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편이 되셔서 구해 주실 분
(욥 19:13-26)
(욥 19: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욥 19:14)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욥 19:15,)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욥 19: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욥 19:17)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욥 19:18)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욥 19: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욥 19: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욥 19: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욥 19: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욥 19: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욥 19: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미국의 시사주간지 TIME지가 조사해서 보도한 내용 중에 현대인들에게는 무려 278가지 종류의 두려움이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 중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미지에 대한 두려움,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꼽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한번 인생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만이 아니라, 죽을 때에도 결국 혼자 몸으로 왔다고 혼자 가는 궁극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그처럼 언젠가는 고독하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그것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대응책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그 같은 처지를 미리 아시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돕는 배필 아내를 짝지어 평생의 반려자로 주셨습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가장은 인간의 고독을 위로해 주는 최상의 안식처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가정들이 모여서 이웃을 이루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나 가족이나 이웃의 가장 큰 책임은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서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주고받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문득문득 군중 속에서 고독, 도시 속에서 황량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궁극적인 고독은 이웃만으로 해결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대응책이 무엇인지 오늘 성경을 통해서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친구들로부터 상처
오늘 성경은 욥이 젊은 친구 빌닷으로부터 불의를 자행하는 악인 취급을 당한 후에 욥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래 욥의 친구들이 머나 먼 곳에서 일부러 욥을 찾아 온 의도는 재앙을 만난 욥을 위로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로 서로 약속을 하고 모인 것입니다.
(욥 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여기서 ‘위로하려하여’라는 말(!j'n)은 '회개하다, 애석해 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라는 의미가 함축된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겠다는 의도에서 여러 가지 말을 주고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욥에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음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욥 19:2)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욥 19: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여기서 ‘괴롭히며’라는 말(hg:y)은 ‘몹시 슬퍼하다, 고통을 겪다, 번뇌케 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짓부수기를’이라는 말(ak;D)은 ‘뭉개다, 분쇄하다, 박멸하다, 꺾다’라는 뜻으로 세 친구가 작당을 해서 욥의 말을 완전히 짓밟아 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열번’이라는 말은 숫자적으로 열 번이 아니라 완벽하다는 의미의 열 번이고, 그렇게 욥을 학대하고서도 친구들은 조금도 자신들이 하는 짓을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다고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위로는커녕 도리어 욥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학대의 채찍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1) 설령 욥에게 허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 때문에 욥의 친구들이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면 상관할 바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 19:4)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2) 설령 욥에게 허물이 있어서 친구들이 그것을 물고 늘어져서는 안 되는 까닭은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눈에 있는 큰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만을 보는 교만인 것입니다.
(욥 19: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도 욥의 친구들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면서 흠집을 내고 상처를 줄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누구를 위로하겠다는 좋은 의도로 위로하는 말을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욥처럼 도리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말은 마치 남을 대접하기 위해 만드는 음식과도 같습니다. 음식은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먹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말도 마찬가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가까운 부부나 친구 사이에 말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처럼 상대방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말이 도리어 상대방의 자존심이나 상처를 건드리기 때문에 소외감과 고독감을 부채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된 옛말에 “남을 이롭게 하는 말은 솜털같이 따뜻하고, 남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다. 한마디 반마디 말이 천금과 같이 중하지만, 남을 상하게 하면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무리 믿음이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그 경건은 헛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약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그러므로 진정한 친구, 좋은 친구는 상처를 주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싸매고 치료하는 말을 하는 친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오해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보면 욥과 같이 친구들에게 위로는커녕 상처를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 신앙의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욥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욥이 견디기 힘든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도우심을 구하였지만 하나님은 욥의 간구에 응답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욥 19: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욥 19: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여기서 ‘억울하게 하시고’라는 말(tw"[)은 구부러지게 하신다는 뜻이고, ‘폭행을 당한다’라는 말(sm;j)은 ‘억울하고 부당하고 포악하게’ 폭행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욥 19: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여기서 길을 ‘막아’라는 말(rd"G)은 ‘벽으로 빙 둘러 쌓아 오도 가도 못하게 막는 것’을 뜻하며, 그것만이 아니라 9절에 ‘영광을 거두시고, 머리에 관을 벗기시고’, 10절에 ‘사면으로 헐으시고, 소망을 나무처럼 뽑으시고, 11절에 ’하나님이 원수 같이 보시고, 12절에 ‘군대를 보내어 치시는 것 같이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모든 억울한 일과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이 그것을 조종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오늘 성경의 욥만이 아니라 아주 믿음이 좋다고 생각되는 쟁쟁한 신앙의 선진들도 종종 경험한 회의와 갈등들이었습니다.
욥이 사랑하던 친구들과 욥이 믿고 의지해온 하나님으로 부터의 소외감 못지 않게 욥을 괴롭게 하는 것은 욥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 부터의 소외감이었습니다.
