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인생 시련기의 믿음 /(욥 30:19-24)

미션(cmc) 2012. 7. 30. 16:53

인생 시련기의 믿음

(욥 30:19-24)
(욥 30: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욥 30: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욥 30:21)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욥 30:22)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욥 30:23)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 (욥 30:24)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신 불신을 막론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두 가지의 가능성 중에 하나는 언젠가는 한번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언젠가는 한번 위기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의 시련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전성기가 영원한 줄 알고 자만하다가 자기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전성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기회로 선용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욥이 인생의 전성기에 그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정의롭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욥에게는 하늘에 상급 대신에 마치 종합선물보따리처럼 여러 가지 재난이 일순간에 몰아 닥쳤습니다.
마치 산사태나 쓰나미처럼 일순간에 모든 것들을 다 싹 쓸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세상에 아무리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일지라도 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최악의 시련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것으로 시련이 다 끝이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욥은 그와 같은 인생의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요?
오늘 우리는 욥 30장 전체의 말씀을 통해서 인생 시련기에 욥의 신앙을 살펴보면서, 만일 나에게도 그와 같은 인생 시련기를 맞게 된다면 어떤 믿음으로 그것을 이겨나가야 하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욥이 당하는 모욕
욥은 지금까지 누구에게 비난 받을 만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가슴 아파하는 것은 자신의 처지가 어려워지자 과거에 자신에게 은혜를 입었던 자들이 돌아서서 자기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가장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욥 30:1)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여기서 ‘젊은 자’라는 말(ry[ix)은 ‘어리다’는 뜻만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라는 뜻으로 멸시를 받을 정도로 무가치하다는 말입니다. 또 ‘비웃는 구나’라는 말(qj'c;)은 경멸적인 웃음으로 조롱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욥이 자기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욥을 비웃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지난 총선 때 찬송가를 개사하여 기독교를 조롱하는 노래를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하였던 것처럼 노래까지 만들어 욥을 조롱하는가 하면, 미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욥 30:9)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욥 30:10)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
과연 그들이 욥을 조롱할 정도로 의로운 사람들이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어느 면으로 보든지 욥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비천한 자들이었습니다.
(욥 30:8)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
다시 말해서 그들은 젊은이가 지녀할 패기와, 정의와 진리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갈망이 없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야망이나 꿈도 없는 무능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욥의 인생 전성기 때에 욥을 보면 겸손한 체하고 존경하는 체 하면서 길을 비켜서던 자들이었습니다.
(욥 29:8)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그러나 욥이 인생 시련기에 접어들어 비천하게 되자 그들은 이전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욥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모습은 욥에게 더욱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 자존심이 가장 강할 때가 육체적으로 시련이 클 때입니다.
사람이 힘이 있을 때는 웬만한 모욕이나 조롱은 못들은 체 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비참하게 되면 연약한 자존심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자존심을 건드리게 될 때 가장 고통스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블레셋 사람들에게 머리가 깎이고 두 눈이 뽑혀 온갖 모욕과 멸시를 당하였지만 잘 참았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왕들이 함께 모여 다곤 신에게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잔치를 벌여 놓고 힘이 빠진 삼손을 불러내어 실컷 놀려 대며 장난치며 재밌어 할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오늘 젊은이들이 욥을 ‘비웃는 구나’ 와 같은 단어(qj'c) 입니다.
[삿 16: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삼손은 그와 같은 조롱을 당할 때 지금까지 잘 참았던 삼손도 견디지 못해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최후의 소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삿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하나님이 삼손의 기도를 들어 주셨을 때 삼손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두 기둥을 밀어 신전을 무너뜨림으로 그 안에서 희희낙락하며 삼손을 모욕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일순간에 다 죽게 하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말이나 특히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나, 문자를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은망덕하고 돈 앞에서 양심도, 의리도, 도덕도, 윤리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히 변화를 받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바보 같은 삶 같으나 오히려 모든 시대를 이겨내낼 수 있는 선진화된 삶인 것입니다.

