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첫 성탄의 증인들 /(눅 2:15-20)

미션(cmc) 2011. 12. 26. 09:23

첫 성탄의 증인들
(눅 2:15-20)


(눅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눅 2: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눅 2: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눅 2: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눅 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눅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우리는 지금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주일과 더불어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 땅은 어떠할까요?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하는 무신론 공산주의 체재 하에서 마치 선장을 잃은 것처럼 지도자를 잃고, 고질적인 식량난으로 탈북자가 속출하는 극한 상태에서 어떻게 한 겨울을 넘길 것인가?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 화
미국 자유 아시아방송(RFA)은 “북한의 식량난으로 몇 개월 내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기 시작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말하며, 덴마크 비정부기구 ‘미션 이스트’의 피터 드러몬드 스미스 사업국장이 “외부 식량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전망에 동의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그 사실을 남한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에서 잘 알면서도 왜 식량 원조를 중단했을까요?
그것은 식량을 원조하면 그것이 인민들에게 골고루 배급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량미나 아니면 고위층들에 의해 빼돌려진다는 불신감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북한의 군사력 증강과 핵무기개발을 부추기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과연 북한을 도와야 할 것인가? 돕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갈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북한 당국이 남한이나 서방으로부터 지원받는 식량이나 원조를 전량 북한 주민들에게 분배만 한다면 어느 누구보다 북한 돕는 일에 우리 국민이 발 벗고 나설 것이고 그 때문에 북한의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 북한에 필요한 것은 육신의 식량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떡인 복음이 전파되어져서 사람들이 영육 간에 구원을 받아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고, 인간 우상화가 종식되고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날이 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이 올 때마다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혼자서만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소식을 널리 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고 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러므로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누군가에 의해 널리 세상에 전파되어져야 한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시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충성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 약속의 땅 베들레헴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것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 일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출생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구약 성경 여러 곳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민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얼핏 생각하면 얼마나 좋은 곳일까? 하는 호기심도 발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이 왜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땅은 기후 조건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비가 가장 많이 오는 1월부터 2월까지를 겨울이라고 부르고, 가장 뜨거운 7월부터 9월까지를 여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기후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한서의 차가 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낮의 기온은 섭씨 40도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스웨터를 입어도 추위를 느낄 만큼 기온이 낮아집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는 추위와 더위의 격차가 매우 큰 기후 속에서 주야로 돌보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 121: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나라는 400여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마치 아주 버림을 받은 것처럼 로마 식민지로 온갖 고통을 겪고 있으나 여호와 하나님은 시종일관 침묵만을 지키셨습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땅은 정말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땅이었을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의 영광은 말짱 헛것이 되고 말았단 말입니까?
예 화
중동지방이 겉으로 보기에는 삭막한 사막지대 같지만 그러나 땅속에 어마어마한 석유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에 중동나라들이 거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 년 내내 무더운 사막이지만 높이 62m, 길이 400m 슬로프, 다양한 난이도의 코스 5개를 갖춘 면적 3000m²로 세계 3위의 규모의 실내 스키장은 일년 내내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두바이 시내에서 약 30분정도 아부다비 쪽으로 자동차로 달려 가면 파아란 잔디가 덮여있고,. 제법 큰 해저드도 있는 18홀 골프장이 있는데 얼마전에는 이곳에서 세계 여성 PGA 시합을 했을 정도입니다. 물론 기름을 팔아 만든 경기장들입니다. 그 기름은 황량한 사막 벌판 땅 아래 깊숙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척박한 땅이었지만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까닭은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오래 전부터 간직되어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와 하란 땅에서 낯선 땅 가나안으로 불러내신 후 그 땅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 설령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신다고 한들 축복의 땅으로 보기에는 너무 모자람이 많은 땅이었습니다.
주변은 전쟁에 능한 나라들로 포위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에게 수없이 침략을 당하여야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마침내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의 침략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영원한 기업이 되겠다고 하신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일까요?
