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눅 17:11-19)

미션(cmc) 2012. 11. 19. 18:26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은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해마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금년에는 더욱 어려워진 것을 절감하는 가운데 풍요로운 가을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고 차가운 겨울이 성큼 다가옴으로 우리들의 마음까지 춥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계절적인 변화만큼 현실 경제가 어려운 때에 과연 우리의 마음속에 진정한 감사가 우러나오고 있는가?
추수감사절은 종교적인 예년의 행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의 절기인가? 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확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추수감사절의 성경적인 기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삼대 감사 절기는 결코 풍요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애굽의 속박과 광야 사십년의 고난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이 요구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감사할 것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살전 5:18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범사’라는 말(pa'")은 ‘온갖, 모든, 어떤 것이든지’라는 뜻으로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감사를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할 것입니다.
설령 범사에 감사하지는 못할 지라도 누구를 막론하고 돌이켜 보면 최소한 한두 가지는 감사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열사람은 범사에 감사는 고사하고 단 한 가지도 감사 할 것이 없고 오히려 매사에 원망과 불평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열사람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한센 병이라 일컫는 나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한센 병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 병이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피고름이 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흔히 사람이 질병에 걸리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간호와 치료를 받게 나병에 걸리게 되면 사랑하는 가족들과 격리되어야 하고 심지어 성전이나 회당에 쫓겨나기 때문에 더더욱 고통스런 질병입니다. 설령 왕이라고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대하 26:20) ‘대제사장 아사랴와 다른 모든 제사장들이 왕의 이마에 문둥병이 생긴 것을 보고 그를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자 왕 자신도 여호와께서 자기를 벌하신 줄 알고 성전에서 급히 떠났다.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범사에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이 어떻게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만일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감사한다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감사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것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 고작 백년도 채우기가 어려운 짤막한 삶을 사는 동안 누구나 자신만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된 소원입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매일 매일을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 화
한 마을이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시냇물은 모두 말랐고, 논바닥은 쩍쩍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고 싱싱한 상태를 유지했지만 냇가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들은 금세 말라 죽어버린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나무를 뽑아내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뭄이 있기 전, 냇가에 자라고 있던 나무들은 뿌리를 충분히 내리지 않아도 수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뿌리가 거의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뭄이 심해져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자 죽어버린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요 속에서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사람은 작은 어려움에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나 역경을 극복하며 자신의 삶을 단련시켜온 사람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극복하는 방법을 쉽게 찾아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부자 중에는 남의 덕에 부자가 된 사람과 자신의 수고로 부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땀 흘리지 않고 버는 재물은 달콤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영혼의 독약과 같습니다. 참된 행복은 오랜 가뭄의 시간 마른 땅을 파고 깊이 내린 뿌리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현실 경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힘든 삶을 살게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이럴 때일수록 감사사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주님을 찾는 삶이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는 삶입니다.

2.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함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열 명 한센 병 환자들은 이전에는 각기 따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나병으로 인해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당한 후에 동병상린이라는 말처럼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서로 의지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을 통해서 자기들의 근본 문제인 한센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외면하는 나병환자의 몸으로 혼자서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레 13:45, 46 에 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고 외쳐야 하며,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서로 처지가 같은 열 사람들은 함께 예수님께 나아올 용기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을 발견하였을 때 멀리서나마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예수님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여기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라는 말(levgonte")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뜻하는 현재 진행형 동분사 시제로, 한두 번 소리를 지르다가 만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반응을 보이실 때까지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계속해서 소리 질렀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열 명의 병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거나 지체하지 않으시고 즉시 응답하셨으나 예수님의 응답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여기서 ‘보시고’라는 말(ei[dw)은 힐끗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다, 경험하다, 생각하다, 알다,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또한 ‘깨끗함을 받은지라’는 말(kaqarivzw)은 단순과거 수동태 직설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에 단번 역사가 일어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주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열 명의 나환자가 멀리서 부르짖는 소리만 들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가슴으로 느끼시면서 보셨음을 뜻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병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아직 병이 낫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당시에 나병이 치료되었는지 최종 확인 방법은 제사장에게 가서 병 나은 자들은 보임으로써 다시 자기 삶의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레위기의 말씀을 따라 나병이 고침을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하게 하기 위해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아직 병이 