2. 욥이 당하는 더 큰 고통
욥은 마치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인생의 전성기에서 시련기에 처하자 욥을 위로하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까닭 없이 조롱하는 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과 맞닥뜨려 따지고,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참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보이거나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그들 이면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들을 막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시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비천한 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 같지만 배후에는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욥 30:11)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욥이 잠잠히 있으면 있을수록 어리석은 자들은 욥을 더욱 압박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제 욥은 진짜 두려움에 빠져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고 기력은 더욱 쇠약해지고 그의 육체적인 고통은 가중되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욥 30:15)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 (욥 30:17)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이것이 바로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 하늘나라와 부활에 소망을 잃어버리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견디고 이겨낸다면 그것은 신앙심으로만 가능합니다. 그 사람들이 지난 날 순교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인생의 시련기에서 욥이 더욱 견디기 어려워한 고통은 사람들로 말미암은 시달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관심과 외면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고난 가운데 내던지셨고, 욥이 주께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는다고 절망적인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욥 30: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욥 30: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더욱 고통에 몰아가시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될 때 마음에 밀려드는 깊은 절망감입니다.
욥은 가중되는 고난 앞에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욥 30:21)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욥 30:22)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이제 하나님은 욥을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몰아가시는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욥 30:23)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
그와 같은 욥의 처지는 너무나 비참해서 어느 누구라고 욥과 같이 된다면 당연히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시련을 욥 30:26 이하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욥이 그처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지만 밀어닥친 것은 고생뿐이고,
2) 그토록 환한 빛 비추기를 바랐더니 덮친 것은 어둠뿐이고,
3) 근심, 걱정, 괴로움으로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4) 날이면 날마다 고통으로 마치 시베리아 겨울밤을 가르는 이리의 부르짖음처럼, 아프리카의 들판에서 슬피 우는 타조처럼 울부짖었습니다.
5) 욥의 살갗은 거무튀튀하게 되었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고,
6) 뼈는 몸의 열기로 타버린 것처럼 되었고,
7) 아름다운 비파나 피리 소리가 애곡과 통곡 소리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욥이 인생의 전성기에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었으며, 이웃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서 약자의 편이 되어 정의로운 삶을 살았는지를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시면서 왜 욥을 그같이 처참한 상태에 내버려두신 것일까요?

3. 하나님의 넘치는 기대
하나님은 정말 욥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처럼, 욥을 고난 가운데 내던지시고 죽음가운데 몰아가시는 무자비하고 몰인정하신 하나님이실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기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더 잘하기를 바라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 대한 사랑의 기대가 그 만큼 크셨기 때문에 욥을 놓고 사단과 게임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사단의 말처럼 고난 앞에 좌절하고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연약한 믿음이 아니라 끝까지 승리하는 자신 만만한 욥의 모습을 기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욥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처럼 욥을 고난 가운데 내던져 버리시고, 욥이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서 응답하지 않으시고, 죽이기로 작정하시고 서서히 죽음의 길로 몰아가시는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신앙의 타이틀을 획득할 때까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욥을 지켜 보시며 응원하시는 분이지, 결코 욥의 생각과 말처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욥이 그 사실을 모르고 그 하나님을 못 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 답을 다 알고 있는 우리가 생각해도 그같이 믿음이 약해진 욥이 그저 안타깝지 않습니까? 하물며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실까요?
물론 욥이 인생의 시련기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욥이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 30: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욥 30:24)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정도와 상황의 차이는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삶은 사단과의 치열한 영적 전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시는 동일한 기대와 목표는 고난과 시험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마귀의 시험과 도전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맞서 싸워 승리하는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물론 나 같은 죄인이, 나 같이 연약한 자가 감히 어떻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체로 오셔서 오늘 성경에서 욥이 당하는 그 이상의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욥처럼 연약해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시지 않고 끝까지, 묵묵히, 최선을 다해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의 잔 앞에서 한순간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오늘 우리들처럼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예수님은 이내 그 기도를 접으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셨고 그 원하신 대로 끝까지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참는 것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앞에 있는 부활의 기쁨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부활의 기쁨이 십자가의 고난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고 영광스러웠기 때문에 참으실 수 있으셨고, 개의치 않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뿐 아니라 고난을 받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오는 고난은 죄로 말미암은 징계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나를 향한 기대가 얼마나 크신지를 가늠하는 선물임을 믿어야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욥과 같은 인생 시련기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믿음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기까지 합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욥과 같은 인생 시련기를 맞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과거의 추억을 만들고, 또한 아름다운 내일을 좌우하기 때문에 오늘을 무책임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가는 영원한 세상이 있고, 죽으면 말짱 헛된 것이 아니라 부활과 영생이라는 영원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시련기를 만날지라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욥이 인생의 시련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욥이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 30: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욥 30:24)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이것이 바로 인생 시련기에 욥이 보여준 믿음입니다. 혹시 오늘 우리 중에 욥처럼 인생의 시련기에 처한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그 때문에 좌절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신앙을 포기할까?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의 문제가 더 좋아질까요? 물론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나의 생각과 판단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확률이 반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틀림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나의 신앙을 50%의 확률에 기대지 말고, 오직 승률 100%인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전폭적으로 다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설령 인생의 시련기를 만날지라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노라면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아하! 하나님이 이래서 그렇게 하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를 만나도 마치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 손가락만으로도 좋으니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도우심을 부르짖어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 생각으로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신뢰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밀고 나가는 것만이 내가 살고 승리하는 바른 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인생 시련기를 맞게 될지라도 그러한 믿음으로 인내하고, 침묵하고, 감사하고, 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더욱 더 영광스럽게 하시고, 하늘에 상급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잠 24: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