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항상 힘써야 할 일/(딤후 4:1-5)

미션(cmc) 2012. 10. 11. 17:39

항상 힘써야 할 일
(딤후 4:1-5)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딤후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너 나를 막론하고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어떤 일을 막론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막지 못하는 썩을 양식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디베랴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속셈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디베랴 건너편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배를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면서 반색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 같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제사장이 되라, 선지자가 되라. 신학교를 가라!‘ 라는 말씀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기서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노인이 된 아버지처럼 자식의 도움이 필요한 유한한 분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었어도 죽음을 피할 길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 주신 생명의 떡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썩을 양식을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면서, 영생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일에는 무관심 하는 풍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아와 생명나무의 열매는 따먹기를 싫어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만 관심을 갖다가 뱀의 유혹을 받아 따먹음으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그와 같은 첫째 아담의 자손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믿음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믿을 바에야 잘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신의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때가 되면 퇴직을 당하고, 그 때문에 병을 얻기도 하고 늙어가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열심이 육신의 일을 합니다.
하물며 영원히 살게 하는 하나님의 일은 더더욱 열심히 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1)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지만 종교적인 겉치레에 불과할 뿐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자라지 않고 점점 형식적이 되어갑니다. 아무런 감동이나 변화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감사와 헌신과 충성이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입니다.
물론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믿음도 처음에는 뜨거웠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점차 뜨뜻미지근해짐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토하여 버리시겠다고 책망 하셨습니다.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2) 정반대로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점점 더 풍성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소아시아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은 어려운 여건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구호품을 나눠주고, 애써 도와준 훌륭한 일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갈수록 풍성해진 것을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계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여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서 ‘주목’이라는 말은 주시하고 관찰하는 것을 뜻하는 동분사 현재형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 결 같이 주시하고, 관찰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잠깐’이라는 말은 ‘일시적인, 순간적인, 지나가는’이라는 뜻이라면, ‘영원’이라는 말은 ‘시작이나 끝이 없는 영원한’이라는 뜻으로 잠깐이라는 말과 너무나 대조적인 말입니다.

지나간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보십시오. 영원한 나라가 있었습니까? 세상에 영웅호걸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영원한 인물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핍박자들이 불태운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은 없어졌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죽으신 후 공자나 석가처럼 아직도 무덤에 머물러 있습니까? 성직자들을 장작더미위에 불사르고 사자 밥이 되게 하고 감옥에 가두고 교회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지상에서 교회는 사라졌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같은 세력들은 다 망해버렸고, 그 사람들은 다 죽었으나, 그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렸고,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쳤고, 예수님은 장사한지 사흘이나 지났어도 다시 살아나셨고, 교회는 갈수록 온 세상 곳곳에 세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영원한 진리요, 생명이요, 능력이요, 사랑이요, 정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세월이 갈수록 인심은 사나와지고, 심성은 포악하고, 모질고, 이기적이고, 몰인정해져가고, 갈수록 세상이 쓰레기통이나 변소보다 더 추잡해져가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와 교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세상 죄악은 날로 더해가고,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불신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죄를 범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는가?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실망스런 모습을 보게 되면 과연 기독교에 희망이 있는가? 반문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이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부정적인 모습을 이미 2000년 전에 성경에 다 예언해 놓은 것이 이제 때가 되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낙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깨어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고, 더더욱 사랑해야 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성경은 오래 전부터 경고해왔습니다.
마지막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사는 일이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1) 사람들은 이기심에 빠지고, 돈이면 전부라는 풍조가 범람할 것이며,
2) 사람들은 교만과 과장을 일삼고 하나님을 비웃으며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나쁜 인간이 되어 버릴 것이며,
3) 또 그들은 완고하고 절대로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문제만을 일으키고 부도덕한 생각으로 가득찬 인간이 될 것이고,
4) 그들은 난폭하고 잔인한 행동을 하며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비웃을 것이고,
5) 그들은 친구를 배반하고 화를 잘 내며 허풍을 떨어대기 일쑤고
6)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쾌락을 즐기는 데 시간을 보내려 하고,
7)교회에는 나가지만 자기들이 들은 것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씨를 뿌린 들판이 추수기가 되면 쭉정이는 점점 더 말라가고, 알곡은 점점 더 영글어가는 것처럼, 현실 교회와 세상은 한쪽은 심히 부패해져가는 반면 한쪽 편에서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실한 알곡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알곡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형식적인 신앙을 벗어버리고 경건한 신앙의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서 ‘돌아서라’는 말은 잘못가고 있는 방향에서 바른 곳으로 전환하라는 동명사 현재 중간형으로 계속해서 스스로 돌이키라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내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잘못 말하고, 잘못 행동하는 것이 있다면 방향전환을 하는 것만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깨닫고 이제라도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바른 올바르게 방향전환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1)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천년 전에 오셨던 것처럼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믿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예수 믿는다고 시련과 핍박이 많았던 초대교회, 로마교회 시절에 수많은 성도들이 십자가 사형틀, 굶주린 사자의 발톱, 깊은 지하 무덤, 산속 동굴에서 피신을 하면서 신앙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마라나타’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날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의 신앙은 정말 산소처럼 물처럼 순수하고 정결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세속화되었고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제부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단 사이비들이 순진한 교인들을 우롱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것이 불발이 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몇 번 당한 후부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재림의 신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어 예수 믿고 오로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기도응답이요, 신앙의 보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신자와 불신자의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구분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의 신앙은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재림대망의 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오늘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여기서 ‘살아있는 자’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죽은 자’는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미 죽은 사람을 모두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은 ’살아있는 자만이 아니라 죽은 자도 모두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 곧 주님의 심판은 가고 오는 역사 속에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화
인천 계산교회 권오달 안수 집사님이 대장암이 걸려 세상을 떠나기전 마지막 목사님의 기도를 받으면서 다시 고침받기를 소원한 이유는 전도하다가 죽기 위해서 투병기간 두 형제와 자신의 상처를 준 아들들에게 회개하고 전도하고, 간호사들에게 전도를 하고 지난 주 57세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그 집사님을 기쁘게 받아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죽음이 찾아 올 것입니다. 우리도 죽음이 오기 전에 아프기 전에 아니 설령 아플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쉬지 않고 항상 힘써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뿐입니다.
(딤후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서 ‘신중하여’라는 말은 ‘술취하지 않다, 정신차리고 있다’는 뜻의 현재 진행형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고난을 받으며’라는 말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이나 욕을 먹는 정도가 아니라 ‘불행이나 재앙으로 인해 가엽고 슬픈 처지에 놓이게 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직무’라는 말은 오늘 날 집사라는 뜻이며, ‘다하라’는 말은 ‘성취하다, 이행하다, 완수하다, 확신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결코 주님이나,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고,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앞에 서게 될 때 상급과 칭찬을 받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렇게 사는 교인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것입니다.

