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큰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욥 36:5-12)

미션(cmc) 2012. 10. 3. 08:33

큰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
(욥 36:5-12)

(욥 36: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욥 36: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욥 36:7)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욥 36: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욥 36: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욥 36: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욥 36: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욥 36: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지혜로운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한 일을 꼼꼼이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살펴보면 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많고 지혜로우신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앙고백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천지는 단순히 하늘과 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 곧 자연만물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거센 태풍이 한 반도를 휩쓸고 지날 때마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 태풍을 막을 수 없고 단지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는 것처럼 자연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것은 곧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가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태풍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요?
태풍은 공기가 따뜻하고 공기 중에 수증기가 많고 공기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서 기압이 낮아지면 따뜻하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한곳으로 모이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 공기를 흡수하는 큰 홀이 발생한다. 이 홀을 가리켜 태풍의 눈이라고 하는데 습하고 따뜻한 공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홀의 흡입력은 커진다. 이 커진 공기덩어리가 서로 뭉쳐지며 충돌을 하는데 그 힘에 의해 회전을 하며 고기압 쪽으로 전진한다. 그래서 태풍이 움직이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거센 비바람으로 피해를 입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은 비와 천둥 번개가 어떻게 발생한다고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욥 36:27) 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 (욥 36:28) 그것이 구름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게 쏟아지느니라 (욥 36:29) 겹겹이 쌓인 구름과 그의 장막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엘리후는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며, 신기한 것은 그 징조를 짐승이나 가축들도 미리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욥 36:30) 보라 그가 번갯불을 자기의 사면에 펼치시며 바다 밑까지 비치시고 (욥 36:31) 이런 것들로 만민을 심판하시며 음식을 풍성하게 주시느니라 (욥 36:32) 그가 번갯불을 손바닥 안에 넣으시고 그가 번갯불을 명령하사 과녁을 치시도다 (욥 36:33) 그의 우레가 다가오는 풍우를 알려 주니 가축들도 그 다가옴을 아느니라
엘리후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비과학적이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자연 현상에 대해서 황당한 신화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득히 먼 옛날,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님(하느님)이 여러 아들을 불러놓고 누가 세상에 내려가 인간을 다스리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여러 아들 중에서 환웅이 나서며 동방에 사는 무리를 다스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임금님은 환웅의 뜻을 알고 바람을 다스리는 신 풍백, 비를 다스리는 신 우사, 구름을 다스리는 신 운사에게 환웅을 도와 나라를 지키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환웅은 농경 생활을 다스리는 3신과 3,0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아득한 구름 속을 헤쳐 태백산(지금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신에게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짓게 도와주라고 하고, 다른 부하들에게도 병을 다스리고 벌을 주는 일 등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 가지의 일을 맡겼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의 과학은 계속해서 황당한 신화와 더불어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확대시켜 왔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선동하기를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인들이 조작한 터무니없는 허황된 존재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린 존재라고 공공연히 말을 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은 우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모든 자연 세계의 영역에도 여전히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선입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정상적인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연과 인간사 구석구석에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인사라고 할지라도 지극히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였따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성경 말씀의 범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자연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같은 계시의 말씀으로 과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르치고 있t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제목처럼 하나님은 ‘큰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 36: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여기서 ‘능하시나’라는 말씀은 ‘큰 강력한, 세력있는, 많은’이라는 뜻으로 ‘무궁하사’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로 하나님은 ‘지혜가 크고 강력하신 분’이라는 뜻으로 쉬운 번역 성경에서는 ‘큰 권능의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오늘 성경 말씀처럼 다른 사람보다 지혜와 능력이 출중할 때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력한 권능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혜를 가지고 아무도 멸시하지 않는다고 오늘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멸시하다’라는 말은 칼 미완료형으로 지금까지 아무도 멸시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욥 36: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지구상에 악이 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처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 화
농사를 짓는 농부는 봄에 땅에 씨를 뿌리고 난후 여름 내내 잡초와 씨름을 해야만 합니다. 요즘은 농약의 발달로 잡초의 씨를 말려 버리지만 예전에는 그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뽑아야만 하였습니다. 그것이 농부의 큰 과제 중에 하나였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악이 우후죽순처럼 번성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세상은 무법천지, 무정부 상태처럼 약탈, 살인, 방화, 절도가 빈번하여 강하고 악한 자만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악의 근원인 사단의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계는 물로 자연 세계까지 악의 세력이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처 죽이는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땅위에는 곡식이 자라지 못하도록 잡초가 무성해져서 사람이 땀 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아직까지 건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 성경에 보면 그와 같은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1) 큰 권능의 하나님은 악인은 살려두지 않으신다.
(욥 36: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저히 인간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살인하고 성폭력하는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붙잡혀서 사형이나 그에 준하는 형벌을 받고 사회로부터 격리를 당하거나, 스스로 목을 매고 약을 먹고 자결하기도 합니다.
만약에 그러한 사람들이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오래 오래 산다면 세상이 더욱 살기 어렵고 항상 불안할 것입니다.
