는 생각에 그 사람을 앞지르려고 늘 뒤쫓는 삶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 공통점은 잠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긴장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무엇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기를 돌이켜 보는 자기 성찰의 기회를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남보다 앞서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면적으로 기쁨과 행복과 감사가 없는 불의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도시대를 살아나는 우리는 나는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빠른가? 하는 것보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옳은가? 하는 ‘자기 성찰의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인과응보처럼 생각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잠깐 뿐인 세상에서 그것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세상은 없습니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나 불합리하고 모순처럼 생각되는 세상에서도 말씀에 깊이 뿌리를 박고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잠시 잠깐 뿐인 세상이 끝이 나고 영원무궁한 새로운 미래에는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는 복을 빠짐이 없이 받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오늘 우리 모두 그 사실을 깨닫고 믿음과 사랑과 선을 씨 뿌리고 잡초와 같은 악을 뽑아 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음과 사랑과 선을 씨 뿌리고 잡초를 뽑아 버리는 삶이 어떤 것일까요?

1)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바른 길을 걷고 있는가를 말씀에 비취어 돌이켜 나의 잘못된 생각, 가치관, 행동, 습관을 부단히 궤도 수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서 깨달아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씀에서 벗어나 좌우로 치우치거나 뒤돌아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는 일에 보다 더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현세의 삶은 믿음과 사랑과 선을 씨를 뿌리고 가꾸는 삶이요, 죽음 이후의 삶은 그것을 거두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3) 오늘 성경의 소발처럼 조급함이나 편견에 젖어,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삶을 살지 말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정도를 뛰어넘어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