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그가 아시나니 /(욥 23:10-14)

미션(cmc) 2011. 12. 14. 19:08

그가 아시나니
(욥 23:10-14)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욥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 23: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욥 23: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여행을 하다가 보면 공항에서 안개나 비바람이나 눈보라로 인해 정시에 이착륙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기상이 좋아지기를 묵묵히 기다렸다가 예정시간보다 뒤늦게 이륙을 하게 되면 비행기가 먹구름을 차고 창공에 올랐을 때 이내 파란 하늘 아래 짙은 먹구름이 양탄자처럼 하늘을 뒤덮여 있기 때문에 태양을 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지 만물과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하는데 나의 삶을 뒤덮고 있는 고난의 먹구름에 가려서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을 살아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다고 해서 삶이 호전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다짐을 하고 하나님을 불러 보지만 답답하게도 묵묵부답인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녕 살아 계시다면 그처럼 절실하게 하나님을 찾는데도 하나님은 왜 묵묵부답하시는 것일까요?
그러나 낙심하지 말고 인내와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하게 되면 마침내 먹구름을 뚫고 창공에 오른 비행기처럼 마침내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을 통해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1. 욥의 반응
지난 주 우리는 욥기 22 장에서 욥의 친구 중 가장 연장자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 위로는 고사하고, 오히려 욥을 비난하는 나아마 사람 소발을 두둔하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욥 22: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욥 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종전과 달리 욥이 엘리바스에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욥은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자존심마저 후벼 파내는 엘리바스의 말에 왜 대응을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종종 주변 사람들이 서로 자신이 옳다고 하는 주장을 하면서 말싸움을 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서로 자기가 옳다지만 제 삼자인 내가 볼 때는 누가 옳은지는 별로 차이가 없고 마치 도토리 키 재기처럼 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더 들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싸움에는 승자는 없고 둘 다 패자가 되며 오히려 피차 마음만 상하고 관계만 나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문제는 욥처럼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은 고사하고 억울한 소리를 듣게 될 경우 대부분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사람에게 무 대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말처럼 말 같지 않은 소리에 구태여 마음을 상하면서까지 대응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자위하면서 무관심하게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때때로 그럴 필요가 있는 까닭은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 라는 속담처럼
대부분의 논쟁은 말이 많기 때문에 일어나기 때문에 말을 줄이면 그 만큼 논쟁에 휘말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는 옛말처럼 무슨 말을 하려면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흔히 사람들이 남의 처지를 잘 모르면서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잣대로 남에게 갔다대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처럼 말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약점을 가진 우리들에게 옛말보다 더 지혜로운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약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하는 말에 대해서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내가 왜 그런 말을 듣게 되었는지 자신을 성찰하면 보약이 되지만 맞대응을 하면 화가 됩니다.
만일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면 오늘 성경의 욥처럼 차라리 무시해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찾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간혹 욥의 경우처럼 상대방이 편견을 가지고 나를 판단을 하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회의감 때문에 사람이 싫어지면서 깊은 고독감에 휘말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과 맞대응하지 말고 욥처럼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 갈급하게 하나님을 찾는 방법입니다.
욥은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아 그 자신의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만나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기에게 대해 어찌하든지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을 만나 다 떨어 놓고 심은데 막상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욥 23: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욥 23: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여기서 ‘발견하고’라는 말은 ‘찾다, 얻다, 이루다’ 라는 뜻의 미완료 형입니다. 또 내 입에 ‘채우고’라는 말은 ‘가득차다, 충만하다’ 는 뜻으로 엘리바스에게 할 말이 없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입에 가득찼지만 그것을 하나님에게 호소하고 변론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고난에 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에 닥쳐서야 하나님을 찾고 그 뜻을 알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욥이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만 하늘을 덮은 먹구름처럼 그를 억누르는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얼마든지 욥과 같은 고난에 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에 닥쳐서야 하나님을 찾고 그 뜻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으려하지만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2. 욥의 믿음
오늘 말씀의 핵심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찾아야만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는 도식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마도 예수를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려움도 만났을 것이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욥처럼 하나님을 찾기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하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였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만나주신다는 말을 수 없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신구약 성경 여러 곳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만나주시고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욥은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들으실 것이고, 또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욥 23: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욥 23: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동쪽으로 가도 서쪽으로 가도,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욥을 만나주시거나, 기도에 응답을 해 주시지 않는다고 욥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욥 23: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욥 23: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여기서 ‘보이지 아니하며, 만날 수 없고, 뵈올 수 없구나’ 라는 말이 모두가 다 미완료형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버리고 떠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1) 아마도 나를 버리셨기 때문이거나, 2)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3) 하나님을 찾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지라도 욥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아시는 하나님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여기서 ‘내가 가는 길은’이라는 말(dM;[)은 ‘누구누구와 함께 가는 길’이라는 뜻으로 욥은 인생길이 혼자서가 아니며, ‘그가 아시나니’라는 말([d'y:)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친구들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죄함을 인정해 주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2) 연단하시는 하나님
또한 ‘단련하신 후’ 라는 말은 ‘검사하다, 시험하다, 입증하다’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이 믿음을 확인하실 때 사용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육체적인 연단이 목적이 아니라 마음을 연단하셔서 순금과 같이 정결한 마음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잠 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그와 같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를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고난 앞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 23: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여기서 ‘바로 따랐으며’라는 말(zj'a)은 ‘붙잡다, 꽉 움켜잡다, 연합하다’라는 뜻으로 인생 길에서 주님을 꽉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치우치지’ 라는 말(hf;n)은 ‘구부러지다, 기울이다’라는 뜻의 완료 동사로 지금까지 욥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입니다.