욥의 형제들도 욥을 버리게 하시고 친분 잇던 사람들조차 낯선 사람들처럼 냉담하여졌고, 친척들도 등을 돌리고 친구들조차 다 떠나 버리고, 심지어 손님들조차 모른 척하고 여종들까지 이방인처럼 대하고, 종들을 불러도 들은 체를 하지 않아 사정을 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욥 19: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욥 19:14)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욥 19: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사람들이 다 그럴지라도 욥의 아내는 욥을 위로 해 주어야 하는데도 아내조차 쌀쌀하게 대하질 않나, 형제들까지도 지긋지긋해 하였고, 심지어 동네의 어린아이들까지도 경멸하며 마구 비웃고 평소에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도 혐오하고, 심지어 평소에 욥을 아꼈던 자들까지도 다 욥에게 등을 돌렸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욥 19:17)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욥 19:18)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욥 19: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그렇다면 정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칭찬하신 욥을 치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생명을 걸고 순종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분노하시고 종일토록 치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많이 범하는 과오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침묵하신다고 해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처럼 오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생각은 이러이러하실 것이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러이러하다고 속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뜻은 정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3. 욥의 갈등과 반전
욥의 비극적 상황은 (욥 19: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라고 한 것처럼, 욥의 처지는 이빨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간신히 숨만 헐떡거리고 있는 비참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입니다.
욥은 그같은 상황에서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도 잡는 것처럼 욥의 친구들이 자기를 비난하고 정죄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견디기 어려운 총체적인 소외상황에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호소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욥은 견딜 수 없는 고통 중에 친구들 앞에서도 자존심을 세웠던 것과 달리 친구들에게 간곡히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욥 19: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욥 19: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욥은 그동안 하나님에게 핍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그동안 믿고 의지하던 가족들, 친척들, 지인들, 친구들, 심지어 나그네와 종들, 어린 것들에게까지 총체적으로 따돌린다고 생각되는 막다른 상황에서 욥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욥은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여기서 ‘대속자’라는 말(la'G:)은 '되사다, 도로 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redeem, 근친 역할(권리, 의무)을 행하다'를 의미로, 이 어근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는 뜻입니다.
욥은 비록 이 땅에 머물러 사는 동안 가장 가깝다고 하는 친구나 가족이나 이웃이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는 가운데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때로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오해하기도 하였으나,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 구원해 줄 고엘은 유일하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욥은 자신을 이 불의한 죽음의 위기로부터 건져내실 고엘, 즉 구속자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이는 욥이 완전히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한계상황에 봉착했을 때, 욥은 비로소 내 편이 되어 나를 구원하실 대속자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며 설령 죽어 육체가 썩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나의 영혼은 부활하여 그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반전입니다.
(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욥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형통하며 살 때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대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 욥은 자기가 축복을 받고 있을 때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하게 인정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허락하실 때는 하나님의 대우를 부당하게 여겼습니다.
3)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도 처음에는 그랬지만 고난이 지속되면서 점점 그 초심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4)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 처사가 부당하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5) 욥의 이런 모습은 욥을 실족케 하려 하였던 사단의 계략에 빠져들었다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단의 의도한 것처럼 완전히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6)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욥도 조금 흔들렸습니다. 그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부단한 신앙적 노력을 통하여 사단의 간계를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욥과 같이 갈등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대표적인 사람이 선지자 예레미야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느 누구보다 나라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한 눈물의 선지자이건만 때로 욥과 다름없는 탄식을 하였습니다.
(애 3:1)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애 3:2)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애 3:3)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여기서 ‘여호와의 분노’라는 말은 ‘분노가 흘러넘치는 격분 상태’를 뜻하며,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종일토록, 자주자주 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낙심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확정된 예루살렘의 파멸을 생각할 때마다 쑥과 담즙을 마시는 것처럼 그 고통이 극심하여 낙심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애 3: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애 3: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애 3: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그러나 예레미야는 결국 욥처럼 하나님께 긍정적인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소망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애 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애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범죄한 유다를 징계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포로 기간은 70년을 통해 그들을 회개시키고 정화시켜 때가 되면 다시 그들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나라는 파멸되었으나 백성이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은 곧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직도 그들에게서 떠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야 말로 하나님만을 영원히 의존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변함없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비로소 절망의 날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택하신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일을 자꾸만 막으시는 것처럼 생각된 적은 없습니까? 아마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가 부모의 깊은 의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미워하신다고 오해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욥이나 예레미야처럼 고난이 계속되면 마음이 연약해져서 하나님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믿음이 좋다는 욥이나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신앙의 선진들도 막상 어려움에 처하게 되니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였다면, 연약한 오늘 우리들은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때로 성경을 읽다가 보면 시편기자나 선지자들이 욥처럼 어려움을 당할 때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다가도, 곧 뒤돌아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양면성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때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 중에서 아무 도움조 받지 못하고 도리어 상처만 받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을 찾고 새벽 기도를 드리고 금식도 하지만 전혀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욥처럼 하나님께 원망을 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인 것처럼, 오늘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사단의 시험에 걸려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이 약해진 내가 사단의 시험에 걸려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내 버려두시지 않는 분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절망의 날에 나를 구원하실 대속자는 하나님 한 분 밖에 다른 이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욥처럼 때로 육신의 고난 때문에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하는 것 같고, 하나님마저 외면하시는 것처럼 생각되는 절망의 날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만이 결자해지가 되심을 믿고 욥처럼 대속자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활의 믿음으로 천국에 가서 주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자리를 떨고 일어서는 신앙의 반전을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나의 미래에 대해서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내편이 되시고, 하나님은 나를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찬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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