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화목하려면 /(욥 22:21-30)

미션(cmc) 2011. 12. 8. 08:13

화목하려면
(욥 22:21-30)

“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24”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26”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29”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30”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만일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지게 되면 4년 안에 인간도 멸종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꿀벌이 돌아다니면서 꽃을 수정해 주지 않으면 식물군이 대 혼란에 빠져 멸종하게 되기 때문에 동물들도 따라서 멸종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미국 캐나다 남미 유럽 등 지구촌 곳곳에서 원인도 모른 채 꿀벌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작년부터 전국적으로 토종벌과 꿀벌들이 괴질에 걸려 초토화 되면서 양봉농가들이 큰 타격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 괴질의 이름은 꿀벌의 애벌레가 뚱뚱 부어오르면서 죽게 되는 낭충봉아 부패 병이라는 바이러스성 질병으로 전국적으로 토종벌의 76.7% 가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답게 피었어도 벌이 벌이나 나비가 이 꽃 저 꽃을 옮겨 다니면서 수정을 해 주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열매를 맺지 않으면 동물도 인간도 생존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도 그와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똑똑 할지라도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으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 잘 살겠다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불화하고 돈과 권력에 얽매어 하나님과 단절하는 삶을 사는 것은 결국 자기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 화목의 필요성에 대해서 누구나 다 공감을 하지만 왜 화목한 삶을 살지 못하는지 그 원인과 화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이웃과의 화목
우리가 매 주일 욥기를 상고하는 가운데 욥기 21장에서 욥의 친구 중에 제일 나이 어린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게 하나님께서 악인은 반드시 벌하신다고 하면서, 욥이 당하는 고통을 빗대어 악인의 형통은 잠시 뿐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욥은 그 소리를 듣고 잠잠히 있지 않고 현실은 나아마 사람 빌닷의 말과 달리
1) 악인이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고
2) 그 후손들이 굳게 서고
3)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4) 가축들이 번성하고
5) 그와 자녀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행복하게 보내다가
6) 스올에 내려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를 되물었습니다.
(욥 21: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욥 21:8)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욥은 그것만이 이해하기 어려운 양극단적인 인간 생활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질문을 하였습니다.
(욥 21:23)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욥 21:25)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1) 어떤 사람은 살아생전 힘이 팔팔하며 도무지 걱정이란 걸 모르고 평안하며, 먹을 것이 곳간마다 가득하여 배 두드리고 뼈 마디마디에 힘이 솟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욥 21:23)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2) 어떤 사람은 쓰린 가슴 부여안고 도무지 행복이란 걸 맛보지도 못하며 그렇게 고생하며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어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욥 21:25)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3) 이처럼 사람들이 세상에서 상반된 삶을 살지만 결국은 죽어서 똑같이 무덤에 묻히게 되고, 구더기가 그 몸을 뒤덮고 만다는 것입니다.
(욥 21:26)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욥은 친구들이 자기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깊은 생각 없이 일방적으로 하는 말은 헛된 위로요 거짓말이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욥 21:34)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
오늘 성경 욥 22장 말씀은 그와 같은 욥의 반론을 듣고 있던 제일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서 욥의 말에 일이가 있다고 말하는 대신 궁지에 몰린 나아마 사람 소발을 지원하기 위해 매우 강한 어조로 욥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욥 22: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욥 22: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1)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고 또 정의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하나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욥 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그러나 욥은 엘리바스의 말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의롭게 산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욥이 지혜롭고 의롭게 살았다면 엘리바스는 욥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칭찬했어야만 친구로써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바스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라고 비난하였습니다.

