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요 1:9-14)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창조주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첫째날 빛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빛은 만물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빛을 인간들에게 늘 비추기 위해 넷째 날 태양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태양은 외부의 공급없이 창세 이래로 변함없이 빛을 발하여 만물이 존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화
겨울을 대비하여 사택 베란다에 흩어 놓았던 화초들을 거실과 방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초들 중에 고무나무가 유난히 햇빛에 민감한데 햇살이 비추는 쪽에 가지는 겨울에도 왕성하게 자라지만 반대 편 그늘쪽에 있는 가지는 자라지 않고 심지어 잎이 고사되어 떨어지기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방 중에 하나는 햇빛이 차단된 지하 독 감방입니다. 그러한 감옥에 오래 방치하게 되면 우울증에 걸려 사람이 이상해지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모든 생명체를 생존하게 하는 근원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는 유형적인 태양 빛만이 아니라 그 빛을 지으신 참 빛이신 하나님이 절대로 필요한 영적인 존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하신 참 빛이시기 때문에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햇볕과 같은 하나님의 따스한 사랑과 밝은 빛과 같은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시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
다”
인간이 하나님을 불신함으로 그 빛을 잃어 버림으로 인간에게는 흑암과 같은 탐욕과 고통과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며, 어느 길로 가는 것이 행복의 길인지 알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헤매이다가 결국 영원한 어둠인 나라로 떨어져 버리게 되는 가련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은 한낮에는 밝은 태양 빛 아래, 한 밤에는 밝은 전등 불 아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연구하고, 돈을 벌지만 결국 영원한 죽음의 길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에는 태양빛이나 전등불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시 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왜냐하면 하나님은 태양 빛만을 만드신 하나님이 아니시라 우리 인생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생명의 빛도 지으시는 하나님으로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1.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구약 시대에 지구상에 여러 나라와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믿은 백성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 뿐 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시 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까닭은 강대국이기 때문이거나 민족성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연약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길은 주변 열강보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길이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행복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사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시고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세상 만민 가운데서 택하셨음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신앙의 선진들이 기도할 때 우리를 천에 하나 만에 하나에서 택하셨다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나를 택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역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고통과 죽음과 불행에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만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행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행복의 길을 마치 지도책처럼 소상하게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 오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 오경의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은 그 성경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두움 가운데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빛을 주목하고 그 빛이 인도하는 대로 아멘하며 순종하는 삶이 마치 밝은 대낮에 길을 가는 것처럼 행복으로 가는 밝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빛되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아무리 행복하려고 노력하고 발 버둥을 친다고 할지라도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신 28: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의 길을 가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처럼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한 겨울에 정전을 만난 사람들처럼 고난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당시 인생들의 비참한 형편이었습니다.
1) 나라를 잃고 주권이 없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2) 참으로 가난하게 살아가야만 하였습니다.
3) 무엇보다 내일에는 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어두움 속에서 헤매이는 사람들처럼 비참한 삶을 살고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가 대신 고통과 죽음의 짐을 대신 져줄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으며 세례 요한은 그 예수님을 가리켜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오늘 성경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한 말씀처럼 참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신 참 빛일까요?
2. 상반된 두 가지 반응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들 나름대로 어두움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인도하는 빛으로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은 백성들에게 자유와 구원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율법의 굴레를 씌워 더더욱 종노릇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 사도 요한은 죄악의 어두움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참 빛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오늘 성경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여기서 ‘참 빛’이라는 말은 거짓된 빛과 달리 세상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베들레헴에서 선교센터 건축에 수고를 하고 계시는 강태윤 선교사님이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는 베들레헴의 거리 크리스마스 장식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보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코 큰 별이었습니다. 물론 그 별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동방박사들에게 알리기 위해 밤하늘에 유난히 빛났던 그 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머나먼 동방에서 산을 넘어 들을 지나 강을 건너 힘들게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의 왕 헤롯에게 찾아가서 자기들이 머나 먼 동방에서 예루살렘에까지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동방박사들은 헤롯의 일당이 가르쳐 주는 대로 베들레헴을 향해 가다가 문득 나타난 큰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 2: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이 머나 먼 동방 땅에서 어떻게 정확하게 예루살렘에까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마치 네비게이션처럼 안내한 것은 별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태양이 없는 어두운 밤에도 그 머나 먼 길을 걸어서 어떻게 베들레헴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어두운 밤에만 행군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별이 상징하는 것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가 바로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이 동방박사들을 안내한 것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1) 각 사람을 비추는 빛
그러나 동방박사가 본 별과 오늘 성경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참 빛과의 다른 점은 별은 아무리 빛나도 혼자서만 빛나고 있을 뿐이지 각 사람을 비췰 수가 없지만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참 빛은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여기서 ‘각 사람’이라는 말은 온갖 계층의 모든 사람을 밝게 비추어 가르치고 알리는 빛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는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어느 민족이나 단체에게 집 단적으로 구원을 주시는 빛이 아니라, 혈통이나 계층이나 신분이나 소유의 차별이 없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비추는 빛으로 개인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2) 머무시는 빛
그 빛은 어두운 밤 해변 가를 스쳐 지나가는 서치라이트와 같이 잠시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빛이 아니라 어두운 세상에 머물러 계심으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여기서 ‘세상에 계셨으며’ 라는 말은 미완료 상태로 계속해서 머무시는 것을 뜻하며, 그 세상은 전혀 생소한 곳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친히 지으신 피조물인 세상에 창조주로 친히 오셔서 머무신다는 것입니다.
