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왕상 18:22-24)

미션(cmc) 2012. 8. 21. 18:02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왕상 18:22-24)

(왕상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왕상 18: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왕상 18: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의 조상들과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우상과 미신을 믿고 즐겨 제사를 지냅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명하신대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사를 드리는 형식이나 방법의 차이가 아니라 제사의 대상의 차이에 있습니다. 우상은 실재하지 않은 신이기 때문에 응답이 없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응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제사를 다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제사를 드렸을 때 불로 응답하셨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레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대하 7: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대하 7:3)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돌을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그와 같은 구약의 제사는 폐기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제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구약의 제사가 예표한 예수님이 친히 세상에 오셔서 대 제사장이 되어주시고, 영원한 제물이 되어 주시기 위해 죄 없는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려 죽으심으로 속죄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히 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는 어떤 제사입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기도와 감사를 돌려 드리는 예배라는 제사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웃에게 선행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새로운 제사인 예배입니다.
(히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하나님은 이를 위해 구약 시대 레위 지파와 아론의 자손에게만 허락되었던 제한적인 제사장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 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배의 구경꾼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경은 우리가 형식과 습관에 적은 예배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산제사 곧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또한 예배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와 같은 예배자를 찾으시며, 그와 같은 예배자를 만나주시며, 불로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평생 예수를 믿고 수없이 예배를 드렸는데 과연 하나님이 얼마나 나의 예배를 기쁘시게 받으셨으며 또한 내가 몇 번이나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다면 우리는 예배가 항상 즐겁고 기쁘며 기다려지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을 예배 시간마다 경험하는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산 제사요, 영적예배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1. 엘리야가 처한 상황
솔로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남쪽 벧엘과 북쪽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리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이라고 하며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하게 된 단초였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은 역대의 왕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면 그것을 가리켜 ‘여로보암의 죄악’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왕상 14:16)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세월이 흘러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십이 년 동안 얼마나 악을 범했는지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오므리 죽고 그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22년간 다스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오므리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상 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아합은 바알 신을 섬기는 베니게의 왕이자 바알신의 제사장인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을 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대항하기 위해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짓고 자기도 직접 바알신에게 제사를 드렸을 뿐 아니라, 아세라 여신상까지 만들어 세우고 온갖 더러운 일을 행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단을 파괴하고 수많은 선지자를 죽이고 전 이스라엘은 우상 천국이 되게 하였습니다.
(왕상 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여기서 ‘멸할 때에’라는 말은 뿌리채 제거한다는 뜻이고, ‘때에’라는 말( yhiy]w")은 와우 계속법 칼 미완료로 이세벨이 이스라엘 땅에서 선지자들의 씨를 말리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과연 엘리야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에 하늘 문을 닫으시고 비한방울 심지어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짐승들은 풀을 뜯을 곳이 없었고, 백성들은 기근에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땅은 이스라엘 땅과 가까이 붙어 있었으나 그와 같은 가뭄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는 유다 나라는 아직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믐이 너무 극심하므로 아합왕과 오바댜는 친히 가축들에게 먹일 꼴을 찾기 위해 그 땅 전체를 두루 다녀야만 하였습니다.
