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회사진 방/수원노회 유럽탐방

유럽종교개혁지 탐방 3편(체코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블타바강 )

미션(cmc) 2012. 7. 13. 08:54

 

                  체코 타보르에서 프라하로 이동하다.         

 

프라하 [Praha]

블타바 강 유역에 있다. 9세기부터 세워진 건축물 유산이 풍부한 도시이다. 작은 정착촌들에서 비롯되었으며, 점차 확장되어 지금은 시가지가 구릉지대, 블타바 강 지류의 유역들, 강 연안의 계단식 대지까지 펼쳐져 있다.

19세기에 직물과 기계류 제조업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한 이래 프라하는 체크의 경제를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제조업 분야에 가장 많은 노동력이 종사하고 있으며, 상업·건설업·교육·문화·행정·교통·통신·과학연구 분야가 그뒤를 잇고 있다. 주요공업은 중기계 및 정밀기계 제조업과 유명한 프라하 맥주를 비롯한 식품류 및 전자제품·화학제품 제조업이다. 블타바 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프라하 중앙을 가로지른다. 강의 서쪽 기슭에는 왕립 정원, 흐라트차니(프라하의 성), 정원과 공원으로 이루어진 말라스트라나[小地域] 등이 있다. 강의 동쪽 기슭은 주로 12세기에 조성된 스타레메스토(구시가지)와 14세기의 노베메스토(신시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구역 모두에 역사적 기념물들과 교회들이 많이 있다. 특히 노베메스트의 건축물들로 인해 프라하는 '100개의 뾰족탑을 가진 도시'로 묘사되기도 한다. 오래된 구역들의 좁은 거리들, 작은 선술집들, 식당들과 넓게 트인 바츨레프스케 광장 및 현대적인 공원, 주택단지들이 대조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으며, 주택난의 해소를 위해 시의 변두리 지역에 신주택촌이 계속 조성되고 있다.

 

10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진 스바티이르지 교회를 비롯하여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 대성당과 틴 교회, 바로크 양식의 발트슈테인 궁과 츨람갈라스 궁, 로코코 양식의 골스킨스키 궁, 고전주의 양식의 베드르지흐스메타나 박물관과 벨베데레 궁, 신고전주의 양식의 국립박물관과 국립극장 등에 이르기까지 프라하에는 갖가지 양식으로 세워진 훌륭한 건축물들이 많다. 유대인들이 오래전부터 프라하에 깊이 뿌리를 내렸는데, 이는 구예배당, 신예배당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유대인 묘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45년 이후의 도시계획에 의해 옛 도심지가 보존되는 한편 새 건축물들의 건립이 규제되면서 프라하는 건축면에서 더욱더 조화로운 도시로 가꾸어졌다. 프라하는 문화의 도시로 유명하며 특히 음악과 문학 분야에서 훌륭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체크의 위대한 작곡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안토닌 드보르자크, 레오슈 야나체크를 기념하는 음악제가 매년 봄축제 때 개최되며, 프라하가 자랑하는 관현악단인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한편 프라하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로는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야로슬라프 하셰크 등이 있다.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카렐대학교(1348)이다. 프라하는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이 활동했던 도시로 그 전통을 이은 과학연구활동이 체크 과학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술 아카데미와 음악 아카데미도 있다. 대중교통수단으로는 버스·시가전차·지하철이 있으며, 철도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블타바 강에서는 여객선이 운항되며, 근처 루지네에 국제공항이 있다. 면적:시 496㎢, 대도시권 780㎢, 인구 1,165,581(2004).

 프라하 시내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의 모습입니다.

구시가지 광장은 프라하의 중심이자, 체코의 많은 역사적인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얀후스가 교황청에 의해 화형에 처해진 곳도, 오스트리아에 의해 27명의 페코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처형된 굴욕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라하의 대표적인 중심지다 보니 당연히 주변엔 구시청사와 천문시계 체코의 국민적 영웅 얀후스의 동상 비잔틴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틴 성당 등의 성당과 교회 등 눈을 돌리면 그 모든 것이 문화 유산들 입니다.

 

 

 

 

 

 

프라하의 재래시장인 하벨스케 시장Havelske Trziste.

 

 

 

마리오네트Marionette인형이 특히 눈에 띠일 정도로 많이 진열되어 있다.