예 화
우리 교회에 금년에 78세이신 신종임 권사님이 계십니다. 교회를 오실 때 전동 휠체어를 운전하고 오실 정도로 건강이 넉넉하지 못하신 분입니다. 평소 토요일마다 제빵소그룹을 빠짐없이 섬기셨습니다. 주뜨란 농촌선교에 직접 갈 수 없는 대신 전도에 필요한 물품을 전도 팀에 공급하기 위해 뜨개질을 하여 수세미 서른개와 식탁보 40개를 친히 바느질을 하여 예쁘게 만들어서 보냈습니다. 교구 전도대에게도 수세미를 50개, 예닮대학 전도 자금 마련을 위해 보자기 40개를 만들어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던 중 건강 진단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자녀들이 수술을 권유했으나 나이가 많다고 거절을 하시다가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전혀 걱정없는 얼굴로 미소를 띠시면서 담임목사의 기도를 받으시고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대수술을 받기 전에 미리 식탁보자기 30개를 전도용으로 준비하였다가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병실에서 회복하면서 다인 입원실에서 함께 입원한 환우들에게 식탁보를 주면서 복음을 전도하였습니다. 먼저 퇴원하는 환우들이 권사님에게 밝은 표정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하면서 쾌유를 비는 모습을 심방 갔다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확실히 맞는다면, 이제 나도 마지막 순간까지 항상 힘써야 할 일은 복음전도이며, 그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영적 투자입니다.
주님이 이 일을 위해 나를 구원을, 직분을, 가족을, 이웃을, 직장을, 교회를, 구역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엿새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인다운 성실한 삶으로 신뢰받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향기를 발하며, 이웃의 구원을 위해 태신자를 품고 간절히 지속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들을 주님 앞으로 초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육하여 나보다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영적 아비와 같이 섬기는 삶을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힘써야 하는 일 중에 이보다 더 소중하고 시급한 일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그렇게 살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신실한 복음의 증인으로 살다가 장차 죽음의 문을 열고 주 앞에 서는 날, 그동안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지켜보신 주님으로 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상급을 넘치게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