아합은 계속되는 가믐으로 인해 이미 많은 짐승을 잃었으면서도 여전히 바알을 숭배하면서 여호와께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아합은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를 했으나 그 재앙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은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세벨은 이 재앙의 원인을 엘리야에게 전가하고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 재앙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제 이스라엘 땅에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자들뿐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참 선지자는 씨가 마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 엘리야가 당시 상황을 역전시켜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 엘리야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그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였을까요? 흔히 말하는 것처럼 엘리야는 그 위기를 어떻게 기회가 되게 하였을까요?
1. 엘리야의 도전
엘리야는 아합의 칼날을 피하여 그릿 시냇가에 일 년을 숨어 있은 후에 사르밧 과부의 집에 이년 이상을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 본문 왕상 18:1에서 말하는 제 삼년은 그곳에서 지낸 지 삼년 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상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아합과 이세벨에게 그대로 전하였기 때문에 삼년 육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면서 겨우 목숨만을 보전하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가지고 친히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오늘의 사건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눅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불과 일초 때문에 올림픽에서 메달의 순위가 달라졌다면, 엘리야에게 삼년간의 도피생활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 낙심하기 쉬운 기나긴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삼년의 기간을 순종하였을 때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과 정면 승부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왕상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마치 기름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일처럼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아합을 만나 정면 승부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앨리야를 만난 아합왕은 예상했던 대로 삼년 간의 가믐과 기근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자복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위에 가믐과 흉년을 내릴 것이라고 예언한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장본인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왕상 18: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이것이 선지자의 길이고 주의 종의 길이고 크리스챤의 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뜻대로 살지 못해서 비난을 듣기도 하지만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때문에 비난과 핍박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엘리야는 과연 삼년간의 가뭄과 기근이 누구의 탓인지를 판가름하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불러 모아 대결할 것을 제안하였을 때 아합 왕도 쾌히 승낙하였습니다.
(왕상 18: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왕상 18: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이 소식을 들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올림픽 축구 한일전 중계 방송을 볼 때와 같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갈멜 산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호와를 섬길 것인가 바알을 섬길 것인가 두사이에서 우물쭈물하는 여호와와 바알 중에 하나를 따를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바알에게 마음이 돌아서 버린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그러자 엘리야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예언자는 나 혼자만 남았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나 된다. 우리에게 소 두 마리를 갖다 달라. 저들에게 하나를 골라 각을 떠서 나뭇가지 위에 올리게 하되 불은 붙이지 말라. 나도 다른 하나를 준비해 나뭇가지 위에 올리고 불은 붙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너희 신들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불로 대답하는 신, 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이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어느 편의 제단에 불이 임하는가에 따라 어느 편이 믿는 신이 참 하나님인가를 증명하는 매우 중대한 기회인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는 850 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혼자서 싸워야만 하였습니다. 만일 엘리야의 제단에 하늘에서 불이 임하지 않으면 엘리야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2. 엘리야의 승리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엘리야의 승리였습니다. 바알의 제단에는 불이 임하지 않았지만 엘리야가 쌓은 하나님의 제단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과 나무는 물론 도랑물이 흐를 정도로 흥건하게 적셔진 제물과 나무와 제단의 돌과 흙과 도랑물을 다 불태울 정도로 강력한 불이 하늘에서 임한 것입니다.
(왕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여기서 ‘여호아의 불이 내려서’ 라는 말(lp'n:)은 벼락처럼 한번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와우 계속법 칼 미완료 동사로 마치 소가 풀을 깨끗이 핥아 먹듯이 단번에 싹 쓸어버린 것을 뜻하는 피엘 완료형 동사입니다.

