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욥 37:21-24)

미션(cmc) 2012. 10. 3. 08:3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욥 37:21-24)

(욥 37:21) 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 (욥 37:22)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욥 37:23)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욥 37:24)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세상에서 누구보다 실력이 있고, 권력이 있고, 재력이 있고, 체력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두려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욥 37장은 엘리후가 욥과 변론하는 가운데 마지막 부분의 말씀으로 ‘두려움’이란 말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욥 37:1)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여기서 ‘떨며’라는 말(dr'j)은 ‘전율하다, 진동하다, 두려워하다, 놀라다’라는 말씀극한 상태에서 마음에 몰려드는 극도의 두려움으로 인해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뜻하는 칼 미완료 동사( dr"j>y<)입니다.
또 ‘흔들렸도다’라는 말(rt'n)은 ‘뛰어 오르다, 놀라 펄쩍 일어나다’라는 뜻의 칼 미완료형(rT'%yIw])으로 엘리후가 얼마나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상태인가를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경매된 미술 작품은 피카소의 그림이 아니라 ‘뭉크’라는 사람의 ‘절규’라는 작품입니다. ‘뭉크’의 그림 절규가 미국 뉴욕의 소더비 경매장에서 무려 1억 1,992만 2,500달러에 팔렸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을 하면 무려 1,355억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딸랑 그림 한 장에 1,355억이라니 엄청납니다. 이미 뭉크의 그림을 본 분들은 뭉크의 그림에는 인간 내면에 품고 있는 두려움이 리얼하게 잘 드러나 있음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1892년 뭉크의 일기를 보면 그가 왜 절규라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심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해가지고 있었다. 나는 우울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극도의 피곤해셔서, 불타는 구름이 피와 칼과 같은 형태로 짙은 푸른색의 피요르드과 도시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바라보며 친구들은 계속 걸었으나 나는 그대로 서있었다. 불안으로 몸을 떨며 그 순간 거대한 무한한 비명이 자연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와 패닉의 고통의 실체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그림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싼 값에 팔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성경에도 보면 그와 같은 두려움이 처음 시작과 맨 마지막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욥 37:24)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여기서 ‘경외하고’라는 말(arey)은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라는 뜻으로 구약에 자그만 치 330번이나 나오는 말로, 그 의미는 단순히 공포심으로 인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존경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인 신앙적인 두려움으로 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뜻하는 칼 완료형으로 이미 완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지혜롭다 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오늘 성경을 통해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자연 현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지금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셨으며, 또 무엇을 하실 것인가? 를 알 수 있지만, 욥 당시는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데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과연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확신이 없게 되면 신앙이 불안전하여 흔들리게 되고 핍박과 환란을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천지와 만물을 통해서 당신이 어떤 하나님이신가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와 만물이라는 자연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천지와 만물을 통치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계시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들을 살펴보게 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오늘 성경에서 엘리후가 말하는 바로 그때에 천둥과 번개가 쳤던 것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성경에서 엘리후는 바로 현재의 현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천둥과 번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스스로 감명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리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음성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가 가능했었으나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후에 제일 첫 번째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와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천둥과 벼락 소리를 통해서 당신의 위엄을 나타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했던 인간은 천둥벼락 소리를 들어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한 여름 먹구름 사이로 번쩍이는 번개와 천둥과 벼락은 자연 현상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성경에서 엘리후는 그것이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하나님의 두려운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욥 37:3)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욥 37:4)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 아래 모으시고 모세를 시내 산꼭대기로 불러 올리신 후에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에도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 가운데 선포하심으로 당신의 엄위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출 19: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출 20: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오늘 성경 말씀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음성이 뇌성벽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 37:5)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한 여름 짙은 먹구름 사이로 번쩍 번쩍 빛나는 번개와 하늘이 찢어질 듯한 천둥 소리를 들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엘리후는 그와 같은 천둥과 번개는 온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권과 능력을 묘사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위한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시 68:33)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깊은 산속이나 넓은 들판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먹구름 사이에서 번개가 뻔쩍 거리며 하늘이 찢어질 듯한 벼락이 떨어질 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물론 그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고, 그 죽음의 공포의 근원은 죄악 때문입니다.
중세 부패한 로마 캐도릭과 맞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생애에 대전환점을 가져다 준 일화 중에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일컫는 벼락과 관계된 일화가 있습니다.

