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여기까지 도우셨도다 /(삼상 7:7-14)

미션(cmc) 2012. 9. 1. 18:55

여기까지 도우셨도다
(삼상 7:7-14)

(삼상 7: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삼상 7: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삼상 7: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삼상 7: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삼상 7: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삼상 7: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인간사를 돌아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도 완전 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을 할 때마다 재임기간에 무엇보다 친인척 비리를 철저하게 차단을 하겠다고 다부진 각오와 제도장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것이 얼마나 실천되었는지 인터넷을 검색하였더니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어느 학도가 ‘역대 대통령들과 그 친인척들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대해서’ 라는 제목의 학위 논문이 올라온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 논문은 계속해서 속편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흔히 팔은 안으로 굽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처럼 시간이 흘러가면서 취임 초에 먹었던 결심이 무너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부패한 인간인 친인척들이 대통령을 배경으로 이권 청탁을 요구하는 불의한 재물을 수수한 것이 들통이 나서 대통령에게도 치명타를 주고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현 정권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치고 나는 절대로 아니라고 큰 소리를 칠 사람이 있습니까? 설령 큰 소리를 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누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정의는 마치 도토리 키 재기와 같을 뿐이지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선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백년이 가고 천년이 가도 그 정의가 흔들리거나 변질되지 않는 한결 같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성경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공의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말씀으로 오늘 우리도 그 하나님을 닮아 항상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언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까닭은 그들을 온 세상 만민 가운데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군대에 있어서 특수부대는 그만큼 훈련의 강도가 센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한 훈련도 매우 강도가 높은 훈련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애굽 땅에서 사백 삼십년 동안의 노예 생활, 그리고 물과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광야에서 사십년 간 여러 가지로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셨는데 그것이 바로 새 중에 왕 독수리 훈련이라고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출 19: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출 19: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은 그와 같은 훈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은 그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등기해 놓으신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백 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땅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전무하고 온갖 우상이 만연한 영적 황무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으로 보내어 영적으로 갈아엎게 하신 것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과 달리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만군의 여호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하나님께서 친히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내리신 율법을 국법으로 삼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을 거룩한 땅으로 성별하고 그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세세토록 돌리며 행복하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 10: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숭배와 죄악을 모방하며 배은망덕 한 삶을 살면, 아무리 사랑하시는 백성일지라도 그냥 버려두시지 않고 반드시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이것은 결코 엄포용이 아니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행자지 하였을 때 그 말씀대로 시행하셨음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 시대의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 성경을 우리 신앙의 텍스트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통해서 현재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2. 이스라엘의 패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도우시는 은혜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배은망덕한 삶을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사사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주변의 이방나라들의 빈번한 침략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확고하게 정착하는 시간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경고하신 징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셨는가에 대한 말씀으로 오늘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 성도들에게 큰 교훈을 주시는 예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1) 1차 경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주변에 다곤이라는 우상숭배를 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가시채로 붙이셨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수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가나안 땅을 침략하여 농사를 지은 곡물과 가축 떼를 약탈해 갔습니다.
그것도 시원치 않았던지 나중에는 군대를 끌고 아벡이라는 곳에 진을 쳤고, 이스라엘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에벤에셀이라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여갸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애굽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도우셨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도 도와 주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로 우상숭배하는 블레셋이 이기고 여호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의 피해가 얼마인지 언급이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만 일방적으로 사천 명 가량의 장정들이 전사를 한 것입니다.
(삼상 4: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패전한 원인이 무엇일까요? 전쟁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힘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었으며, 하나님은 이 패전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2차 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그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으며, 패배의 원인을 비본질적인 신앙에서 찾았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배가 군사적인 열세나 다른 원인이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1 차전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증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패배의 원인이 여호와의 법궤를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실로에 가서 법궤를 에벤에셀로 옮겨다가 블레셋과 다시 전쟁을 벌리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 다곤 신상을 선두에 가지고 나왔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은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법궤만 아니라 엘리 제사장의 대를 이을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함께 데리고 와서 블레셋과의 전투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삼상 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과연 2차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을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오히려 대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1차전에서는 사천 명이 전사하였었는데, 2차전에서는 자그만치 삼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치명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블레셋을 능히 이길 것이라고 큰 기대를 걸고 실로에서 가져 온 법궤를 블레셋의 손에 빼앗긴 것만이 아니라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판단이 매우 신앙적인 것 같았으나, 실상은 변질된 것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우상주의를 본받은 세속화현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찍이 모세를 통해서 그와 같은 경우 패배하게 될 것을 오래 전에 경고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그와 같은 원칙을 선포하셨으며,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그 원칙을 벗어났을 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신 28:25)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바로 그 패배의 장소가 ‘에벤에셀’ 곧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인해 결국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를 매우 귀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진영에 가져오기만 하면 그 궤가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줄'것이며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란 제도상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신성한 궤를 귀중히 여김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임을 증명할 수 있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게 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종교의 본질을 떠난 자들이 종교의 의식을 준수하는 일에는 매우 관심을 보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우상시했으며 이방인들이 섬기던 우상이 그들의 신이었던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원리는 오늘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교회로 불러 주신 이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우상화하고, 어느 특정인을 신격화하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승리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여호아 신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착각하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여호와의 법궤를 에벤에셀에서 다곤 신전에 안치하였습니다.
(삼상 5: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아마도 블레셋 사람들이 볼 때 다곤 신상 앞에 놓여있는 자그마한 여호아의 법궤를 보면서 다곤신이 위대하다는 착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하였는지 모르지만 전쟁에 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단 한 번도 패배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시 24: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잘못된 생각에는 동의하시지 않고 패배하게 하심으로 법궤까지 빼앗기게 하셨지만 그 법궤가 블레셋 땅에 들어간 후부터 수많은 재앙이 발생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1)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짐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능하심을 입증하였고,
2) 아스돗 지방에 독한 종기의 재앙을 더하셔서 그 지역을 망하게 하셨고,
3) 법궤가 옮겨가는 곳마다 심히 큰 환난이 그 성읍을 휩쓸게 하셨고,
4)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하므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법궤를 어서 이스라엘 땅으로 보내라고 원성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과연 다곤과 여호와 중에 어느 편이 이긴 것일까요? 법궤는 나무 상자에 불과한 것인데 누가 블레셋 사람들을 그렇게 죽게 하고 괴롭힌 것일까요?
(삼상 5:11)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손’이라는 말(dy:)은 하나님은 사람처럼 육체가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이라고 함은 하나님의 ‘능력, 힘’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시 89:13]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
이는 결코 나약하고 부패한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가려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3. 이스라엘의 회복
불레셋 사람들이 에벤에셀에서 빼앗아 간 법궤를 계속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낸 법궤는 실로에 가지 못하고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간 지 어언간 이십년의 세월이 흘러가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여호와의 법궤를 찾게 되었으며, 그 어간동안에 여호와의 법궤를 찾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도 살았습니다. 그 이십년 동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묵하시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편으로는 우상을 한 편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는 어정쩡한 처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도,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조차 드리지 않은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배반한 묵은 세대를 정화하고 자숙시켜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시는 기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십년의 세월이 흘러가자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의 얼어붙었던 가슴이 이른 봄날의 얼음처럼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삼상 7: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여기서 ‘사모하니라’는 말(hh;n)은 울부짖다, 슬퍼하다‘라는 말의 와우계속법 미완료형으로 돌처럼 단단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뜻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애통하며 여호와를 찾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마음에 뜨거워졌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회심은 여호와를 찾아 탄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를 감지한 사무엘 선지는 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형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전심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려거든 세 가지를 결단하라고 제안하였습니다.

