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폭풍우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욥 38:1-6)

미션(cmc) 2012. 10. 3. 08:37

폭풍우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욥 38:1-6)

(욥 38: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욥 38: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욥 38: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은 자기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못하면서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 죽은 시체에 돌을 던지거나, 아니면 아무런 힘이 없는 장애자나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폭력을 가해 괴롭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범하기 쉬운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마치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에 대해 함부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우리가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은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지만 그러한 불감사와 교만의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이, 믿음이 약해보이는 사람보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 범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1.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오늘 성경 말씀은 여호아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아께서 욥에게 말씀하셨다고 욥 38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욥 38: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기서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말(hn:[;)은 욥기에 단 한번 나오는 말씀으로 ‘대답하다, 응수하다, 반응하다, 증언하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형입니다(A@['Y"w").
이는 으로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는 말을 계속해서 듣고 계시다가 욥의 친구들에 이어 젊은 엘리후조차 더 이상 욥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대화를 중단하자 곧 이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의 말에 대한 응답임을 뜻합니다.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현장성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설령 현장에서 직접 들었다고 할지라도 정작 증언할 때는 제각기 말이 다른 것은 자기 취향대로 선별해서 듣거나,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며 듣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열 사람이 현장에서 똑같이 들은 말일지라도 그에 대한 평가나 반응이 제각기 다른 것입니다.
예화
동일한 사건을 놓고 신문사마다 그 내용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견해
그래서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었을 지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인간들과 달리 그 사람이 어떤 의도에서 한 말인지를 다 아시기 때문에 인간들과 같은 오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여호아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실 때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욥 38: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기서 ‘폭풍우 가운데서’라는 말은 회리바람을 뜻하는 말로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뜻합니다.
(나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같은 모습으로 욥에게 임하신 까닭은 결코 욥을 친구들의 비난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욥이 친구들의 말에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는 오만함에 대해 책망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인간과 대화를 단절하신 분이 아니시며, 인간의 말에 무관심하신 분도 아니시며, 인간들처럼 편파적인 분이 아니시며, 인간의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들으시고 그것을 다 기억하시는 정확한 분임을 뜻합니다.
(대상 28:8)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너희 후손에게 끼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전에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며, 들으시기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기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균형 잡힌 신앙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하시는 속도에는 완급이 있을 수 있지만 응답 자체가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2. 욥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욥은 한 사람이고 욥을 공격하는 친구는 더 많기 때문에 욥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욥을 하나님께서라도 도와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아니라 욥을 먼저 책망하실 정도로 공정하셨습니다.
(욥 38: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제일 먼저 욥을 보호하시고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이 되는데 왜 욥을 먼저 책망하는 말을 하셨을까요?
여기서 ‘무지한’이라는 말은 '다 닳아 없어지다‘l는 말과 ‘지식, 이해’라는 두 말의 합성어로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온갖 말을 하다가 잠잠히 입을 다물고 있는 욥을 가리켜 무지한 말 곧 지식이 바닥이 났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욥기를 강해를 통해서 욥이 한 말을 되씹어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욥의 말이 무지한 말이 아니라, 매우 지혜롭고 믿음이 충만한 사람의 말처럼 들려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욥을 가리켜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욥이 친구들에게 늘어놓은 온갖 구차스런 변명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흐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그 동안 친구들로부터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욥이 깨닫지 못하거나 숨겨진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것이라는 인과론을 가지고 욥의 자백을 받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에 대해 자신은 절대로 무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고난가운데 버려두시는 하나님은 마치 도덕성과 자비와 정의에 의구심이 있는 것처럼 하는 말을 하나님은 다 들으시고 기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논한 것이 친구들에게 비난의 요소를 제공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변호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1) 하나님이 자신을 악인의 손에 넘기셨다.
(욥 16: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게 하라”
2)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욥 19: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3) 하나님이 악인을 장수하도록 용납하신다.
(욥 21: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욥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인생살이가 너무 어렵게 되면 욥과 같이 억지소리를 하기가 쉬운데 그것이 바로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 라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사고나 언행은 똑똑한 척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원칙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욥은 무능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럴듯한 말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똑똑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무지를 자기 입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욥의 모든 행위가 어리석은 소치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무지하게 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 이유는 무지와 교만은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1) 무지한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으며 혹시 남이 알까 두려워합니다.
2) 무지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를 지나치게 내세웁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고집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것을 절대시하여 강요합니다.
욥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말을 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을 가졌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경조차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지 않으면 눈으로 읽고 귀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의 지식이나 판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3. 욥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
선생님이 제자를 가리키는 교수법에는 그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이 학생은 가만히 앉아서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듣고 적고 이해하는 주입식방식입니다.
그것은 욥이 항상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질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욥이 그동안 그럴듯한 말로 친구들의 입을 막은 것에 대해서 직접 욥을 심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에게 대장부처럼 하나님이 던지시는 질문에 대답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욥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첨 욥과 논쟁하시려는 의도는 욥의 교만을 꺾으시고, 우주 만물에 대한 당신의 통치와 섭리가 얼마나 기묘하고 위대한 것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어떻게 만드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성경 욥에게 던진 질문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깨우침을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우주의 시작을 밝히고(1-2절), 빛과 궁창이라는 물질의 배경 창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3-8절).
또한 바다와 땅, 식물(9-13절), 해와, 달, 별이라는 우주 행성들과 그것들로 인한 밤과 낮 그리고 사계절의 탄생(14-19절), 조류와 어류라는 구체적 생물체들, 그리고 우주 행성들과(20-23절) 땅의 생물체인 동물들, 그중에서도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24-31절).