(출 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거나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사람이 젖과 꿀이 흐르는 오아시스 곁에다 화려한 별장을 짓고 한 평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다가 아님은 반드시 그에게 찾아오는 마음에 근심과 질병과 고통과 죽음을 무엇으로 막아낼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젖과 꿀이 충족되어져야만 행복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 가운데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변두리 베들레헴 땅을 영원한 생수의 발원지로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엘선지를 통해서 약속하신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의 탄생지를 베들레헴이라고 일찍이 못 박아 놓으신 것입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첫 성탄 때에 멀리 동방에서 박사들이 머나먼 길을 오로지 하늘에 한 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서 오다가 보니 예루살렘 성 헤롯 왕궁에 이르러 헤롯왕에 묻기를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태어났는가? 를 질문하였을 때 당황한 헤롯왕이 제사장과 서기관과 지혜자들을 불러 모아 성경에서 찾아 낸 곳이 바로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마 2: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땅은 비록 겉보기에는 척박한 땅이었으나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탄생하기로 약속된 변함없이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비단 땅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일평생을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천사처럼 거룩하게 영웅처럼 위대하게 존경과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그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겉 사람 육체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내면에 간직하고 사는가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가치를 높이는 삶의 비결은 질 그릇같은 내 안에 영원한 보화를 담은 보석함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바로 존귀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내 안에 영접하는 삶으로 아기 예수가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2. 축복의 땅 베들레헴
세월이 점점 흘러갈수록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하신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하였습니다. 내일에 대한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지도자가 바뀌면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걸기도 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하고, 독재가 물러가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하지만 그 기대는 번번이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정치제도나 지도자의 교체나 정책이나 시스템의 변화나 경제 성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사람들은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바라는 행복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은 태양 빛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달빛에서는 일부만 보이고 등불도 없는 깊은 산골에서는 마치 하늘에 눈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수많은 별들과 긴 은하수강이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오래전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야는 오시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이 점점 더 가중되어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으며 도움을 구하고 약속하신 메시아를 대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바로 그 분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특별하고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이 바로 나사렛의 목수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아기 예수가 잉태된 것입니다.
약혼자 요셉은 물론 장본인 마리아 자신도 믿을 수 없기에 천사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따지듯이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를 보면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한 것은 결코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믿음 없는 마리아를 내치지 않으시고 그것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 같으나 능치 못함이 없으신 성령 다시 말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이 마리아를 감싸심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였을 때 아기 예수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해산 일이 가까워 오고 있지만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는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기 예수를 나사렛에서 해산할 가능성이 제일 많았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디서 낳든지 아기 예수를 해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만일 그렇게 되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위급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되었을까요? 마침 그때에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무슨 연고인지는 몰라도 로마 제국 치하 각 나라 백성들의 인구 조사를 위해서 호적령을 내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자기 고향에 가서 호적을 만들어야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로마 황제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중에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도 만삭된 마리아를 나귀 위에 태워서 베들레헴 땅으로 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마다 호적을 하기 위해 자기 고향으로 잠시 이거하는 가운데 요셉과 마리아도 부득불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믿음의 사람만 쓰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우구스도 같은 불신자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결국 아기 예수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정확하게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게 된 것입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여기서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떡이라는 말과 집이라는 말의 합성어로 ‘떡집’이라는 뜻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는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가 되었으니 영적인 떡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작을지라도’ 라는 말은 작다는 뜻만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미미한’이라는 뜻으로 베들레헴의 외형이 그렇지만 그로 인해 베들레헴은 예루살렘과 같은 거대한 성전도 없는 작은 시골이었지만 그곳에서 다윗이 고향이고 그 곳에서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곳이기 때문에 결코 작지 아니한 동네 가고 오는 역사 속에서 유명한 성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 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는 말은 ‘주권을 잡다, 지배권을 가지다’ 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를 뜻하는데 이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통치자 다윗이 출생을 하였고, 이곳에서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가고오는 역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으니 베들레헴은 결코 보잘 것 없는 동네가 아니라 세계 어느 도시보다 유명한 동네가 되어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되었으니 복된 땅 베들레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아름다운 발걸음의 목자들
아담의 죄로 인해서 고통과 죽음과 심판이라는 세 가지 재앙에서 허덕이는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성탄의 소식은 인류 최대의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그 것을 불신하고, 거부하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성탄절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죄악과 고통과 죽음이라는 무기로 통치하고 있는 사단은 마치 길목을 지키고 있는 사냥꾼처럼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저지하고, 죽이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하수인이 바로 헤롯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로마 황제 가이사 아우구스를 동원하여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게 하심으로 헤롯의 칼날에서 비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그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만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를 동원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하늘에 있는 천군과 천사를 동원하여 그 사실을 제일 먼저 베들레헴 들판에서 다윗이 어렸을 때처럼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알려 준 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여기서 ‘그 지역’이란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베들레헴 마구간과 인접한 장소를 뜻하는 것입니다. ‘양 떼를 지키더니’ 라는 말은 옛날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이 아버지의 명을 따라 형들을 문안하려고 전쟁터에 나아갔다가 사울 왕에게 자기를 소개하던 장면을 기억하면 잘 이해가 할 수 있습니다.
(삼상 17:34) “그러나 다윗이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왕의 종인 저는 내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키던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서 양을 물어 가면,” (삼상 17:35) “저는 그놈을 공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 냈습니다. 그놈이 저를 공격하면, 저는 그놈의 턱을 잡고 때려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야 말로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맹수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목자 잃은 양떼와 같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한 목자로 이 세상에 오시는 아기 예수의 사역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의 탄생의 소식을 제일 먼저 그와 같은 목자들에게 보내어 전하게 하셨습니다.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여기서 ‘주의 사자’라는 말과 ‘천사’라는 말(a[ggelo")은 ‘복수’가 아니라 원어에는 모두가 다 ‘단수’입니다.
