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들으시고, 주목하시는 기도/(욥 35:9-13)

미션(cmc) 2012. 9. 16. 11:04

들으시고, 주목하시는 기도
(욥 35:9-13)

(욥 35: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욥 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욥 35:11)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욥 35: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욥 35:13)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요즘 경기 침체로 인해 다수의 회사들이 경영난으로 직원들에게 임금을 체불하거나 아예 회사의 문을 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죽어라고 회사를 위헤 일을 했는데 말짱 다 헛수고 였다“고 후회하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월급을 못 받았을지라도 그동안 회사가 있었기 때문에 내 가정과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일하였기 때문에 회사가 돌아가서 제품이 생산되어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수출을 하여 국가 경제에 이바지를 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헛수고만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떨까요? 나름대로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기울여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해왔는데 요즘은 만사가 되는 것이 없고 어려움만 몰아닥치는 것 같은 위기감이 들 때 흔히 무슨 생각을 하게 되나요?
내가 그동안 신앙생활을 한 것이 헛수고인가? 만일 헛수고가 아니라면 지금 나는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좋아졌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후회가 들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출석하고 성경을 배우고 제자훈련을 하고 교회 봉사를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누구를 위해서 하는 일일까요?
나의 헌신과 수고와 충성으로 말미암아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지면 그 때문에 제일 많이 덕을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될 때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평소 믿음이 좋았던 사람도 어려움이 지속되면 내가 그동안 믿은 것이 헛수고가 아닌가? 하는 본전생각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여호아 하나님께서 친히 칭찬하신 욥의 모습이었다면 오늘 우리는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1. 인격적이신 하나님
오늘 성경 말씀은 새파랗게 젊은 엘리후가 인생과 신앙의 대선배 욥을 마치 권투선수가 마지막 라운드에서 거세게 상대방을 코너로 몰아 집중 공격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자신은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을 쳐 왔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헛수고라는 식의 말에 대해서 욥의 말에 대해서 반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욥 35: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욥 35:2)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욥 35:3)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그와 같은 엘리후의 모습은 욥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욥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의 말이 욥의 말보다 더 권위가 있고, 더 설득력이 있고, 더 옳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아무리 엘리후의 말이 옳다고 할지라도 듣는 욥은 자신을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준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자기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극구 변명만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도 듣고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똑같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을 들춰서 공개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은 둘 사이는 원수가 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욥을 개인적으로 불러 말한 것이 아니라 욥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변에 친구들을 불러 끌어 드려서 욥에게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욥 35:4)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욥 35:5)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그것은 욥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온 것이 헛수고라는 식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변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땅을 밟고 사는 인간은 나 혼자 만의 힘으로는 살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의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사회가 불안하면 나도 불안할 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여 높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이 설령 죄를 범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슨 피해가 입혀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욥이 의롭게 산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에게 무슨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 35:6)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욥 35: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러므로 사람이 악하게 살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되고, 사람이 의롭게 살면 그것이 그 사람 자신에게 유익이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욥 35:8)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물론 그와 같은 엘리후의 말에도 일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인격적이신 분이며,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차디찬 신학적인 이론에 불과한 논리입니다.
그 이유는 자식이 죄를 범한 것 때문에 부모가 대신 감옥에 가지는 않지만 감옥에 간 자식을 보는 부모는 차라리 감옥에 있는 자식보다도 더 가슴 아파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 이유는 부모는 어떤 자식이든지 그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엘리후의 말처럼 욥이 범죄하든지 의롭게 살든지 하나님은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은 물론 오늘 우리들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좋은 예가 노아 당시 인류의 타락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이신 반응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땅위에서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거기에 빠져서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면서 땅위에 죄악이 급속도록 번성하여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행위만이 아니라 그 마음의 계획조차 언제나 악하여졌기 때문에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만 갔습니다.
엘리후의 논리대로라면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영향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셨습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여기서 ‘한탄’이라는 말(!j'n)은 ‘후회하다, 위로하다’는 뜻의 와우계속법 미완료형( !j,N:YIw")이고, 또한 ‘근심하시고’라는 말()은 ‘몹시 슬퍼하다, 마음이나 가슴아파하다, 감정을 상하게 하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형으로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마음 아파하시는 모습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는 결코 하나님은 엘리후의 말처럼 초월하고 계시기만 하시는 몰인정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부모가 자식의 죄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부모의 심정처럼 지극히 인격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인간을 아주 멸하시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 노아에게 구원의 방주를 만들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 방주에 들어가기만 하면 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랑과 자비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지만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그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노아 홍수 심판을 당한 것이지 하나님이 무자비하게 심판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노아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그 성품이나 하시는 일이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다 아시고 그 때문에 지옥 형벌 당하게 될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한탄하고 근심하는 마음으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방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엘리후의 말처럼 우리의 선악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초월자이시지만 우리에게 무관심하신 몰인정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근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 147:1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그 하나님이 어느 때 가장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기뻐하시고 그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 생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또한 우리 자신을 복되게 하는 일임을 알고 자원함으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신앙하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 때 근심하시고 염려하시는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고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근심하시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결코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무한하신 인격적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아버지이시며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2. 응답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변덕스러운 존재인지 성경은 바람에 흔들리는 상한 갈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약한 면이 보이면 짓밟고 누르지만 사랑과 자비가 한없으신 하나님은 결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사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흔히 사람이 물에 빠지게 되면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말처럼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나름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영적인 교만이며 자해행위인 것입니다. 갈수록 그러한 사람들이 많아져가고 있습니다.
(욥 35: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욥 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물론 극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욥처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는데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동안 어려움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원망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욥 19: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욥 30: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욥이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불평에 대해서 엘리후는 그 원인이 욥이 악하고 교만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처럼 욥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욥의 기도를 평가하였습니다.
(욥 35: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욥 35:13)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여기서 ‘헛된 부르짖음’은 믿음 없는 자의 부르짖음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게 되니까 물에 빠진 사람처럼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르짖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같은 엘리후의 판단은 무엇이 잘못일까요? 물론 욥은 깊은 신앙의 소유자였지만 그도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계속되는 고난 앞에 낙담과 절망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그것을 부인한다면 욥은 우리들과는 거리가 먼 별종의 인간일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성도들이 겪는 여러 가지 시험 중에 큰 시험은 욥처럼 고난 중에 낙심하는 것입니다.
(시 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그러나 엘리후의 일방적인 판단과 달리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욥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다 아시며 그러한 자들에게 시시때때로 위로와 새 힘과 소망을 부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상 물에 젖은 제단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흙과 돌까지 다 태우게 하고, 바알선지자들의 목을 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세벨이 회개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만약 내일 이맘때까지 내가 네 목숨을 죽은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의 목숨처럼 되게 하지 못하면 내가 우리 신들에게서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목숨을 지키려고 일어나 도망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렀으나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자기 종을 거기에 남겨 두고 혼자서 하룻길을 가서 광야에 다다라서 로뎀 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기도했습니다.
(왕상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이는 엘리야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이며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더욱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어떤 기도에 대해서 들으시고 주목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오늘 성경의 엘리후의 말처럼 잘못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응답을 하시고 싶어도 응답을 하실 수 없습니다.
첫째는 부르짖으면서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과 은총을 구하지 않고 교만하게 구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구하기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누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압제를 벗겨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나 벗겨지지 않음은 하나님의 손이 짧기 때문도 아니요, 그의 귀가 멀었기 때문도 아니다. 이는 고통이 아직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아직 충분히 겸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이 계속되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여야 한다.


