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희망이 어디에?
(욥 17:11-16)
(욥 17:11)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욥 17:12)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욥 17:13)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욥 17:14)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욥 17:15)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욥 17:16)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천국과 지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화
우리가 백화점이 대형 마트의 식품 코너에 가게 되면 여러 가지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가운데 신제품을 선전하기 위해 맛보기로 조금씩 덜어서 시식을 권할 때 공짜이기에 사양하지 않고 맛을 보고나서 상품을 구입한 적이 간혹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세상에서도 맛볼 수 있는 코너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때로 우리가 그 맛을 볼 때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이고,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조금이라고 깨닫고 믿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곳은 어디를 가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고통이나 눈물이나 죽음이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1)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은 그와 같은 고통이 티끌만큼도 없고 오로지 감사와 기쁨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곳이라고 요한 계시록에 보여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 모든 것들을 지나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여기서 ‘지나갔음이러라’는 말(ajpevrcomai)은 마치 비행기가 날아 가버린 것처럼 평생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던 부정적인 요소들이 ‘다 떠나 가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도 우리가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곳은 믿음으로 주안에서 살 때 하나님이 나의 고통과 슬픔을 아시고 위로해 주시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에서 나를 치유하여 주실 때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물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나를 괴롭히던 것들을 종종 하나님께서 지나가버리게 하실 때 기쁘고 감사함을 느꼈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의 기쁨인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위로나 기쁨이 한시적이지만 천국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2) 그렇다면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대부분이 지옥하면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불못으로만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에서 불의의 사고로 화상을 입지 않고는 지옥을 맛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은 그와 같은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마음의 고통을 통해서 시시 때때로 맛보게 됩니다.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도 인내와 용기를 가질 수 있는 힘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 한, 어떠한 시련이라도 기꺼이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동독으로 돌아온 철학자인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라는 전집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 중에서도 인내와 용기를 가질 수 있는 힘은 곧 내일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명은 전쟁을 통해서 발전을 되었습니다.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마치 고통 중에서 영롱한 진주를 만드는 조개처럼, 견디기 힘든 고통 중에서 희망을 품고 불휴의 명작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그와 같은 희망과 발전이 전무한 곳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 입구에는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고통스러운 세상을 구차스럽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일에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정열과 생활의 보람과 기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유혹하지만 죽음 너머에 세상에서 겪은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게 합니다. 죽으면 마냥 편안하게 된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죽음조차도 희망할 수 없는 영원한 절대절망의 불 못이기에 참으로 두려운 곳입니다.
(막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살면서 그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믿음으로 몸부림을 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오늘 성경의 욥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믿음으로 그것을 이겨 천국의 기쁨과 위로를 맛보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사람입니다.
1. 욥의 고통
욥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손으로나, 눈으로나, 입으로나, 무슨 범죄한 일이 없는 의인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가리켜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고 자랑하실 정도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영육 간에 받는 고통은 시간이 흘러 갈수록 증폭되어만 갔습니다. 욥은 마치 아무런 희망이 없는 지옥과 같은 고통 중에서 내일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하는 것이 욥을 더욱 절망하게 만드는 고통들이었습니다.
1) 질병의 고통
(욥 17:1)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여기서 ‘기운’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며, ‘쇠하였으며’라는 말은 중병에 걸린 정도가 아니라 생명이 파멸에 이르렀다는 말은 재기 불능의 상태로 희망의 여지가 전혀 없음을 뜻합니다.
또한 ‘날이 다하였고’ 라는 말은 마치 촛불을 끄는 것처럼 생명이 소멸되어 버린 상태로 생명의 회생 가능성이 전무 한 절망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지금 욥의 건강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욥은 무덤을 가리켜 ‘내 아버지라’고, 시신이 썩을 때 생기는 ‘구더기’를 가리켜 ‘내 어머니와 자매’라고 일컬었습니다.
(욥 17:14)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사람이 일평생 사는 단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작게는 독감에서부터 크게는 암에 이르기까지, 젊어서는 건강하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자신도 느끼지 못한 어느 순간에 중병에 걸린 것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합니다.