2) 엘리바스는 욥이 무죄함을 주장하자 욥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욥의 죄가 크고 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욥 22: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뿐만 아니라 엘리바스는 욥이 지은 죄라고 하면서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욥 22:6-29)
가) 욥이 까닭없이 친족의 재산을 압류하고 빼앗아 헐벗게 만들었고
나)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과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다) 권세와 지위를 이용하여 땅을 차지하고 거들먹거리며 살았고
라) 과부들과 고아들을 혹사하고 학대하는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당한 담보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동시에 형제를 학대한 것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출 22:22-26)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봄으로써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약 1:27)
만일 욥이 그렇게 죄를 지었다면 불꽃 같은 눈으로 인간의 행위는 물론 폐부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가리켜 ‘욥처럼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는 칭찬을 하실 이가 없는 것입니다.
(욥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설령 욥이 그처럼 악하게 살았다면 그것은 하루 이틀 한 일이 아니라 평소에 일상적인 삶을 뜻하는 것으로 엘리바스가 욥의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아야만 알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가 무슨 근거로 욥이 마치 악한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팜이 홍수처럼 욥을 덮는다는 험담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욥 1:8) ”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엘리바스는 멀리서 찾아 온 친구로 욥의 평소 생활을 지켜 볼 수 없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1) 어느 누군가가 욥을 모함하는 소리를 솔깃하게 듣고 그대로 옮겼거나,
2) 아니면 당시 부자들이 흔히 범하는 죄악들을 욥도 범했을 것이라는 추측성 발언을 지어서 발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엘리바스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엘리바스가 욥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한 것일까요?
물론 엘리바스는 누구보다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궁지에 몰리고 욥이 지나치게 자기를 의롭다고 하는 말에 자존심이 상하게 되자 욥을 극악한 죄인으로 몰아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내면에 잔재되어 있는 죄악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마치 본 것처럼 만들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의 진실한 친구였다면 설령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뒤늦게 비난 할 것이 아니라, 사전에 바른 말을 해서 욥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서로 화목하게 살아가라고 내게 붙여준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화목합니까? 오히려 남보다 더 못한 사이처럼 비난하고 험담하고 모함하는 불편한 관계가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엘리바스처럼 이웃의 잘하는 것을 칭찬대신 시기하고, 이웃이 잘못하는 것은 험담과 비난을 즐겨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2. 하나님과의 화목
엘리바스는 욥의 불행에 대한 근본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 되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욥을 충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엘리바스처럼 이웃의 잘하는 것을 칭찬대신 시기하고, 이웃이 잘못하는 것은 험담과 비난을 즐겨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엘리바스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욥에게 많은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 까닭은 욥이 하나님에게 바람직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욥에게 충고하기를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하였습니다.
(욥 22:21) ”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여기서 하나님과 ‘화목하고’라는 말은 ‘유용하다, 쓸모있다, 도움이 되다, 유익하다’ 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악하게 살았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에게 유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라
(욥 22:22)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매우 지당한 말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돈과 명예를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드려야만 합니다.

2)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라
(욥 22: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일이고 그렇게 할 때 내가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불의와 멀어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뜻은 세상의 것을 버리는 일을 수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에 일어난 변화는 (빌 3:7, 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한 말씀처럼 과거에 가치 있게 여겼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3)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
(욥 22:24)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우리의 육신이 살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정도 이상의 욕심을 부리게 될 때 그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고 하나님과 불화하고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육신의 보화보다 더 좋은 보화를 주시는데 그 보화는 금은보석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 22: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불화가 종식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얼굴을 들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어주시며 가는 길이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 22:26-28)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엘리바스는 여기서 상당히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그는 욥과 같은 죄인도 회개하면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 큰 도움을 끼칠 수도 있다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여전히 욥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은 비판되어야 마땅하지만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환난을 통하여 더욱 마음이 오만하게 되든지 아니면 낮아져서 자기 부족을 깨닫고 겸손하게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인데 전자는 하나님과 더욱 불화하게 되는 길이고 후자는 하나님과 사람과 화목하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엘리바스의 충고가 마치 복음적인 진리처럼 생각되는 논리에서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화목의 중요성을 잘 알면서도 이웃과 화목하지 못하고, 불화하고, 반목하고, 갈등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화목의 근원인 하나님과 불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마치 우리들이 가정에서 마시는 수돗물의 근원인 상수도 수원지와 같이 인간들과의 화목의 원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관계가 화목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화목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면 인간관계도 화목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이웃과도 화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화목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때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죄인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오늘 성경에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강요한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드리는 길,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길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바스가 욥에게 제안한 하나님과의 화목하라는 말씀이 욥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미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이 귀담아 듣고 지키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이웃과 화목해질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화목이 없이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화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첫째 욥의 친구들처럼 자기 주관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빙자하여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1) 사람은 외모를 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나 사람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눈에 비쳐지는대로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서 사람을 엘리바스처럼 이웃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해야 합니다.
2) 사람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욥은 자기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인 취급을 하고 정죄하는 것은 교만이요 월권인 것입니다.

3) 이웃을 사랑하는 자만이 화목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남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교만한 자를 멀리하십니다.

둘째 엘리바스가 욥을 오해하고 비판한 것처럼 권력을 남용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1) 그 권력으로 불의하게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권력을 주시는 이유는 그것으로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고 도와주라고 봉사의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2) 빈궁하고 갈급한 자들을 외면하는 몰인정한 일입니다.
모든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것들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부요하고 풍요로운 자는 그것으로 고아와 과부와 같이 빈궁한 자를 돕고 갈급한 자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화목하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2) 하나님만을 최고의 보배로 삼고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들에게 오늘 성경 말씀에 약속하신 축복들을 세 가지로 요약을 하겠습니다.
1) 회복의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내면적인 것뿐 아니라 외면적인 요소들까지도 온전히 회복하여 주시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부요케 되는 복을 주십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론 영혼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공급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육 간에 풍성하신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3)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며 슬픔 가운데 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며 화평 가운데서 거하게 하심으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에서 정결한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이것들이 바로 이웃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능력이며, 특권이라면 이웃과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이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