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불의한 자의 운명/(욥 18:14-21)

미션(cmc) 2011. 11. 1. 07:50

불의한 자의 운명
(욥 18:14-21)

(욥 18:14)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욥 18:15)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욥 18:16)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욥 18:17)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욥 18:18) “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욥 18:19)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욥 18:20)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욥 18:21)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오늘 성경 본문 욥 18:20에 ‘그의 운명’이라는 말과 더불어, 21절에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 어떤 성경에는 ‘악인의 집이 처한 운명’ 또는 ‘못된 짓 일삼는 자들의 운명이 이러하고’라고 번역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이라는 말이 하나님이 악한 사람을 따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사람, 불의하게 사는 사람의 장래를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롬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롬 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악을 행하는 사람인가 선을 행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좌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와 같은 ‘악인이고, 못된 짓을 일삼는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작정해 놓으셨을까요?

1. 몰인정한 사람
오늘 성경은 욥이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욱 고통스럽기만 하자 마음마저 나약해져서 ‘오로지 나에게 희망은 무덤에 가는 것 밖에는 달리 더 희망이 있는가?’ 라고 탄식하는 소리를 들은 친구 빌닷이 욥을 정죄하고 비난한 소리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욥의 친구들 중에 가장 젊은 사람으로 욥을 향하여 입을 닥치라고 이렇게 윽박질렀습니다.
(욥 18: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욥 18: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욥 18: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이 말은 “자네는 언제까지 그렇게 얘기할 참인가? 정신 좀 차리게. 그래야 우리가 얘기하겠네. 자네는 무슨 까닭에 우리를 짐승처럼 아둔하다고 생각하는가? 자네 눈에는 우리가 그렇게 어리석게 보이는가?” 라는 뜻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욥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자기보다 연장자인 욥을 그렇게 꾸짖는 것일까요? 그것은 욥이 너무 고틍스러워서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은 죽는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욥 17:11) “이렇게 살아가는 나날, 그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애타게 바라던 것은 사그라지고 말았다네.” (욥 17:15) “그러니 내게 남은 소망이 있겠는가? 또 내게 소망이 있으리라 여길 사람이 있을까?” (욥 17:16) “저 스올로 내려가는 이 신세, 그 무슨 희망 있으랴? 단지 스올 골방에 내려가는 것밖에는.”
세상에서 아무리 몰인정한 사람도 그 같이 비참한 욥의 모습에 대해서 우선 먼저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부터 하지 않았을까요?
더구나 욥의 친구라고 하면서 빌닷은 욥의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매도하고 욥을 애처롭게 본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학대를 하는 사람처럼 일방적으로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욥 18: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욥 18: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이는 욥이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땅이나 바위처럼 욥의 처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아 사람 빌닷이 생각하기를 욥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한 악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정죄하는 마음에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교만의 극치라는 것을 빌닷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빌닷의 부정적인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까닭은 우리도 종종 남에 대해서 빌닷처럼 몰인정하게 대한 적이 없는가를 돌이켜 보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들의 즐거움이나 슬픔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몰인정해서는 안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여기사 ‘즐거워하고’라는 말( caivrein)과 ‘울라’는 말(klaivein)은 상대방과 일체화가 되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실천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돈이나 물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즐거움과 슬픔을 나눔으로 기쁨을 배가시키고, 슬픔을 절감시키는 일입니다.
물론 그것은 타락한 육신의 성품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오 같은 삶을 본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성육신 하신 까닭이 바로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리 무뚝뚝한 사람도 슬픈 일을 만나면 마음이 약해지고, 즐거운 일을 만나면 마음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이웃이 슬픔이나 기쁨을 만났을 때 방관하는 몰인정한 사람이 되지 말고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한다면 바로 그 때가 아무리 굳게 닫힌 마음도 쉽게 열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남을 정죄하는 사람
수아 사람 빌닷은 고통 받는 욥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심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불의 한 욥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착각하며 악한 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 경고를 하였습니다.