이 천사는 일찍이 마리아와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의 수태 소식을 전하였던 가브리엘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눅 1: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사람들이 보기에 목자라는 직업은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천직이기 때문에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기 쉬우나 나중에 그들의 고백과 하는 행동을 살펴보면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목자들 주변에 갑자기 주의 사자인 천사가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두루 비추었다면 얼마나 겁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그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영광으로 1)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나타났고 2)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고 3) 성막이나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들에게 나타났고 4) 후에는 변화산에서 세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인 영광으로 목자들이 압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영광이 오늘 날에는 남종과 여종에게 아이와 어른에게 차별하지 않고 물 붓듯이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인 것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하나님께서 목자들에게 그와 같이 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목자들을 통해서 성탄하신 아기 예수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그 기쁜 소식을 널리 세상에 전하는 증인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제일 먼저 목자들에게 전하여 준 것입니다.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여기서 ‘아기를 보라’고 천사가 명령하지 않고 ‘아기를 보리니’라고 한 말은 ‘찾다, 발견하다’라는 뜻의 능동태로 우연을 배제하는 말로 천사들이 시켜서가 아니라 목자들이 자발적으로 찾아가서 아기 예수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 날에 베들레헴 동네에 다른 아기들도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생일이 같다고 해서 다 쌍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라고 해서 모두 다 메시아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이신가를 구별하는 증표가 바로 강보에 싸여 짐승의 밥통인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는 아기 예수는 헤롯 왕궁에서 태어나는 왕자처럼 화려함과 외적인 영광에 둘러싸인 분이 아니라, 누구도 그렇게 태어난 적이 없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 예수는 그 때문에 오히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왕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날 시끌벅적한 도심의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의 탄생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분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천사가 이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였을 때 그 천사를 호위하였던 수많은 천군이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전한 천사와 더불어 일제히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눅 2: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여기서 ‘수많은 천군’은 복수이지만, 우리 말 성경에 기록된 ‘그 천사들’은 성경 원어에는 단수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해 준 ‘그 천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의 출생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만큼 온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수 없는 유일무이한 탄생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떠나간 후에 예상했던 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보기 위해 빨리 들판을 떠나 동네로 향하였습니다.
(눅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눅 2: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여기서 ‘빨리 가서’라는 말은 ‘서둘다, 노력하다’라는 뜻이고 ‘아기를 찾아서’라는 말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수색하다, 찾다’라는 뜻으로 아마도 샅샅이 집집마다 찾아다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되는 말입니다.
지금도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다는 베들레헴을 방문하게 되면 그곳이 짐승을 키우는 지하 동굴이었음을 볼 때 목자들이 얼마나 수고하여 아기 예수를 발견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람들이 꾸며낸 소설이 아니라, 아무런 욕심이 없는 목자들이 친히 목격한 사실임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눅 2: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눅 2: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여기서 ‘말한 것을 전하니’라는 말(gnwrivzw)은 자기들이 천사에게 들은 것과 자기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일치하는 사실을 마리아와 요셉과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명쾌하게 알리는 증인 노릇을 하여 아기 예수 주변의 사람들과 마리아를 더욱 경탄하고 확신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눅 2: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눅 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첫 성탄의 증인인 목자들은 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들이 듣고 본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양떼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눅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여기서 목자들이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라는 말( doxavzonte", aijnou'nte")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다시 일상 목자의 생활로 돌아가서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사는 경건한 삶을 살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의 소식을 널리 전하는 증인으로 특정 계층의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인류의 죄와 고통과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널리 세상에 전하는 증인으로 갈릴리의 어부들을 증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서쪽 끝에서 일어난 아기 예수의 성탄의 소식이 동쪽 끝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비롯하여 십자가와 부활의 기쁜 소식은 누군가에 의해 온 세상으로 널리 퍼져 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 일을 위해 남녀노소 유무식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처럼 구원얻은 성도들은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면 땅 끝까지라도 가서 목자들처럼 내가 듣고 보고 체험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동네마다 교회들이 차고 넘치고 전도지가 휴지처럼 땅에 버려져 굴러다니고 있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이지만 마치 사람들이 헤롯왕처럼 그리스도를 거부할지라도 아직도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나라와 종족과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수원제일교회를 그 일을 위해 세우셨고 우리들을 그 일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목자들은 천한 직업이었지만 선한 목자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지금도 온 세상에 알리는 증인으로써 존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목자처럼 존귀하게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그 증인의 사명을 어떤 식으로 감당해야 할지 곰곰이 기도하며 깨우쳐 주시는 대로 미루지 말고 목자들처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결단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나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목자들처럼 내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북한 땅에 멀리 아프리카와 온 세상에 이 시대의 증인들인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일에 기도로 물질로 최선의 협력을 다하는 이 시대의 목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일은 반드시 신학을 가야하고 선교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성경에 선한 목자들처럼 삶의 현장에서 부르심을 받고 삶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삶을 죽을 때까지 쉬지 않는 목자들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