3) 두 가지 반응
그렇다면 어두움에 처한 세상은 자기를 지으신 분이 어두움에서 건져내기 위해 빛으로 세상에 오시는 창조자를 반갑고 기쁘게 영접하고 환영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가) 거부하는 백성들
하나는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창조주를 거부하는 부정적인 다수의 세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반갑게 영접해야 할 자기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도리 거부하는 다수의 백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서 ‘영접하지 아니’라는 말은 받아드리지 아니하였다는 말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의 소식을 유대인의 왕 헤롯에게 알렸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헤롯의 일당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겉으로는 반가운 척 하면서 실제로는 군대를 풀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끔찍한 일에서부터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나) 영접하는 사람들
정반대로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영접하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생애를 관찰하게 되면 가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웃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수의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수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요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요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그와 같은 상반된 반응은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에 이르도록 지난 이천 여년의 세월 동안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두움에 처한 인생들에게 전파되어 각 사람에게 비춰지는 곳마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으로 오셨는데 어두움에서 갈 바를 몰라 어찌할 줄 모르면서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다수의 무리들과 영접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마치 운동회 때 청군과 백군처럼,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처럼 갈라지고 있습니다.
3. 영접하는 자가 받는 복
우리가 성탄절을 기리며 기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탄절이 바로 동방박사들에게 비추던 빛나는 별처럼 죄악으로 죽음과 고통이 짓누르고 있는 어두운 세상을 몰아내기 위해 참 빛이신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가? 영접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믿지 않고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인가 저주인가가 명확하게 갈라지는 축복의 분수령인 것입니다.
1) 영접의 의미
그렇다면 참 빛으로 어두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약속되어 있나요?
여기서 ‘축복’이라는 말은 한자로 복을 빈다는 동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부귀권세의 일반적인 복과 차별화된 특별한 복을 지칭하는 명사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어두운 죄악 세상에서 구원하실 자로 믿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믿는 자’라는 말은 ‘순종하다, 위탁하다, 신임하다, 신뢰하다, 의지하다’는 뜻으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그저 교회를 다니는 정도가 그리스도에게 나의 전 삶과 생명을 위탁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사람의 뜻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영원불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나의 의지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영원불변토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2) 받는 복
육신적으로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가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일평생 수고한 것만도 감사한데 평생 수고하여 모든 재산까지 아낌없이 다 물려주고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생전에 가난하여 빈털터리라면 자식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물려 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부모가 생존 시에는 자식에게 복을 줄 수 있어도 사후에는 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한한 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이미 받은 복과 또한 받게 될 무한하고 영원한 복이 오늘 성경에 약속되어져 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은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영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속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실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만 마치 천사처럼 일순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신 것이라는 주장을 뒤집어엎는 말씀입니다.
영원하신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아기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최대의 축복, 최상의 복은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시고 영접하는 순간부터 영원토록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 상주하시는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축복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복으로 은혜 중에 은혜요, 영광중에 영광이요, 복 중에 최상의 축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와 같은 은혜와 진리는 구약 시대 성도들처럼 율법을 지킴으로는 얻어질 수 없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 중에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은혜를 충만히 받게 하시기 위해 아기 예수로 세상에 오셨고 육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받게 되는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크고 영원한 복이 없습니다.
미국이 최대의 채권국임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미국을 선호하는지 아십니까? 계 무역하는 사람들이 달러로 결재를 하고 미국은 그 달러를 무한정으로 찍어 세계에 공급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토록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왜 최상의 복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만물을 지으신 이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 이요, 오늘 성경 말씀처럼 참 빛이시고, 생명이시고, 복의 근원이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다니지 않게 되고, 죽음이 해결되고, 만복을 누리며, 참 자유 함을 영원토록 누리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노력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앞에 아무런 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은혜 중에 은혜이며 복중에 큰 복인 것입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이 불과 한 주간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마치 지금의 북한 사람들처럼 빛을 잃어버린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서 내일에 희망이 없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나름대로 빛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종교입니다. 학문입니다. 경제입니다. 정치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발달됨으로 인해 때로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와 같은 것들을 가리켜 참 빛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달하고 지식이 발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엄연한 현실인 죄악과 고통과 죽음의 어둠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돈만 있으면, 공부만 잘하면, 출세하기만 하면 마치 빛 가운데 사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탐욕과 죄악과 불안과 고통과 죽음과 같은 어두움을 몰아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빛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참 빛이 필요합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화를 안 내려고 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하고,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내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는 본래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내 양심은 마치 불 꺼진 등대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빛이 내안에 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금번 성탄절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의 마음과 가정과 직장과 사업터에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를 짓눌렀던 어두움을 몰아내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그분의 빛의 옷을 입고 이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과거에는 우리의 마음이 어둠에 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주께서 주시는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삶으로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이 빛을 간직한 우리는 선한 일과 옳은 일과 진실한 일만을 하여야 합니다. 내가 과연 어떤 생활을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그러므로 금번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날이 아니라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빛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영접하여 내가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자녀로 변화되어지는 복된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그동안 어두웠던 나의 마음, 우리 가정이 밝아지고, 이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환하게 밝아지는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추리를 무엇보다 내 어두운 마음에 밝히는 아름다운 성탄절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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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성탄의 증인들 /(눅 2:15-20) (0) | 2011.12.26 |
그가 아시나니 /(욥 23:10-14) (0) | 2011.12.14 |
화목하려면 /(욥 22:21-30) (0) | 2011.12.08 |
잠시 잠깐 뿐인 인생/(욥 20:4-8) (0) | 2011.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