설령 그럴지라도 옛날 같으면 벌써 죽었을 사람이 현대의학의 발달로 치료와 수술을 통해서 호전되고 건강이 회복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의 질병은 갈수록 악화되기만 하여 마침내 기운이 다 떨어져서 장례를 준비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호전될 희망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 7: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욥 7: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욥 7: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그와 같은 욥의 처지가 건강한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욥기를 기록해 놓은 것은 어느 누구도 건강을 장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언젠가 때가 되면 치료와 회복이 불가능하여 욥처럼 장례를 준비해야만 하는 때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다면 그와 같은 육신의 질병에 걸려 고통 중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영혼은 귀하고 육신은 천박하다는 이원론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존귀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까지 건강관리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명과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욥은 육체적으로만 고통을 겪은 것이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심적으로도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2) 마음의 근심
(욥 17:7)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여기서 ‘근심’이라는 말(s['K)은 '속상함, 분함, 원통함, 노여움, 화냄, 성냄, 격분, 슬픔'이라는 뜻으로 욥은 마음에 슬픔과 근심 때문에 시력이 약해져서 눈만 아니라 사지백체가 다 나약해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욥은 공포나 노여움, 슬픔이나 근심과 같은 불쾌한 감정으로 마음이 상하게 되면 당연히 시력 또한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여러 가지 고통을 겪게 되는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바로 심적 고통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눈과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경직되고, 긴장되면 몸, 특히 어깨, 목, 손이 굳어지고, 반드시 눈도 그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시력만이 아닐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은 만병의 원인이 되고 이미 앓고 있는 질병을 더 악화시키는 요소가 됩니다.
물론 모두가 근심이 백해무익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지만 왜 사람들이 그 근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믿음이 적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잘못된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욥의 경우는 후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근심하게 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욥은 누구보다 풍요롭게 살던 사람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 때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럴 때 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사람은 욥의 아내와 친한 벗들임에도 불구하고 실상 욥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하고 마치 비수로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욥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주인공들이 바로 욥의 친구들임을 오늘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욥 17:2)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여기서 ‘조롱한다’는 말은 욥이 자신의 무죄함을 변명할 때 친구들이 그것을 이해하기는커녕 비웃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몇날 며칠을 곁에서 붙어서 ‘충동함’이라는 말은 ‘반항하다, 다투다’는 뜻으로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대꾸하는 사람은 욥 혼자인 반면에 욥의 친구들은 마치 전문 분야에 따라 활당을 하여 공격을 하는 것처럼 욥의 허물을 폭로하고 비난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에 마음이 상한 욥은 그의 자손들을 저주하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욥 17:5) “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
친구가 많다고, 오래 사귀었다고, 항상 붙어 다닌다고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잠 17:17)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잠 18:24)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에 대해서 위로하고 동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아픈 곳을 찔러 더욱 마음을 상하게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5000여명, 하루 평균 43명이 자살했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얻었습니다.
이런 현실 사회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할까요?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이나 고통에 대해 악필을 쓰고 험담을 하며 돌 던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진심어린 위로와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욥의 소원과 기도
만일 우리가 욥의 처지라면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 살 의욕을 상실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에게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다는 옛말처럼 그의 아내도 친구들도 백해무익하게 느껴졌을 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붙잡은 것은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욥 17:3)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여기서 ‘청하건대’라는 말은 간청과 권고를 나타내는 ‘제발 바라건데’라는 불변사로 욥의 심정이 얼마나 절박한 가를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욥이 그같이 절박하게 하나님께 구한 것은 ‘담보물’이라는 말(!Wc)은 요셉이 애굽에 찾아온 형들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 막내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오라고 하였으나 야곱이 완강하게 거부하였을 때 유다가 야곱에게 자신이 담보를 하겠다고 한 말과 같은 뜻입니다.
[창 43:9]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또한 법적으로 보증을 섰을 때 그 증표로 상대방에게 손으로 하이 화이브를 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손을 치는 습관이 있었는데 욥은 하나님께 아무도 자기의 손을 잡아줄 자가 없으니 하나님이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서 보증인이 되어 위기 중에서 건져 달라는 간곡한 호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동서남북 사방이 막히게 되면 이제는 죽었다고 절망을 하지만 욥처럼 하나님을 보증인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 구할 때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내게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이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포자기를 하게 되고 막가파의 삶을 살기 쉽습니다. 사단이 욥에게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 아버지께 담보를 요청한 까닭은 그 길만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비록 근심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지고, 평소에 정직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이 그 같은 욥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먹고 욥의 친구들처럼 욥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욥을 비난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욥 17:7)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욥 17:8) “정직한 자는 이로 말미암아 놀라고 죄 없는 자는 경건하지 못한 자 때문에 분을 내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그것을 견뎌내고 의로운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을 깨끗이 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손을 내밀어 그의 도우심을 구하였기 때문에 점점 더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 17:9)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은 ‘그러나’ 또는 영역 NIV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문맥을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연스러운 번역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한 ‘점점’이라는 말은 ‘증가하다, 늘어나다, 다시하다’라는 뜻이고, ‘힘을 얻느니라’는 말은 미완료 시제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올바름이 드러나고 힘이 강해진다는 뜻입니다.