1) 불이 임하지 않은 바알 제단
(왕상 18: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여기서 우리는 불이 당연히 임해야 할 바알 숭배자들의 열심히 특심한 모습을 주목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먼저 ‘아침부터 낮까지’라는 긴 시간과,
2) ‘바알의 이름을 불러’라는 와우 계속법의 지속적인 외침과,
3) ‘응답하소서’라는 바알 신에 대한 당당한 요구의 칼 명령과
4) ‘뛰놀더라’는 껑충껑충 뛰는 와우계속법의 모습입니다.
그 숫자가 자그만 치 850명이라면 겉보기에 열심히 특심하여 금방 하늘에서 불이 내려 올 것처럼 생각되는 열정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자, 정오에서 저녁에 이르기까지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고, 심지어 칼과 창으로 자해를 하여 피가 낭자하게 흐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왕상 18: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그들은 인간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지만 아침이 지나고 정오가 지나고 저녁 소제를 드릴 때가 되었어도 바알의 제단에는 불은커녕 연기조차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왕상 18: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알 신은 실재하지 않은 인간들이 만든 가공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짝퉁신이요, 죽은 신이었기 때문에 불로 응답할 수 없었습니다.

2) 불이 임한 여호와의 제단
엘리야는 바알 편에 서서 불이 임하기를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저녁 때가 되도록 불이 임하지 않자 허탈감에 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1) 제일 먼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돌을 취하여 오므리와 아합왕에 의하여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왕상 18: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2) 그 제단은 석수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보기에 아름다운 제단이나 엘리야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제단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자연 그대로의 열두 개의 돌로 쌓은 투박한 제단이었습니다.
(왕상 18: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 돌로 쌓은 제단위에 제물을 불사를 나무를 얹고 그 위에 소를 잡아 각을 떠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제단 주변에 도랑을 파고 그 제단위에 열두 통의 물을 길어다가 부었습니다.
(왕상 18: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왕상 18: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그 결과 제단은 흠뻑 젖었고 물이 흘러 넘쳐 제단 주변에 도랑물을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왕상 18: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그와 같은 제단에 불이 붓게 하는 일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는 제단의 제물이 불태워질 수 없도록 일부러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을 그 만큼 신뢰하고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면서 한편으로는 바알 선지자들로 하여금 불이 임한 것에 대해서 트집을 잡지 못하게 하는 확실한 대책이기도 하였습니다.

4) 엘리야는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며 자해를 하던 바알 선지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조상 대대로 살아서 역사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 곧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께 산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속삭이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야 할 이유가 자신의 목숨이나 명예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자신이 그 하나님의 종임을 깨닫고 그 마음을 여호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기회가 되도록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왕상 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 같은 엘리야의 기도는 그 형식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시간적으로 보나 너무나 간결하였지만 그 중심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한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전심을 다한 간단명료한 기도였습니다.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엘리야의 기도에 대해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즉시 불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왕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의 '여호와의 불'이란 '번개'와는 다른 초자연적인 불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Lange, Keil & Delitzsch, H. Austel).
구약시대 당시 하나님께서는 1) 당신의 언약을 보증하실 때(창 15:17), 2) 하나님께서 친히 현현하실 때(출 3:2),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실 때(출 9:24), 4) 인간의 제사를 열납하실 때(레 9:24)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불을 내리셨습니다.
갈멜산에 내려온 불은 결코 인간의 조작이나 자연 현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레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그 결과 불이 임하지 않은 바알의 제단은 죽은 신이지만, 불이 임한 엘리야의 제단은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바라고 기도하던 대로 양다리를 걸치고 구경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여호아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왕상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그 대신 아합과 바알 선지자들이 섬기는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님을 입증하여 바알 선지자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그들 잡아 기손 시내가로 내려가서 거기서 죽임으로 기손 시내는 붉은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왕상 18: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오직 전심을 다해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당신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 위해 때로는 상황이나 조건을 오히려 인간이 보기에 더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때로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기회로 알고 믿음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나 기도에 대해 아무런 응답이 없는 죽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엘리야와 같이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까?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오늘 성경에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오늘 우리도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약 5: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정말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릴 때마다 엘리야에게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1)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재건헤야 합니다.
여기서 '수축하다'라는 말은 '고치다'는 뜻으로 새로운 제단이 아니라 이전에 온전했던 제단을 누군가가 무너뜨린 것을 재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각자 자신을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무너진 제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누군가에 의해 바알 제단과 같은 잘못된 제단이 세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기도의 불이 꺼지고 사랑의 불이 꺼지고 성결의 불이 꺼진 한국 교회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와 기도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사람의 귀를 의식하는 웅변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진실한 영적 대화입니다.

2)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단을 쌓음에 있어 자신의 이름이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드리는 기도,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세상에 어느 누구가 아닌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께만 드려지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 이름을 내고 내가 인정을 받고 내가 칭찬을 받고 내가 복을 받기 위한 인본주의 개인주의 기복주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여호와께만 봉헌하기 위해', 혹은 '여호와만을 기념하기 위한' 예배가 되고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고 감사가 되고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여전히 불로 응답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셨을 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약속을 붙잡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불에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그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을 때 불이 임하여 우상이 제거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디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성령의 불로 돌과 같이 굳어진 심령들이 녹아지고 깨어지고 바스러져서 새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돌같이 굳어진 우리의 심령이 불과 같은 성령에 의해 녹아지는 죄악이 불살라지고, 새로운 심령으로 거듭나는 불의 체험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엘리야처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당신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 위해 때로는 상황이나 조건을 오히려 인간이 보기에 더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도 때로 엘리야처럼 고난을 경험하게 하식 위기에 몰아 넣으시는 것은 그 기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불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뭍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기회가 되게 하기 위함임을 믿고 신앙을 포기하지 말고 신앙이 세속화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엘리야처럼 나 홀로 남았을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갈멜 산상의 흠뻑 물에 젖은 제단의 돌과 흙까지 불에 타서 녹아지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전심을 다해 의지하는 자에게 여전히 불로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