1) 이 세상이 창조될 때 욥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질문입니다.
(욥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2)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욥 38: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3)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또한 세우신 것에 관한 질문입니다.
(욥 38: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4) 어두운 밤이 지난 새벽에 대한 질문입니다.
(욥 38:14) “새벽이 되면 언덕과 계곡은 그 자태를 드러내지 않느냐? 진흙 위에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냐? 옷자락이 그 주름까지 보이듯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더냐?”

5) 우주만물의 넓이에 관한 질문입니다.
(욥 38:18)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상상이라도 해보았느냐? 그래 안다면 한번 말해 보아라.”

6) 하늘의 별들에 관한 질문입니다.
(욥 38:32)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욥 38:33)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7)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질문입니다.
(욥 38: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우주 만물을 보면서 인간은 너 나를 막론하고, 인간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은 유한하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세상의 강자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를 길러주신다고 까마귀 새끼와 같은 약자를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까마귀는 시체를 먹고사는 산과 들의 청소부로 유익한 새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까마귀조차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풍성한지 생물이 있는 어느 곳에든지 하나님이 다 먹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어느 누가 그것들을 위하여 먹이고 예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까마귀 새끼를 돌보시는 이가 그의 백성들을 돌봄에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는 우주만물 구석구석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 구석구석에까지 미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불신자들에게까지 미칩니다.
3)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연약한 자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무엇보다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선입관과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지혜로운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해야만 비로소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이 폭풍가운데서 욥에게 계속해서 던지신 질문은 욥 한 사람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때로 소외를 당할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까마귀 같은 존재라고 자학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럴수록 더욱 안전지대에 두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시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여기서 ‘안전지대’라는 말([v'y)은 ‘구원, 구출, 구조, 안전’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번영, 승리’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두리라’는 말(tyv)은 칼 미완료 동사로 계속해서 머물게 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교만하게 곳곳이 서서 받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무릎을 꿇고 받는 것이며, 이 은혜를 깨달은 자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더욱 더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계속해서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보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셨습니다.
미물인 까마귀조차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며, 오늘 우리에게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신 무한하신 은혜입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