우리는 때로 신앙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그 신앙을 삶과는 격리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즉, 말씀이 생활 속에 적용이 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바로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인간의 삶 속에 존재해야 하며, 그 속에서 적용될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결코 우리의 현실과 관계없이 미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현시점에서 느낄 수 있고 적용되어지는 진리입니다. 또한 기독교 역시 현실과 유리된 종교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중심으로 역사하시며, 이 세계를 주관하십니다(참조, <요 3:16>).

1)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 생활하시고 우리가 원하면 언제까지나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2) 작은 것도 크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한 마리의 양을 찾아다니고,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떠주는 '작은 마음'도 함께 소유하고 계십니다.
3) 약한 자라고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부자의 금화보다 가난한 과부의 동전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은 약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예화
일평생 고아들을 기도로 돌보면서 5만번의 기도에 응답을 체험했다는 죠지 뮬러는 기도할 때 다섯 가지 동기로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1)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였고,
2)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였고,
3) 정직한 마음으로 기도하였고,
4)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기도하였고,
5)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고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죠지 뮬러의 기도에 오만 번이나 응답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히 기도했지만 처음에는 하나님은 허락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롬 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로마에 보내지 않기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이 바울의 생각과는 달랐을 뿐입니다.
로마로 가는 방법에도 하나님은 바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인의 몸이 아닌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갔습니다. 그에게는 로마 군인들의 감시가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가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과연 로마에 당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간에서 암살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로마에 도착해서도 마음 놓고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때가 되니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로마 왕궁에까지 복음이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행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갈 수 있었을까요? 설령 로마에 갔더라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무엇보다 고난을 이기는 능력을 배워야 합니다.
1) 기도가 능력입니다.
2) 소망이 능력입니다.
3) 믿음이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인간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회개하게 되고 그 죄에서 돌이키게 될 때 비로소 모든 문제는 해결함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비록 욥처럼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수록 더욱 어려움이 더해져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 밖에 없을지라도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만이 최선의 대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욥 35:13)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이 엘리후의 말처럼 교만한 기도, 헛된 기도는 듣지 않으시지만, 겸손한 기도 기도의 응답이 더디더라고 오래 참는 인내의 기도는 때가 되면 반드시고 들으시고, 주목하시며, 새 힘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마음에 기쁨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