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그는 전능자/(욥 34:10-17)

미션(cmc) 2012. 9. 16. 11:01

그는 전능자
(욥 34:10-17)

(욥 34: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욥 34:11)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욥 34: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 34:13)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욥 34:14)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욥 34:15)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욥 34:16)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욥 34:17)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는 가운데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이렇게 연약하고 무능력한 존재인가? 를 자주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자기 한계를 경험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기독교의 가장 큰 미덕인 겸손한 성품을 소유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실감하게 되면 낙심하지 않고 도리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반대로 설령 무엇인가 이루었을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는 분명히 차별화된 무엇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인간관계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욥을 비난하는 엘리후
사람이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잘못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것도 있으며, 잘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잘하는 점에 대해서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칭찬하기도 하면서 사기를 북돋아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와 더불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상대방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보다는 조용히 우회적으로 잘못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상대방을 아끼는 마음으로 충고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욥기는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고대사회의 일화임에도 불구하고 욥이나 그의 친구들의 모습에서도 현대 사회에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문제와 같은 맥락의 모습들을 보면서 아무리 세월이 지난다고 할지라도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 가지 바램가 희망은 엘리후만은 다른 친구들과 달리 공정성을 가지고 욥과 친구들을 중재하여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좋은 사람이기를 기대했으나 오늘 성경에서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1) 엘리후의 여론몰이
욥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엘리후는 그동안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욥 32장부터 소신을 마치 늦장마처럼 쏟아 붓기 시작하였습니다.
엘리후의 말을 관찰하여 보면 엘리후 역시 다른 친구들처럼 욥에 대한 칭찬이나 동정심에 매우 인색하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친구들보다 더 교활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친구들을 부추겨 공개 토론을 통해서 참 진리를 찾아보자는 미명으로 노골적으로 욥을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욥 34:4)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지혜가 많으신 여러 어르신들! 내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시지요. 경험이 많으신 여러 어르신들! 내 말에 귀 기울여 보시지요. 입천장이 음식 맛이 어떠한지를 구별해 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귀라고 하는 것은 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던가요. 그러니 어르신들! 함께 옳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가려 보는 것이 어떠신지요. 바른 것이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는 것이 어떠신지요. 욥 어르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정말 깨끗하고 바르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다. 내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이렇게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렸다. 내게는 아무런 허물도 없으나 이렇게 상처가 심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고 말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2) 엘리후의 정죄
엘리후는 여세를 몰아 욥의 친구들에게 노골적으로 욥은 악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욥 34:7)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욥 34:8)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욥 34:9)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엘리후는 욥이 스스로 의인임을 자처하자 분개하여 욥의 악행들을 나열하는 공격의 진위가 너무 감정에 치우쳐 공평한 '권고'의 차원을 넘어 그를 '정죄'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모두가 공의로운 판단을 할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판단하시며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공의로우신 하나님뿐이십니다.
엘리후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가치기준으로 욥을 '악인'으로 매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그와 같은 판단은 욥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거역하는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변호하는 엘리후
엘리후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욥을 공개적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엘리후의 생각에 욥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종교적인 분노심 때문에 하나님을 변호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 지식을 총동원하여 욥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변론입니다. 엘리후는 오늘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59 번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 엘리후는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욥 34: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욥 34: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 34:17)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이같은 엘리후의 말에는 어떤 이상한 것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인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욥을 정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와 수단에 불과하였습니다.