1) 물질적인 재난
(욥 18:5)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욥 18:6)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여기서 ‘악인’이라는 말([v;r:)은 내적으로 악하고 교만하고 불성실하고 비열하며 외적으로는 사악한 죄를 범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빛’은 만사가 형통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반면에 ‘꺼지고’라는 말은 점점 몰락 되어감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또한 '장막'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는 생활 터전을 뜻으로 '장막 안의 빛'이란 그 사람의 경제적인 번영, 부귀 등을 상징적하며, 악인의 장막은 점점 어두워지고, 등불이 꺼진다고 하는 것은 악인의 몰락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이 일시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듯이 보이지만 점차 멸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빌닷이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은 한 때 욥이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 고통에 처하게 된 원인이 바로 욥이 악을 범하였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께 징벌을 당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빌닷의 말과 같은 뜻인 (잠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욥이 불의한 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여 악인에게 작정하신 징벌을 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빌닷은 마치 자기의 권한인 것처럼 착각하고 잘못 적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육체적인 고난
수아 사람 빌닷은 불의한 악인에게는 물질적인 고난만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도 찾아온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욥 18:7) “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여기서 걸음이 ‘피곤하여지고’라는 말은 마치 짐승의 발을 묶은 것처럼 ‘갑갑하고, 보폭이 좁고, 갑갑하고, 발자국 띠는 것이 괴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건강 상태를 쉽게 점검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발걸음입니다. 빌닷은 욥이 발걸음이 피곤하여지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악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은 피부병이었습니다. 욥이 얼마나 피부병으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잘 표현해주는 말은 피부가 너무나 가려워서 질그릇을 깬 것으로 몸을 긁었다고 하였습니다.
(욥 2: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욥의 몸은 마치 오래 된 등창 환자처럼 살에 구더기가 생기고, 피고름과 말라붙은 딱지가 마치 누더기 옷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욥 7: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빌닷은 그러한 처지의 욥을 동정하기는커녕 빗대어 그 피부병 때문에 결국 욥은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 18:13)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여기서 '사망의 장자'란 고대 아라비아나 바벨론과 앗스루 지역에서 '무서운 질병'을 가리킬 때 흔히 쓰는 비유법적 표현으로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욥 18:14)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욥은 그 때문에 마치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났듯이 욥도 죽음의 사자에 의하여 급히 끌려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처럼 육체적인 질병이 욥에게 점진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이고도, 총체적으로 임하기 때문에 결국 죽음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욥 18:16)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욥 18:18) “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3) 가문의 멸망
사람이 아무리 고통이 클지라도 실낱처럼 마지막 희망이 있다면 자손의 대에 가서는 회복이 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가족의 행복을 생각하며, 그 자손의 안녕을 염려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기 자손이 죄로 말미암아 멸족이 된다면 무엇보다 가장 두려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닷은 불의를 행하는 악한 자는 물질적으로 건강상으로만 고난을 겪다가 결국 죽게 되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재앙이 가문에까지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욥 18:19)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그래서 결국 그 조상들이 살던 집 주인이 바뀌어서 동서사방에서 찾아 왔던 손님이 가문이 멸족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 18:20)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빌닷이 하나님의 정의를 빙자하여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지금 현재 욥이 십남매 자녀들을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린 상태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불의를 행한 악한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무서운 말을 듣고 있는 욥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야 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입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자식을 다 잃어버린 욥을 앞에 놓고 그렇게 빗대어 말하는 것은 인간적인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후일에 욥은 빌닷의 말처럼 죽었어야 하고, 자식들을 낳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일에 욥은 건강도 재산도 그리고 또 다른 자녀들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빌닷이 말한 불의를 행한 악한 자가 욥이 아니었다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통찰력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미래입니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조차 지난 과거처럼 소상히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닷은 마치 자신이 심판주라도 되는 것처럼 자식을 다 잃어버리고 슬픔에 젖어 있는 욥의 가슴을 비수로 휘젓는 것처럼 마음 아픈 소리를 하였습니다.
빌닷만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도 때로 남을 미워하거나 정죄할 때가 있는데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주기 위해서는 마치 내가 정의로운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가장 아픈 곳을 공격하려고 하는 시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3.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
창조주 하나님이 아름답게 세상을 만드시고 그 세상을 보존하고 공평무사하게 통치하시기 위해 어떤 원칙과 법을 제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요, 계명이요, 율법이요, 선한 양심입니다.
신불신을 막론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법과 원칙을 다 지키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설령 국법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인 성경과 각자 양심에 비쳐 무죄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약 4: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만일 절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인간이 범한 불의한 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에 따라 즉각적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벌하신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사건이 노아 홍수 심판입니다. 노아의 가족만 겨우 구원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였고, 결국 세상에는 단 한 사람의 신자도 남지 않는 죄악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빌닷이 말하는 공의의 잣대로 심판하신다면 세상에 불의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지게 하지 않으시고 대신 무죄한 제물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결국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의 속죄양으로 삼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의 증표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은 폐기가 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것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을 시키신 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퍅한 인간이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인 사랑을 거절하고 불신앙에 빠져 회개하지 않고 불신앙에 빠져 여전히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빌닷이 말한 것처럼 불의를 행한 악한 자들에게 정해 놓으신 법대로 처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불의한 자의 운명인 것입니다.
(욥 18:21)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그 운명이 바로 빌닷이 말한 것처럼 불의한 악인의 집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2)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범죄한 아담처럼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4) 그 후손이 멸절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5) 아무도 불의한 자를 동정하거나 기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장이신 하나님이 아직 그렇게 하시지 않고 집행을 미루고 계시는 이유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믿을 수 있는 기회와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한 마지막 카드인 것입니다.
만일 오늘도 그렇게 하신다면 세상에서 형벌을 받지 않을 만큼 죄가 없고 깨끗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세상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를 막론하고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만일 내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빌닷처럼 마치 내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 칼이 부메랑처럼 언젠가는 내가 나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닷처럼 남을 정죄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긍휼히 여기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도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내가 불의한 자를 정죄하고 비난하지 않아도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 발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악인의 운명대로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빌닷처럼 불의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보실 때 빌닷보다 더 의롭게 살고 있는 욥을 정죄하는 것처럼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적반하장의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1)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하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과장하거나 축소할 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2)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 상대방과 같은 시행착오나 허물과 죄를 범할지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죄하고 비난하기 전에 오히려 나 자신을 돌이켜 보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3)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면 나도 언젠가는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내가 상대방을 정죄하면 내가 정죄했던 그 칼에 언젠가는 되돌아와서 나를 찌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후일에 그와 같은 빌닷을 책망하셨고 오히려 욥의 사죄의 기도를 받게 만드셨습니다.
(욥 42: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 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빛도 창조하시고 어두움도 창조하시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그와 같은 하나님께는 밤과 낮이 하나이며, 흑암과 빛이 다 일반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시 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다 같이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다 같이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죄인이었던 우리가 그와 같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동정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빌 2: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빌 2: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빌 2: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빌 2: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삶이 믿음으로 의롭다 일컬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