낫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무조건 고쳐주신 경우와 믿음을 전제로 하여 고쳐 주신 경우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열 명의 병자들은 고침을 받고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로 먼저 예수님의 명령을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열명의 병자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길을 가다가 깨끗함을 받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였을 때 그와 같은 질병은 치료되고 그들이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서 여생을 가족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열 명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이 주님께 나아와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세상을 사노라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는 어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어려움을 당할 때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만 점차 당하고 있는 몰인정한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정작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아무리 큰 어려움을 당할 지라도 부르짖어 도우심을 구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시 18: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믿어야 합니다. 믿어지면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깨끗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 같으신 주님의 말씀은 나병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나병보다 더 무서운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멸망시키는 죄‘라는 질병까지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능력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크게 믿는 사람은 순종하기 어려운 것도 순종하지만, 믿음이 적은 사람은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3. 감사하는 단 한 사람
오늘 성경 말씀의 핵심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병을 고침 받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열 명의 나환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던 길에 자신들의 나병이 깨끗해진 것을 깨닫고 난 다음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 명의 병자들이 평소 간절히 소원했던 것이 예수님을 만나 단번에 이루어졌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만일 오늘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였을까요? 율법에 명시한대로,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더욱 빨리 제사장에게 달려가서 완치되었음을 확인하고 속히 집으로 돌아가서 그토록 그리던 가족들과 재회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우선적인 일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그렇게 했겠지만 오직 한 사람은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큰소리로 영광을 돌렸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로 다시 되돌아오는 일을 제일 먼저 하였다는 것입니다.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여기서 ‘영광을 돌리며’라는 말(doxavzwn)은 하나님을 ‘찬양하다, 영화롭게 하다’라는 뜻의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해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또한 ‘돌아와’라는 말(uJpostrevfw)은 누가 시켜서가 순전히 자원하여 제사장에게 집으로 가야 할 방향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수결에 약합니다. 다른 아홉 명이 제사장에게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혼자 예수님께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보같이 생각되지 않습니까? 잘못 판단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나중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명의 나환자 중에 한 사람은 마치 십일조처럼 깨끗이 고침을 받은 자신을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로 감사하는 일에 자신을 기꺼이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여기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납작 엎드린 겸손한 모습이며, ‘감사하며’라는 말(eujcaristw'n)은 동분사 현재 능동태로 계속해서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더구나 그 한 사람은 유대인들이 미천하게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마리아 사람은 주님께 감사헌금이나 값비싼 선물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어서 그저 납작 엎드려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으시면서 나머지 감사하지 않는 아홉을 찾으시는 것이었습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비록 주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한 사람의 감사를 기뻐하셨고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한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은 다른 아홉 사람이 받지 못한 더 큰 은혜를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나병에 걸렸던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믿음과 순종으로 고침을 받음으로 잃었던 것을 되찾게 되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회복되었으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주님을 감동하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음으로 영원토록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감사는 이렇게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금고를 여는 열쇠가 감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억지로 할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할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일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구원의 필수사항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믿는 자가 자원함으로 해야 할 선택 사항으로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생활에서 특히 어려움을 당할 때도 주님을 찾지 않는 것이며, 주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종교적인 형식에 머물 뿐 말씀을 듣고서 믿음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불평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평도 하고 감사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감사만 합니다. 그 중에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요?
믿음은 선행을 자극하지만 믿음에 의한 선행은 주님을 감동시키며,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을 감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선행을 위한 더 큰 믿음을 요구하기보다 내가 가진 믿음대로 선행에 옮기기 시작하면 믿음의 확신이 더해지게 될 것입니다.
요즘 경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은 오늘 성경을 통해서 주신 말씀처럼 믿음과 순종과 감사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태여 아프리카나 필리핀의 빈민들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을지라도 가까운 북한을 한번이라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 가운데 감사할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적인 사고를 가질 때 역경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을 감동시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을 나의 가정을 우리 사회를 우리 교회를 보다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면 불평대신 감사를 생활화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미소를 잃지 않는 일상적인 삶이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노라면 풍랑 이는 바다에 함께 타고 가는 배안에 승객은 모두 다 어지러움과 멀미를 느끼게 되는 것처럼 어려운 현실 경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며 믿음과 순종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감사의 수맥을 끌어 올려 주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 화
1) 어른이지만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머리 염색약. 2) 할머니 할아버지 오래 사셔야 해요. 다른 선물은 필요 없어요.
(마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