(잠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들! 어둠, 흑암 속에서 헤매는 나날들만 계속될 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발을 헛디뎌 깊은 구렁 속에 빠져 들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모시며 올바로 살아가는 이들, 살아가는 나날이 환하게 비쳐 오는 햇살처럼, 파란 하늘처럼, 맑고 밝기만 하리라. 그날이 올 때까지!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짙은 어둠 같아서,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연약합니다. 누구도 나는 아니라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무사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죄를 멀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욥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혀지지 않는 하나님을 자신의 보증인으로 삼기를 원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면 오늘 우리에게는 구원의 확실한 담보물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 놀라운 비밀을 깨닫고 모진 고난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는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런 선언을 하였습니다.
(롬 8:33)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롬 8:34) “누가 감히 죄가 있다고 판단하겠습니까?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아니면 어려움입니까? 핍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아니면 칼입니까?”(롬 8:36)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는 하루 종일 주님을 위해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롬 8: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롬 8: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하늘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힘이나,”(롬 8:39) “가장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3. 절대 절망, 절대 희망
이때쯤 이면 순천만의 일몰이 참 아름다울 것입니다. 지난 달 교회 달력에 나온 사진처럼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지나노라면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며 서도 부딪혀 사각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신앙을 “나의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 과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인간에 대해서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에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무섭게 만든다’ 라고 독백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욥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하는 욥이지만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마음에 만감의 교차되는 것을 보면서 나를 비롯해서 인간의 실존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우리는 방금 (욥 17:9)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는 욥의 고백을 통해서 매우 믿음이 확고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입술로 너무나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상반된 고백을 오늘 성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욥 17:11)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욥 17:13)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욥 17:15)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이는 한 마디로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절망적인 소리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욥을 통해서 바로 내가 오늘의 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제 욥에게는 죽는 것 밖에 다른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죽음이 희망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인간의 모든 희망을 싹쓸이 해가는 절대 절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은 갖가지 희망에 부풀어 삽니다. 비록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고 성공하겠다는 희망을 가진 학생은 밤을 지새우고 코피를 터트려가면서도 책을 덮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장사를 하거나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거나 사람들은 저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하는 가운데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어갈 때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허리를 피고 살만하고, 필요한 것을 부담 없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되었고, 남에게 꾸러가거나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질병이 찾아오고 사고를 당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죽음은 행복을 시기하는 심술궂은 훼방꾼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모든 것들을 다 소유하고 누려본 솔로몬 왕은 자신의 한 평생을 돌아보면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과 정반대의 삶을 사시다가 불과 삼십 삼세에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솔로몬처럼 인생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죽음으로 더 많은 것을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너머에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결코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에 부활과 영생을 믿지 못하는 자에게 죽음은 절대절망이지만 부활과 영생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절대 희망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양떼처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사는 것도 죽음이 전제된 것이지만, 부활과 영생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사나 죽으나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라면 사나 죽으나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러므로 문제는 죽음을 절망으로 보고 사는가 아니면, 죽음을 희망으로 보고 사는가하는 차이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힘이 안들고의 차이가 아니라 부활과 영생과 하늘 나라를 믿고 믿지 않는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인 것입니다.
욥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 마지막 죽음을 희망한 이유는 욥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을 비껴가는 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욥 17:16)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여기서 ‘쉴 때에는’이라는 말(tj'n)은 ‘내려감, 조용함, 평온함, 휴식, 안식’이라는 뜻을 죽음이 모든 희망을 싹쓸이 해가는 절대절망이 아니라 피곤한 자를 조용히 쉬게 하는 절대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처럼 보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아야 함은. 포기하지 말아야 함은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영원한 생명의 닻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선해질 수도 행복해질 수도 구원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늘에 계신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이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절망뿐 인 이 세상에 보내신 까닭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 할 수 있다면 우리를 도우시지 구태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어도 때로 욥처럼 조롱꺼리가 될 때도 있고 만사가 꼬여 돌아갈 때가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담보물인 중보자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얼마를 살든지 여기는 우리의 본향이 아님을 알고 영원한 본향인 천국에 계신 우리 주님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때로는 그 길이 힘들고 어려울찌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것은 우리의 상급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린 만큼 하늘에 위로와 상급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욥처럼 때로 흔들릴 수 있지만 불신앙의 길로 내려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눈을 들어 우리의 본향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죽음이라는 계곡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계곡 너머에 영원한 희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 21:3) “그때 나는 보좌에서 들려 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계 21: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영원히 다 사라져 버렸다.'”
(계 21:5) “보좌에 앉으신 분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 내가 네게 일러주는 것은 신실하고 참되니 모두 다 기록하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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