1) 전능하신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심판하실 때에는 가장 강한 사람조차도 아무 것도 아닐 뿐이라는 것입니다.
(욥 34:20) “그들은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함을 당하느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백성도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떨게 되고, 혼란과 무질서에 빠질 것이며, 세력 있는 왕자라도 하나님의 말 한 마디면 자신의 왕좌를 잃을 것이고, 하나님은 단 한사람의 세력 있는 자를 이기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이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 34:24)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2) 전능하신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또한 인간의 가장 비밀스러운 것도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욥 34:25)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계획하는지 모두 아신다는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고, 하나님의 눈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시다.
하나님은 개인이나 사회나 모든 것을 다 인도하시고 지배하시되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할 수 없고, 변경될 수도 없기 때문에 침묵하기고 가만히 계신다고 해서 감히 누구도 하나님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 34:29)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엘리후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변론은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고 다 옳은 말이고 맞는 말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의 이같은 변론에 문제가 되는 것은 엘리후가 무슨 동기로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거나 잘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전에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던 친구들과 똑같이 욥을 정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빙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오늘 성경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왜 그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에 대해서 역설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의 본색이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굴복시키는 일에 실패한 것을 자기는 반드시 이루어보겠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그러니 어르신께서는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잘못이 있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 34:31)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욥 34:32)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엘리후의 말에 침묵하고 무릎을 꿇지 않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욥을 노골적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욥 34:35)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욥 34:36)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음이라” (욥 34:37)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이와 같은 엘리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과오와 죄에 대해서 판단하는 자가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죄악은,
1) 하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 대신 자신의 말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적 사고를 하나님의 뜻인 양 위장하기 쉬운 것입니다.
2)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타인의 동의를 구합니다. 이러한 자는 상대방의 눈치를 보거나 그의 의견에 따라 주관이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3) 죄인을 회개시킨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나는 너보다 낫고 너와는 다른 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교만입니다.

만일 그러한 자신의 의도가 좌절될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 성경에 엘리후처럼 인정사정없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엘리후는 욥의 잘못을 지적하고 사랑으로 권면하기는커녕 오히려 욥을 더욱 죄 아래 있도록 자신의 분노를 나타냄으로 자신도 욥과 다를 바가 없는 죄인임을 입증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엘리후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욥을 충고하였지만 그것이 잘못된 지식에 근거한 것이기에 욥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진정한 인간의 변화는 강한 자 앞에 억지로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스스로 뉘우쳐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에서 엘리후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말한 것은 하나도 틀리는 말이 아니지만 욥을 무릎 꿇게 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엘리후가 말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말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엘리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논리를 욥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을 시켰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깨달아진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그 선물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먼저 나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이를 테면 오늘 성경 말씀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며, 전지하시며, 절대 주권자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 나는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진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고 불의가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일 것입니다.
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 생각대로 입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화를 할 때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이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 없이한 말이 오해를 낳고 인간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시 34: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사람의 말은 내뱉어진 즉시 허공으로 분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로 씨 뿌려져서 때가 되면 그 말대로 열매를 가지고 다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짓은 거짓의 열매를, 사특한 말은 오해와 중상모략을, 분노는 분노를, 헛된 맹세는 심한 환난과 곤고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심어야 할까요? 그것은 사랑과 진실의 말, 평안을 전하는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그리고 복음의 씨앗을 심는 말이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사랑과 평화, 위로와 진실, 부활의 생명으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마 12:36, 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아무리 천하게 보일지라도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인간의 외모만 가지고 사람을 억압하고 멸시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정면으로 대적하는 죄악이며,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불같은 진노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 10:2)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사 10:3)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하나님의 기준에서 가장 심각한 악은 살인도 아니고 간음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경외하지 않는 것이 악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악들도 사실은 다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인간의 모든 것이 선 대신에 악을 행하게 됩니다.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반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최고의 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돌이킬 때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선인이나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리실 만큼 공평하신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본받아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음을 알고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그리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여 우리가 가진 지식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데 올바로 쓰임 받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가진 지식이 옳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절제가 가미되지 않는다면 독선과 교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전 8: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소 무슨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믿음으로 의롭게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의지로 가능한 것처럼 자신을 자랑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교만인 것입니다.
그 보다 더 나쁜 사람은 자신은 숨어서 더 나쁜 죄를 떡먹듯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실수나 연약함에 대해서는 추호도 동정이나 이해심은 고사하고 무자비하게 비난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연속선상 위에 서 있는 존재들입니다. 과거와 단절된 현재는 없고 현재를 초월한 미래도 없습니다.
오늘의 내 행동이 미래의 나를 결정짓기 때문에 우리는 주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서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오늘의 내 행동이 미래의 나를 결정하며, 현재의 나의 믿음이 영원한 미래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주 앞에 선 자로서 말에나 행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서 합당한, 믿음과 순종과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의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본을 보이신 것이며, 그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하는 자에게 힘을 주시는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롭지 못한 부족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고, 무슨 일이든지 먼저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악을 행하지 말고, 불의한 죄인을 한 없이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본받아, 오직 서로 사랑하며 평생 선을 행하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무엇보다 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자원함과 기쁜 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잠잠히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시기 바랍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