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욥 32:4-10)

미션(cmc) 2012. 8. 18. 09:02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욥 32:4-10)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7]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8]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9]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행동이 아니라 말의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구세주이고, 성경은 그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은 신앙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 것이고, 기도도 사람의 말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고, 전도는 사람들에게 말로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입으로 신앙고백 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렇다면 오늘 나는 가정이나 이웃이나 직장이나 교회를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나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할 때 어떤 자세로 말을 주고 받는가?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며, 이제부터라도 어떤 자세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말을 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불화하지 않고 화목하게 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을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엘리후의 경청
욥이 재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많은 사람들이 들었지만 지난 욥기 2장에 보면 욥을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욥을 찾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욥 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욥이 급작스러운 재앙으로 일순간에 십남매의 자녀들을 다 잃고 큰 슬픔에 잠겨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위로가 절대로 필요하였습니다. 아마도 친구들을 처음 맞이했을 때 욥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친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욥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마치 취조를 받는 피의자처럼 친구들에게 사방으로 공격을 당하면서 욥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도리어 부담이 되고 결과적으로 욥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 욥을 찾은 친구들의 동기는 참 바람직한 것이었으나 대화가 빈번해지면서 좀 더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질문하고 공격하고 설득하고 정죄하려고 하면서 결과는 위로가 아니라 상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욥과 친구들과 마치 탁구공처럼 주고받던 대화가 지난 주 욥기 31장에서 욥이 자신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삶, 물질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당당하게 변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욥의 친구들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 때 난데없이 엘리후라는 친구가 32장에서 시작하여 37장까지 혼자서 기나긴 논쟁을 늘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엘리후라는 친구는 어떤 정체의 인물인가요? 우리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욥과 치열한 논쟁을 벌렸던 친구는 분명히 세 명 뿐이었는데 오늘 성경에 엘리후라는 친구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욥 32: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엘리후의 아버지 바라겔은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뜻입니다. 엘리후라는 이름은 “그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엘리후 가정의 중심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가정이었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여기서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리겔의 아들 이라는 말은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인 부스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 22:20]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창 22:21]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엘리후’라는 이름(Whylia)의 뜻은 ‘엘’(la)’이라는 말과 ‘후’(aWh라는 두 말이 합쳐진 것으로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시다’이라는 뜻의 신앙적인 이름으로 사무엘의 증조부입니다.
[삼상 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욥의 세 친구가 번갈아 욥과 논쟁을 벌려 왔는데 엘리후가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요? 아니면 함께 있다가 뒤늦게 발언을 하는 것일까요?
만일 갑자기 나타나서 욥과 친구들이 나누는 한 두마디 말만 듣고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일입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지금까지 나누는 대화를 다 들었으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뒤늦게 하는 말이라면 주목하고 들어야 할 신중한 말일 것입니다. 엘리후는 그 둘 중에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1]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여기서 엘리후가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는 말(@z"a)은 미완료형으로 지금까지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는 말을 모두 다 듣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평소 우리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의 생각을 말에 담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하는 말을 듣기도합니다. 그럴 때 문제는 어느 한쪽 편의 말만 듣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섞어서 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습니까?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정확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경청’이라고 합니다.
엘리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말도 귀 기울여 들었고, 친구들이 하는 말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래야만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됩니다. 어느 한쪽에 말만 듣고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중립을 지켜 객관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본보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이시고, 화해자이십니다. 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요, 중보자요, 화목주라고 말하는지 그 이유는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신성과 더불어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구태여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공평한 화해자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받을 축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화평케 하는 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려거든 무엇보다 말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편의 말을 다 들어 보지도 않고 양편을 중재하겠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화평이 아니라 오히려 불화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하고 본받아야 할 사람은 남에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경청하는 사람입니다.
(잠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 엘리후의 침묵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는 말을 듣다가 보면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듣기만 하겠다고 다짐했던 결심도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열을 내며 수다를 떠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엘리후도 그와 같은 현장에 함께 참석하여 모든 상황을 보고 들었으면서 왜 그와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엘리후도 욥의 다른 친구들처럼 욥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음을 그의 고백에서 볼 수 있습니다.
[18]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19]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20]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그렇습니다.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답답했던지 침묵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마치 발효가스가 가득하여 폭발 직전에 있는 포도주통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가 그것을 꼭꼭 짓누르며 기다리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고, 후환이 두려워서 할 말을 꾹 참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못해서 마치 발효가스가 가득한 포도주 통과 같이 폭발 직전의 심정이었음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가 그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켜 온 것은 나름대로 중요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모두 자기보다 연장자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예의표시로 묵묵히 지켜보며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여기서 ‘감히 내놓지’라는 말(arey)은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라는 뜻으로 엘리후가 평소에 윗사람에게 어느 정도 예의를 지켰는가? 하는 것을 짐작케 하는 말입니다.
엘리후는 이제까지 네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들보다 나이가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 32:7)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엘리후처럼 침묵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유익은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고, 화목과 평화를 맛보게 되고, 사람과 원수를 맺지 않게 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얻게 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유익을 얻게 됩니다.
(잠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엘리후는 겸손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십계명의 구조를 살피게 되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젊은 것도 아니고 오늘의 노인은 어제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노인을 볼 때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이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성경의 엘리후처럼 예의를 지키는 것이 결국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인 것입니다.
만일 가정과 사회와 교회의 구성원들이 예의가 없고 무질서하게 되면 그 공동체는 바람 잘 날이 없고 또 희망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회 질서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사회의 질서를 잘 유지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레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잠 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인 질서와 윤리적인 질서를 무시하지 않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것이 교양이고, 인격이고, 신사적인 신앙입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가 위아래의 질서가 붕괴된 혼돈입니다.