비록 욥이 그처럼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지만 만나주시지 않고, 응답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 누구나 신앙의 회의와 갈등의 가능성이 많은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나 욥은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시며, 나를 연단하시는 것은 나를 버리심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정금같이 연단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본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결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믿음이 건강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환난은 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익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준비된 믿음
우리가 생각할 때 욥과 같은 시련을 겪게 된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버리지 않고 적당히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욥은 어떻게 그처럼 흔들림이 없는 건강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욥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여기서 ‘어기지 아니하고’ 라는 말(vWm)은 ‘떠나다, 제거하다, 옮기다’라는 뜻으로 미완료 동사로 고난을 당하기 전부터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을 지라도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삶의 규정하는 법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아무 일이 없을 때 평안할 때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믿음의 훈련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신앙의 겨울을 이겨낼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마치 군인이 일선에 투입되기 전에 미리 혹독한 훈련을 받아 미리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것처럼 욥은 고난을 당했을 때만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기 전 평소에 믿음의 준비를 잘 하였기 때문입니다.
금년에도 강원도 지역에 폭설이 내려 고속도로와 산간 도로가 마비가 되었습니다. 눈이 올 것을 대비하지 않은 차량들이 추운 겨울날 도로 한 복판에서 자그만 치 네 시간 동안이나 고생을 하였다는 뉴스를 보았을 것입니다.
욥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평소에 준비된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3. 욥의 깨달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한 후에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고난의 먹구름에 덥혀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거나,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분별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욥은 막상 위기를 당했을 때마다 눈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심
욥은 자신이 처한 현실이 시시때때로 압박해 올지라도 그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욥 23: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여기서 뜻이 '일정하시니‘라는 말은 ’오직 하나‘라는 뜻입니다. 세상 풍조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도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믿을 사람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욥의 고백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그 뜻이 한결 같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어야 할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불가항력
욥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마음에 심한 갈등을 느끼고 하였습니다.
(욥 23: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이는 그렇게 믿음이 좋다는 욥도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청소년처럼 반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한 때는 그랬던 욥이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뜻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욥 23: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세상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길을 방해할 수 없고 그 뜻을 변경시킬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재자가 아닙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세상을 하나님은 사랑하시며 그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처럼 순수하고 의롭기 때문에 만사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통치하실지라도 항변하거나 거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신실하심
(욥 23: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이 하나님의 섭리를 잘 이해할 수 없어서 때로는 반항심을 가지고 항변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심과 절대 주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욥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욥 23: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여기서 ‘그를 두려워 하리라’는 말(dj'P)은 바로 다음 절에 나오는 (욥 23: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라는 말씀에 나오는 두려움이라는 말(lh'B)의 공포성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신앙적 두려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욥 23: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의 욥만이 아니라 때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몰라주신다고 생각할 때 낙심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그때도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지켜주시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하나님을 이해한 후에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불편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무조건 신뢰하게 됩니다.
예화
그 좋은 예가 바로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성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아시고 그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그 일을 하시지 못하도록 사단의 훼방과 그에 동조하는 많은 인간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계획의 완성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진정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만들어 영광스런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시련의 불에 던지시는 것입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주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4:4).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힘써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8:20), 사도 바울은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살후 2:15).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길을 굳게 붙들자. 또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고 그것을 묵상하며 힘써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