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욥 33:12-18)
(욥 33: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욥 33: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욥 33:14)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욥 33: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욥 33:16)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욥 33: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욥 33:18)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등지고 있는 사람이나,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진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켜야 할 책임과 의무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욥 32장을 통해서 욥의 친구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엘리후가 욥과 친구들 사이에 끼어들어 어떻게 중재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교훈과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엘리후의 변론은 오늘 성경 말씀에서 계속되어지는 가운데 욥기 36장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면 상대방을 무시하고 무차별 공격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연장자인 욥에게 깎듯이 예의를 차리고 매우 진지한 태도로 논쟁을 시작하는 것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화해자의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를 잘 본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정직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욥 33:3)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하나님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교회로 불러 모으신 것은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전도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뢰도가 점점 낮아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화해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방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려고 하기 전에 상대방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언행심사가 불신자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고 신뢰와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 성경에 엘리후처럼 정직과 진실한 자세로 상대방에게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 33:3)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엘리후는 욥을 설득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욥에게 정직한 마음으로 진실만을 말하기도 다짐하였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사탄의 거짓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귀를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우리는 지난주일 오후 이단세미나를 통해서 이단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가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단들은 교회 안에 은밀하게 침투하여 온갖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고 모략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거짓말이 죄가 아니라면 지난 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마음 중심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고문과 핍박을 당할 때 일시적으로 거짓말만 했어도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방에게 신앙적인 권면이나 복음을 전하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정직한 말이 아니라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며 거짓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시 7: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하나님을 믿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정직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정직하지 못한 대화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열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어떤 신분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진실하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예수님이 친히 본보여 주신 것이 바로 사마리아 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물 길러 나온 여인과의 나누신 대화에 잘 나타내 있습니다.
(요 4: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 4: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2. 성령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욥 33: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여기서 ‘전능자의 기운’이라는 말(hm;v;n])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호흡을 불어 넣으실 때 사용된 하나님의 ‘영’이라는 단어(j"Wr)와 함께 사용된 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호흡을 뜻하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엘리후가 성령이 충만한 상태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보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배운 것이나 경험한 것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욥을 하나님과 화해를 시킬 수 있겠습니까?
특히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이나 지위로 억지로 믿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가 욥에게 변론하려고 하는 까닭은 지금 엘리후 속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함을 믿었기 때문에 그 성령의 권위로 욥에게 변론하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때 아무리 말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열수 없고, 감동이나 확신을 갖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주선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되고,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전 2:4, 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 하였습니다.
엘리후는 결코 자신이 욥보다 더 권위가 있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후도 욥에게 자신도 욥과 동일한 인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욥 33: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의 다른 친구들처럼 일방적인 강요나 설득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서로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대화를 통한 변론을 원하였습니다.
(욥 33:31)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욥 33:32)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 그대는 말하라”
엘리후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욥 33: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욥 33: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그렇기 때문에 엘리후는 피차에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서 억눌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욥 33:7)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엘리후의 이같은 모습은 전에 욥의 친구들이 욥에 대하여 연장자로서 권위의식과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지 않을 만큼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차서 욥을 죄인시하고 정죄하던 고압적인 자세와는 대조적으로 피차 대등하다는 겸손한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침묵과 말씀
지금까지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욥 33: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엘리후는 하나님이 그렇게 침묵하신다고 해서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심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해서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인간의 요구나 원망이나 불평이나 불순종이나 범죄에 대해서 일일이 대응을 하시지 않으실 뿐이지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욥 33:14)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그렇습니다. 사람도 입으로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말하고, 눈으로 말하고, 몸으로 말하고, 글로 말하고, 그림으로 말하고, 일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실지라도 그 피조물을 통해서 여전히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가리켜 자연 계시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계시하시고 그것을 다시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욥 33: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은 인간들로 하여금 교만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막으시고 악한 꾀를 버리게 하시며 죄로 인해 멸망의 구덩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욥 33:16)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욥 33: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욥 33:18)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2) 질병을 통해서 말씀하심
엘리후는 욥은 자기가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대적이 되어 자기를 고난 중에 몰아넣으신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욥 13:26)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욥 30:21)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욥의 다른 친구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욥의 숨은 죄악에 대한 징계와 심판이라고 정죄함으로 욥의 마음을 더욱 닫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엘리후는 욥이 당하는 질고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질병에 걸리게 되면 입맛을 잃게 되고 좋은 음식을 보고도 구역질만 할 것이고, 살이 빠져 몸이 바짝 말라 전에 보이지 않던 앙상한 뼈만 두드러나게 됩니다. 결국은 그의 목숨은 무덤에 다가서고, 그의 생명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 33:19)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욥 33:20)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 (욥 33:21)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욥 33:22)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망하게 하고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성결하게 하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고, 멸망의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사망에의 자리에서 목숨을 건져주시고, 잘못을 고쳐주시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욥 33: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욥 33:18)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질병과 고난 중에서도 감사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죄를 회개하게 되고 성결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주를 위해 열심을 다하는 헌신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시고, 나를 징벌하시고, 나를 버리시는 것처럼 생각되어 절망하게 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엘리후도 다른 친구들과 더불어 똑같이 보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시각은 각기 달랐습니다.
3) 하나님의 긍휼하심
엘리후는 질고 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결코 무자비하고 몰인정하신 분이 아니라 긍휼이 많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변론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을 외면하거나 내 팽겨 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일천명의 천사 가운데 각 사람의 처지를 하나님께 고하고 변호하는 중보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욥 33:23)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멸망의 구렁텅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시고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물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욥 3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여기서 ‘대속물’이라는 말(rp,K)은 ‘몸값, 속전, 뇌물 이라는 뜻으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사상으로 엘리후가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질고 중에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 몸이 어린아이의 새살처럼 회복이 되고, 그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그의 의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욥 33: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그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벌하지 않으시고, 그 영혼을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시고 새 생명의 빛을 비춰주신다는 것입니다.
(욥 33:28)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욥 33:29)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욥 33:30)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엘리후의 이같은 변론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으나 예수님께서 각 사람의 중보자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주셔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엘리후의 변론은 욥이 하나님에 대해 섭섭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두었던 욥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고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심어 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엘리후의 변론은 욥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도 동일한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들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설교자와 전도자를 통해서, 일상생활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통해서 여전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들이 무관심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욥과 동시대의 사람들이 당하는 질고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얼마든지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질고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복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욥처럼 하나님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겪는 크고 작은 고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욥을 시험하던 마귀는 오늘도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일을 위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욥기를 기록한 것은 욥의 이름을 높여주는 위인전기가 아니라 욥이 고난을 이겨내고 받은 축복과 영광이 욥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고난을 통해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를 통해 더욱 성결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깊은 뜻이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날 잘못된 삶을 살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때때로 고난을 통해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시켜 보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화해시키기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종교 개혁자 루터의 저서 ‘식탁 대화’ 의 “세상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죄를 깨닫지 못한 채 양심의 가책 없이 태평스럽게 살아가는 철면피한 사람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좌절감에 사로잡혀 절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고,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멸망할 자임을 잘 알고,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다 일컬음 받은 것을 믿고 감사하며, 믿음으로 온갖 선행의 열매를 맺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몇 번째 부류의 사람입니까? 내가 만일 셋째 부류의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축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사는 것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낙심하고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하나님과 화해를 시키고 하나님을 더 잘 믿도록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깨우치고, 미지근한 신앙심을 불붙게 하는 믿음의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나 혼자 그렇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오늘 성경의 엘리후처럼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전하여 유일한 중보자와 구속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참된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는 화해자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낙심하고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하나님과 화해를 시키는 화해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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