예 화
루터는 좀 까다로운 성격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쾌활하고 명랑하며 노래나 교제를 좋아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고집스럽고 명상적이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내성(內省)과 자책감으로 자기를 들볶기도 하였다.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날, 22세된 젊은 루터에게 그의 삶을 새롭게 결정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친구와 들판을 걷는 중 비를 피하려고 큰 나무 밑에 있다가, 낙뇌(落雷)로 인하여 친구가 자기 면전(面前)에서 죽었다. 이것이 소위 루터의 ‘공포의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때 그는 기도하기를, “오 안나여! 나를 구하소서! 나는 이제 수도사가 되렵니다!”라고 서원(誓願)하였다. 그후 루터는 깊은 죄의식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다가 드디어 7월 17일 엘후르트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수도사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수도원은 천국으로 향하는 탁월한 길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천둥과 번개와 벼락은 하늘에 떠있는 낮은 구름 속에 음전하가 지상의 양전하가 있는 곳으로 떨어질 때 일어나는 빛 에너지가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번개 불이고 그 소리가 천둥이지만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을 때 더욱 인간의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돌림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2) 눈과 비와 바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천둥과 번개와 벼락만이 아니라 때로는 폭설과 홍수와 태풍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전히 세상을 통치하심을 드러내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 37:6,)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와 부는 바람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부적으로 느끼는 것은 농산물의 가격이 크게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금년 여름에 태풍이 세 번씩이나 휩쓸고 지나가면서 농부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만일 하나님이 하늘에서 눈과 비와 바람을 명하신다면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하시는 섭리를 깨닫고 오히려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를 테면 어느 해는 순탄한 일기로 인해 농산물이 과다 생산되어 가격 폭락으로 농부들이 밭을 갈아엎는가 하면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에 수확하기를 포기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 중에 첫째가 모든 자연 만물이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여전히 다스리고 계심을 증거하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신가 하는 것을 그와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드러내심은 인간이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창조주 하나님이 자연을 다스리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시기 위해 때로는 장마나 가뭄이나 태풍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오염되었던 공기와 대지와 해안을 대청소하심으로 자연을 보전하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탐욕에 빠진 인간의 욕심을 제어하여 억지라도 쉬게 하시며, 농산물의 출하량을 조절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켜 우리가 헤아일 수 없는 큰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욥 37:5)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여기서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말([d'y:)은 이해할 수 없는 이라는 말의 칼 미완료 동사로 그와 같은 일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 물론 그 당시는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때로는 원망이 나오기도 그로 인해서 인간의 탐욕을 절제하게 하시고 때로는 농부와 대지를 쉬게 하시고, 농산물의 수급을 조절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욥 당시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나 그와 같은 자연 현상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자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상 사람들이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과학적인 현상의 배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배후가 누구이며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배후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욥 37:14)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욥 37:15)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욥 37:16)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욥 37:17)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창조주 하나님은 그와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교훈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간의 교만을 꺾어야 하며
2)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지혜 앞에서 인간의 무지를 깨달아야 하며
3)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그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뜻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아름다운 미사여구나 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설교를 들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으며 어려서부터 누군가를 통해서 배우지 않으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와 같이 우둔한 자에게 자연 현상을 통해서 깨우쳐 주시는 것이 자연 계시이고 그것을 보면서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을 통하여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와 만물들을 여전히 관리하시고 명령하시며 통치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자연만물이 보존되고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와 같은 자연을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그 가운데 가장 존귀하게 지으신 인간을 왜 돌보지 않으시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를 왜 보살피지 않으시겠는가 하는 믿음을 갖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외에는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입니다. 타락한 자손인 인간은 결코 죽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예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다정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자연 만물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자연만물을 보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신실한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 만물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고 크신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고 겸손은 성도가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신앙이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통치하심을 나타내는 자연 현상들을 무심하게 보지 말고 엘리후처럼 그 배후의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사명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삶입니다. 기쁨과 감사의 삶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천둥과 번개와 벼락과 폭설과 폭우와 태풍과 같은 자연 현상만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바라보며 겸손히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예 화- 고비 사막에서 하나님의 손길-모래산과 저녁노을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타락과 죄로 인해 심히 혼탁해진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은 여전히 빛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평소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인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통치하심과 그 지헤와 능력과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신가 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과 특별히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엘리후처럼 천둥번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에 대한 섭리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그 모든 것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신묘 막측한 자연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미신과 우상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와 같은 자연 현상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위엄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의 마지막 결론이 두려운 마음으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욥 37:23)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욥 37:24)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그러한 마음으로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 무서운 천둥과 번개와 벼락 소리와 함께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크게 감사하며, 입을 열어 찬송과 기도로 영광을 돌리는 신실한 예배자들로 일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시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 104:3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시 104:32) “그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을 만지신즉 연기가 나는도다” (시 104:33)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