1)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이 그들에게 너희 중에서 우상을 제거하고 전심으로 여호아만을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화와 순종
사무엘 전 이스라엘에게 미스바에 모여 기도의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는 말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사무엘이 지시한 미스바로 다함께 모여 여호아께 회개하였습니다.
(삼상 7: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군대를 이끌고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미스바로 쳐들어 왔습니다. 아무런 전쟁준비를 하지 않고 비무장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는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위기를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쉬지 말고 하나님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자기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삼상 7: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이 같이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며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과거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여호와의 법궤를 앞세웠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승리케 하신 하나님
이에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에 여호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블레셋과 싸워 패하게 하셨습니다.
(삼상 7: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드린 것은 단지 한 마리의 젖 먹는 어린양이었습니다.지난 날 법궤를 빼앗기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홈니와 비느하스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사무엘은 이를 기념하여 자자후손들에게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미스바와 센 사에 돌을 취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그곳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였습니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배은망덕할 때는 패배하였던 에벤에셀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여호아께로 전심으로 돌이켜 회개하고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드렸을 때에 승리의 에벤에셀이 되게 하셨습니다.

4) 보다 더 확고한 승리
에벤에셀이라는 말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으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다 더 확고한 승리를 보장하여 주셨습니다,

가) 블레셋을 막아주심
(삼상 7: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킴
(삼상 7: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평화시대를 맞아 우상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 사무엘의 지도를 받는 신앙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들 주변에는 수많은 복음의 대적자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마치 블레셋에게 패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의 신앙이 마치 여호아의 법궤로 블레셋을 이기겠다고 하다가 법궤도 빼앗기고 제사장들도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처럼 비본질적이고 기복주의 적인 변질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계 교회앞에 짧은 역사 속에서 크게 부흥했다고 자랑했던 한국 교회는 이제는 머리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침체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교회 부흥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이 나라 민족과 교회는 위기를 도리어 기회로 만들어 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바로 그와 같은 변화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미스바로 모여 지금 한국교회와 나 자신이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지 돌이켜 회개하고 무너져 내린 순수한 말씀과 기도의 제단을 회복하고 십자가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배우고 본받는 새로운 변화가 요청되는 세대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려는 열심이나 담대함도 부족합니다. 엘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하나님의 진노는 오늘날의 나태한 우리들에게 경각으로 믿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언약궤와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가장 소중한 유산이며, 또한 우리들은 오직 언약궤와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그들을 축복하신 여호와께서 이제부터 영원히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건지셨던 분께서 지금도 건지시며, 또한 건지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국가적인 정치, 경제, 사회문제 . . .모든 문제의 해결은 신앙적인 것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결정 됩니다.
* 일치된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 핑계하지 마십시오. 책임전가하지 마십시오.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곳에 하나님이 가까이 게십니다.
* 기도하는 모임에는 어떤 사단의 공격도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예화

오랫동안 교회 문 밖에서만 맴돌던 인도의 한 청년이 눈병으로 심히 고통을 당하다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눈을 정밀히 진찰한 의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눈에 살인적인 병균이 들어가 두 눈을 뽑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에 내일 즉시 두 눈을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절망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픔과 번민과 슬픔으로 몸부림치고 있는데 크리스천 친구가 찾아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슨 말인들 못 듣겠습니까? 그는 친구와 함께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데 참으로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예수 믿으라고 할 때는 끄덕도 하지 않던 사람이 자신이 죽게 되자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가 완악했던 마음부터 회개하기 시작하자 기도의 홍수 문이 열려 모든 것을 철저히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눈이 퉁퉁 부을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마음이 홀가분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대에 올랐는데 다시 진찰을 하던 의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토록 심하게 번졌던 독균이 깨끗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의 뜨거운 회개의 눈물은 영육의 생명을 모두 고침 받게 했습니다.(21세기 예화사전-뜨거운 회개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