 

 

 

 

 

 

 

 

 

 

바츨라프 광장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천문시계 동영상(야경)
   

 

1400년대의 프라하 천문시계 동영상 

 

 

 

    얀후스동상

종교개혁의 전주곡은 루터보다 100여 년 앞서 체코 출신의 얀 후스(1369~1415)가 먼저 울렸다. 그는 면죄부 판매 중단을 주장하다 콘스탄츠공의회 의결로 1415년 화형당했다. 관광지로 유명한 체코 프라하 광장 한 가운데에 있는 동상이 바로 후스다. 처형 당시 후스는 자신의 이름이 체코어로 '거위'를 뜻하는 것에 빗대 "지금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태워 죽이지만 백 년 뒤 백조가 나타나리라"는 예언 같은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100년이 지난 1517년에 '백조'처럼 루터가 나타났다.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는 체코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존 위클리프예정구원설을 기반으로 성서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며, 교황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으며,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가 화형당한 이후 그의 신학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보헤미안 공동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의 주장은 마르틴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얀 후스는 남 보헤미아의 후시네쯔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은 1369년에서 1373년 사이로 생각되고 있다. 그가 성직수임을 받은 해를 기준으로 역산하면 1372년으로 추정된다. 그의 부모와 가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얀 후스는 프라하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393년 학사에 해당하는 학위를 받고 1396년 인문학 마스터(mistr svobodných umění) 학위를 받는다. 그 후 1400년부터 대학에서 교양 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일했으며,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된다. 프라하의 성 미카엘 교회 (Kostel sv. Michala)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1402년 3월 14일부터 베들레헴 성당(Betlémská kaple)에서 설교자로서 활동했다. 1401년에는 철학부의 학장을 맞고 일년 후에는 대학의 총장이 되어 체코인들이 독일의 힘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한다. 그는 프라하 대학의 지도적인 체코인 교수로서, 라틴어 뿐 아니라 체코어로도 저술 활동을 했고, 체코어를 개량하고 체코어 철자법을 개혁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게 하였으며, 체코어로 찬송가를 보급하였다. 그는 설교와 저술로서 교회가 타락을 청산하고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주장은 프라하 대학 교수들과 왕실, 일부 귀족, 그리고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고위 성직자들과 프라하의 독일인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프라하 대학의 독일인 교수와 체코인 교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 갈등은 1409년 바츨라프 4세의 크트나호라 칙령으로 1348년 카렐 4세가 국제주의적 원칙에 입각, 배분한 민족 구성이 재조정되어 대학의 주도권이 체코인 교수에게 돌아간 것이다. 독일인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에 대한 항의로 학교를 더나 라이프치히에서 새로운 대학을 설립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영국인 종교 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84)와 달리 후스는 대중 앞에서 설교를 통해 가르침을 설파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라고 촉구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해서 청빈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여 소귀족들과 도시 공민 등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1412년 후스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교회는 이에 역시 대응하였으며, 바츨라프 4세는 교회 편을 들어서 결국 후스는 프라하에서 떠나 남부 체코의 코지흐라데크에서 소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1414년 10월 스위스의 콘스탄츠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는데, 로마 왕이자 바츨라프 4세의 동생인 지크문트(Sigismund Luxcemburg)가 안전을 보장하면서 후스로 하여금 종교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자 후스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 판단, 동의하였는데, 그는 콘스탄츠에 오자마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약 1년 후 1416년 5월 30일 같은 곳에서 후스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프라하의 예로님(Jerome of Prague)도 처형당했다.

 

후스의 처형은 체코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체코 땅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415년 가을에는 여러 귀족들이 콘스탄츠 종교 회의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후스의 가르침에 따라 체코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으며, 프라하 대학교 교수들과 체코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성만찬때에 신약성서최후의 만찬이야기에 근거하여 포도주를 모두 나누었으며(그 전에는 성직자들에게만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후스가 살아 있을때 지지자들이 후스의 허락을 받아 이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포도주를 담은 성반은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후스주의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고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의 노베메스토에서 얀 젤리프스키(Jan Zelivsky)가 주도하는 강경파 후스주의자들이 동료 후스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 의회 의원들을 시청 창문 밖으로 던지는 제 1차 창문투척사건이 발생했으며, 며칠 뒤 바츨라프 4세가 죽자 후스주의자들은 보헤미아를 장악하게 된다.

 

 

 

 

 

 

 

블타바강은 체코 서부의 강으로 전체길이 435.4㎞,
   ◦유역면적 2만 8088㎢.
   ◦엘베강의 지류로 독일어명은 몰다우(Moldau)강이다.
     체코 남서부 보헤미아 삼림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마루에 직교하는 지구대(地溝帶)에 이르러 흐르는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어 수도 프라하의 시가를 가로질러 약 30㎞ 하류에서  엘베강으로 들어간다.  

 

 블타바강의 까를교

 

 

 

 

 

 

 

 

 

 

 

 

 

 

 

 

 

 

블타바강의 모습

버스 타러 가면서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