설령 교묘하게 잡히지 않고 살아남아 잘 피신한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반드시 늙어 죽게 되는 것이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지상에서만 아니라 사후에도 지옥 심판으로 최종 결론이 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2) 큰 권능의 하나님은 악인이 돌이키기를 기다리신다.
(욥 36: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욥 36: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욥 36: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만일 사람들이 흉악범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큰 권능을 가지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인들을 다 죽이신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결국 노아 홍수심판 때처럼 세상에는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중에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 악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살려 두시는 이유는 자비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켜 회개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도자를 보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귀를 열어 교훈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듣고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은 죽이기로 작정하셨지만 집행을 유해하시고 기다리시는 마지막 자비인 것입니다.
(욥 36: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이 그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고 끝까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 그들을 망하게 하고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욥 36: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3) 큰 권능의 하나님은 눈을 들어 의인을 살피신다.
(욥 36:7)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여기서 ‘떼지’라는 말은 ‘딴데로 방향을 돌리다, 감소하다’라는 뜻의 칼 미완료형으로 하나님은 한시도 의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주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직 죽이지 않으신 악인에게 고난을 당하는 의인들을 주목하여 그들을 살피시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정에서 의인이 악인에게 당하는 고난이 결과적으로 의인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악이 무성한 잡초 밭에 곡식이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악인 번성하고 있는 세상에서 의인이 어려움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의인에게 고통을 주시는 뜻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범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2) 연단하여 훈련하기 위함이고,
3) 더 좋은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큰 권능의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그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세력이 되게 하시고, 세상의 악을 최소화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요셉의 사건입니다.
예 화
요셉은 가정에서 형들의 시기를 받아 노예로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해야 했고 또 그 집에서도 여주인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옥에 갇혀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고난은 요셉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욕심과 시기로 빚어진 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고난을 요셉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요셉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견줄만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때로 요셉처럼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경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원망과 불평을 토하기도 하지만, 이때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참고 인내해야 할 시기입니다.
요셉의 그러한 고난과 고통은 때로는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초대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1) 만일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지 않았더라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만일 요셉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술 맡은 관원 장을 만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3) 만일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준 대로 풀려나고 나서 요셉을 기억해 그를 풀어줬더라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는 30세가 되기 전에는 공직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기나긴 고난은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으며, 요셉이 그렇게 됨으로 결국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두려워 떠는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면서 위로한 말이 무엇입니까?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의고난의 승리로 말미암아 자기 모든 가족과 애굽 지역의 모든 사람을 기근에서 건져내는 큰 역사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큰 축복의 인물이 된 비결이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큰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어려움들 뒤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섭리와 보호가 있음을 깨닫고 불평과 원망으로 시간과 세월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그 고난과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로 보고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요셉의 고난을 성경에 기록하신 것은 우리에게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와 동일한 고난과 고통이 다가오고 때로는 이것보다 더 심한 일들이 우리에게 다가 올지라도 그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1) 큰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은 아무리 높은 사람도 악한 자는 살려 두지 않으시며, 설령 그들의 삶이 연장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단지 일반적인 섭리의 보호아래 있을 뿐입니다.
2) 큰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은 언제나 고난 받는 이들을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변호하십니다(6절). 사람들은 고난 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신원하십니다.
3) 큰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백성을 보호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십니다(7절).
사람들은 때때로 소홀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는 따뜻하며 온화한 눈길을 결코 그들에게서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기에 축복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마음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요셉과 같은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어떤 마음이 준비가 필요할까요?
1)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먼저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만일 그 고난이 자신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한 고통이라면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되 자신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며 한시라도 빨리 그 죄를 회개하고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고난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주께 아뢰고 그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고통 중에 있는 자는 주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께 부르짖었다고 해서 당연히 우리의 고통이 제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 선으로서의 주님, 언제나 공의로우신 주님, 인간의 뜻에 의해 좌우되지 아니하시고 항상 자신의 뜻과 섭리에 의해 통치하시고 구원하는 주권자 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의 은혜를 구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가운데 이러한 고난이 임할지라도 이것은 우리를 훈련하고 연단해서 우리 신앙의 성장을 이루는 밑거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인내로 그 어려움을 이겨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