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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 [Pisa]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 피사 주의 주도.
리구리아 해에서 약 10㎞ 떨어진 곳에 아르노 강을 끼고 있다. 고대 피사에는 로마 제국이 해군기지로 쓰기 전까지 리구리아인들이 거주했다. BC 180년 이후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313년에 그리스도교 주교관구가 되었다. 중세 동안 이곳은 강성한 토스카나의 도시국가이면서 활발한 상업 중심지였다. 11세기에 토스카나의 거대한 후배지에서 나오는 생산물과 그것의 유통을 이용·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침략자들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도 앞장 섰다. 1016년 피사인과 제노바인들은 사라센족을 사르데냐 섬에서 몰아냈으며, 1063년 피사의 함대가 이슬람교도들의 팔레르모를 약탈했다. 십자군에 참여함으로써 시리아에 있는 피사 상인들의 상업적인 입지를 보호받을 수 있었다. 피사는 해상에서 제노바, 육지에서 토스카나의 경쟁도시들인 루카·피렌체 등과 오랫동안 충돌하는 가운데, 대체로 독일 황제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같은 다툼은 1284년 멜로리아 전투에서 피사가 제노바 함대에 패배함으로써 절정을 이루었다. 대량의 상품이 계속 피사를 통해 유통되었으나 15세기에 이르러서는 강의 수로 변화와 육지 높이의 변화에 따른 침니 때문에 짐을 실은 갤리선(船)이 아르노 강 상류까지 운행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피사가 누렸던 번영은 보통 벽돌과 돌로 지어진, 사람이 거주하는 높은 탑인 카사토레와 특히 대성당, 세례당, 종탑(피사의 사탑)으로 이루어진 웅장하고 훌륭한 교회 건물군에 잘 반영되어 있다. 대성당과 세례당은 계속해서 유명한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었는데, 대성당 최초의 설교단(1162)은 굴리엘모 피사노, 청동문(1180)은 보난노 피사노, 세례당의 설교단(1260)은 니콜라 피사노, 현존하는 설교단(1310)은 니콜라의 아들 조반니 피사노 등이 조각했다. 내분으로 흔들리던 피사는 1406년 피렌체인들에게 정복되었다. 1494년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일시적으로 독립을 회복했으나 일련의 전쟁과 포위 공격을 겪은 뒤 1509년 다시 피렌체에 정복되고 말았다. 그뒤로는 쇠락하여 토스카나 지방의 일개 도시로 명백을 이어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출생지로서 아직도 대주교관구이며, 큰 대학교가 있다. 또한 중요한 철도 교차점이며, 경공업의 발달로 도시가 번창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크게 파괴되어 풍치가 줄어들었으나, 약간의 붕괴 위험마저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사의 사탑 을 보기 위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인구 85,379(2001 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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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사탑 - Torre Pendente
현재 기울기 5。 30′로 매년 1mm씩 기울고 있다는 이 사탑은 지상으로부터 54.5m이다. 1174년에 착공하여 10m 높이에 이르렀을 때 지반이 내려 앉아 공사를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 건설하여 1350년에 8층 탑으로 완공되었다.294개의 계단이 내부에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시가지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갈릴레이가 이곳에서 낙하 실험을 했다고 한다.
피사 대성당[Pisa大聖堂]
피사 대성당은 유럽 중세 시기에 이탈리아의 상업도시였던 피사에 위치해 있는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건축을 대표하는 주교좌 성당(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피사의 사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종루, 세례당, 묘지 캄포산토(성스러운 토지라는 뜻) 등을 갖추었다. 이 성당은 팔레루모 해전의 승리를 기념해서 1064년 그리스인 부스케투스(Buschetus)의 설계에 의해서 기공하였고, 1118년에 헌당되었으며, 12세기 말에 라이날두스(Raynaldus)가 서측 부분을 연장해서 돔을 설치하고 13세기에 파사드가 완성해서 준공했다
피사의 사탑 [Torre Pendente di Pisa, ― 斜塔]
피사에 있는 중세 건축물
기단이 가라앉아 수직면에서 5.2m 기울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피사의 성당 복합체 가운데 3번째이며 마지막인 구조물로 1174년에 착공된 이 종탑은 56m 높이로 설계되어 흰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건물의 기초부가 무른 땅속으로 기울어지게 가라앉는 것을 발견한 때는 이미 전체 8층 중 3층까지 완공되어 있었다. 책임 기술자였던 본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4세기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근대에 들어서 기초에 액상 시멘트를 주입해 보강했음에도 20세기 후반까지 여전히 붕괴의 위험이 있어 사탑을 구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이 구상되고 있다.
피사의 사탑
피사의 사탑은 중세 도시국가이던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종탑입니다. 흰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높이 55.8m의 8층 건물입니다. 탑 내부에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을 통해 종루까지 올라 갈수 있습니다.
피사의 사탑은 1174년부터 이탈리아의 천재건축가 보라노 피사노의 설계도에 따라 탑을 만들어 가던 중 3층까지 쌓아올렸을 때 지반 한쪽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위하여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더욱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공사를 몇 번씩 중단했으나 결국 176년 만인 1350년에 기울어진 상태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후 1년에 1mm정도 기울어지는 미세한 현상이 누적되다보니 오늘날과 같이 탑이 수직선에서 5m나 기울어 졌다. 사탑은 그간 납 16톤을 탑 바닥에 깔고 6백 톤짜리 평형추를 매설해 보수공사를 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사탑의 기울기를 13cm나 바로 세우는데 성공해 130년 전의 기울기 상태로까지 회복되었습니다. 계속 공사를 해 지금은 26cm가 더 바로 서게 되어 사탑의 기울기가 300년 전과 같게 되었고 더 이상 기울어 지지 않도록 보수했습니다.
이렇게 기울어진 상태에서도 수백 년 동안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어 중국의 만리장성, 영국의 스톤헨지, 이집트의 피라미드,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터키의 성소피아 성당, 그리고 로마의 콜로세움과 더불어 세계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문화유산이 된 것입니다
주세페 토니올로(Giuseppe Toniolo)
크리스피 정권은 가톨릭과도 대립했다. 통일 이래 교황청은 이탈리아 왕국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이었고, 이탈리아 가톨릭교도로 하여금 선거에 불참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정계의 많은 유력 인사와 보수 정당들은 자유주의 계열의 가톨릭과 협력관계에 있었는데, 교황청의 이러한 조치는 자유주의 가톨릭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으로 가톨릭은 '대회 활동단'을 중심으로 사회 ・종교적 영역에서 활약했으며, 가톨릭계 사회이론가인 주세페 토니올로(Giuseppe Toniolo)는 노동조합과 조합 은행 창설에 진력하기도 했다. 1891년,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을 발표해 가톨릭교도의 정치 참여를 부분적으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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