점차 사람들은 예의나 질서보다는 이해관계가 우선이 되었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자신의 판단과 다르다고 생각되기만 하면 남을 험담하고 악필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무례하고 무질서한 일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위아래가 없는 무질서하고 혼돈된 세상에서 질서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정과 직장과 교회 안에서 마지막까지 질서를 가지켜 나가는 지킴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3. 엘리후의 발언
오늘 성경은 엘리후가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오늘 욥 32장에서 시작하여 욥 37장까지 혼자서 변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후가 갑자기 왜 그렇게 말이 많아졌을까요? 그것은 욥과 친구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논쟁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 욥이 일방적으로 자기의 무죄함을 변호하는 말만 하는데 누군가가 욥에게 바른 말을 해주어야 하는데 욥의 친구들은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오늘 성경에서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쪽에 다 공정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욥에 대해서
엘리후는 지금까지 욥이 하는 말을 종합할 때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의인시 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화를 냈습니다.
[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물론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자신이 그만한 벌을 받을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해왔습니다.
그러한 욥이 엘리후가 생각할 때도 다른 친구들의 말처럼 못마땅하게 생각이 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의롭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하게 보일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2) 친구들에 대해서
엘리후는 욥에게만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욥이 자신은 무죄하고 나름대로 성결하고 의롭게 살아왔다는 변론에 대해 욥의 친구들이 묵묵부답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이 되어 화를 냈습니다.
(욥 32:3)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욥 32: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이처럼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 쪽에 치우치거나 아첨하지 않고 욥과 친구들이 둘 다 똑같이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을 하고 코를 벌름거리면서 화를 발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 보면 누구의 말이 더 옳고 누구의 말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와 더 가까운가에 따라 어느 누가 옳고 그른가 하는 것보다 누가 더 나와 가까운가를 판단하여 어느 한 쪽 편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불리하지 않도록 침묵과 웅변을 조절하여 두둔하는 식의 발언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결코 지혜도 용기도 아니며 가장 비겁한 처신입니다.
진정한 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해하고 평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고 화목을 깨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약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3) 아첨하지 않는 발언
엘리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공정한 발언을 하기 위해서 어느 편에도 아첨하지 않았으며 만일 아첨을 했다면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시기를 바란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할 정도로 나름대로 공정을 기하는 발언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1]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여기서 ‘아첨’이라는 말(hn:K)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언행을 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첨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보다 아첨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첨은 듣는 사람에게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때문에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성경이 금하였습니다.
(잠 26:28)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시 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잠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 보면 누구의 말이 더 옳고 누구의 말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와 더 가까운가에 따라 어느 누가 옳고 그른가 하는 것보다 누가 더 나와 가까운가를 판단하여 어느 한 쪽 편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불리하지 않도록 침묵과 웅변을 조절하여 두둔하는 식의 발언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결코 지혜도 용기도 아니며 가장 비겁한 처신입니다.
진정한 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해하고 평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고 화목을 깨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과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똑같은 말이지만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엘리후가 현장에서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하는 말이지만 다분히 욥이나 친구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더구나 자기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라고 예의를 갖춰왔다고 하지만 마지막에 화를 냄으로 지금까지 노력했던 것과 달리 무례한 모습을 드러냄으로 지금까지 연장자 앞에 침묵을 지켜왔던 것과 정반대의 자기모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은 엘리후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이 침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할 말을 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라는 것과 더불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공평하게 판단하고 공평하게 말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공평하지 못한 주관적인 판단으로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전후 좌후를 충분히 살펴서 사실에 입각한 말을 합니까? 아니면 남이 ‘그렇다고 하더라’는 말을 가지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라는 짐작만 가지고 들어보지도 않고, 말을 중간에 가로 막고 내 주장, 내 생각이 절대인 것처럼 상대방을 설득하는 식의 대화를 하지 않는지요?
만일 그러한 대화라면 안하는 것이 더 좋고 할수록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에 엘리후처럼 말하기보다 먼저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교육심리학자 블룸(Venjamin Bloom)은 가정 요건에 대하여 언어 환경과 물질적 환경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물질적 환경이란 안락하고 좋은 의식주를 말합니다. 언어 환경이란 어떤 말을 주고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중요한 것은 물론 언어 환경입니다.
우리가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어떤 말을 하며 어떤 말을 들으며 어떤 단어를 구사하느냐, 얼마나 친절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을 주고받고 사느냐 하는 것이 행복을 좌우합니다. 좋은 집에 산다고 좋은 환경이 아니요, 큰 교회를 다닌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언어 환경이 좋아야만 좋은 가정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물론 얼핏 듣기에는 지당한 말이지만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새겨들을 만한 지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 에 따라 말 한 마디로도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처럼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두 사람 이상의 관계를 지켜보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살아갑니다.
그와 같은 인간관계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긍정적인 관계이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관계입니다.
긍정적인 관계는 칭찬과 위로와 격려와 나눔을 통해서 희망과 용기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부정적인 관계는 불화하고 갈등함으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심지어 시기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증오함으로 불행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관계냐? 아니면 부정적인 관계냐? 하는 것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경청하려는 자세, 끝까지 예의를 지키려는 자세, 끝까지 공정하려는 자세가 필요하지만 설령 그렇게 했다고 해서 자기 생각이나 말이 마치 하나님의 계시인 것처럼 과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처럼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두 사람 이상의 관계를 지켜보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살아갑니다.
그와 같은 인간관계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긍정적인 관계이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관계입니다.
긍정적인 관계는 칭찬과 위로와 격려와 나눔을 통해서 희망과 용기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부정적인 관계는 불화하고 갈등함으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심지어 시기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증오함으로 불행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관계냐? 아니면 부정적인 관계냐? 하는 것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