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내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욥 40:1-7)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 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6)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세월이 갈수록 전도가 더욱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것은 전도만이 아니라 이미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도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면 더더욱 그 믿음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늘 마음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일에 인색하신 것일까? 라는 의구심을 가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영적으로 오만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욥과 그 친구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아닌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돌이켜 보고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내심
우리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었다고 하지만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만들 수 없는 아름다운 대 자연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은 무한한 우주, 아름다운 동식물들, 인체의 신비를 비롯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그 자연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면서도 그 자연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그 자연들이 저절로 또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착각하고 그것들을 가리켜 자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연은 저절로 또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보이지 않는 그의 속성,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크신가를 보여주는 거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보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분명히 나타나서 알게 하셨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핑계할 수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자연은 보지만 그 자연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지혜와 능력은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시력을 잃은 사람처럼 죄로 인해 영적인 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에게 깨닫게 하시려고, 깨달은 것을 믿게 하시려고, 사람들이 얼마든지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 세계를 일일이 들어서 천체와 우주의 신비를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깨우치신 말씀이 욥 38장입니다.
(욥 38:31) “네가 묘성을 한데 묶어 놓을 수 있으며 오리온 별자리의 띠를 풀어 놓을 수 있겠느냐?” (욥 38:32) “네가 계절마다 제때에 별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곰자리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욥 38:33) “네가 하늘의 법칙을 알고 그 법칙이 땅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겠느냐?”
욥과 그 친구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수많은 것들을 보면서도 정작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욥을 보시고 안타깝게 여기시고 친히 임재하셔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심을 욥 38장과 오늘 성경 욥 40장의 서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욥 38,1-3)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2.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여 말씀하심
하나님께서 산 염소와 암사슴의 임신기간(1-4절), 들 나귀의 자유로움(5-8절), 들소의 힘(9-12절), 타조의 어리석음과 빠르기(13-18절), 말의 용맹(19-25절), 매와 독수리의 지혜(26-30절)와, 욥 40장에서는 초식동물 하마의 괴력(15-24)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를 아느냐? 하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욥이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상황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같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단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그와 같은 야생동물들을 개체별로 연구하는 동물학자들이 그것들을 생포하여 위치 추적기와 감시 카메라를 장치해서 그 모든 비밀들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에는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공부할 때 생물학적인 답변을 아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와 같은 짐승들을 생존케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깨달음이 최우선적인 목적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러한 자연만물을 통해서 인간에게 나타내시고 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교훈들을 깨닫게 하시 위함이었습니다.
1) 그 중에 산염소와 암사슴은 백수의 왕이라고 일컫는 사자나 호랑이의 밥이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연약하기 때문에 멸종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새끼를 낳아 기르는지 많은 떼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은 신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과학은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와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과 그것이 만삭되는 때와 그 낳을 때'를 얼마든지 밝혀낼 수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마취 총을 쏴서 생포를 하여 위치 추적기를 부착하여 레어더로 추적을 하여 동물의 이동경호와 생태계를 샅샅이 밝혀내기 때문에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 당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신비이며, 설령 현대 과학이 그것을 밝혀낸다고 할지라도 그 기한을 앞당기거나 늦출 수는 없는 것도 창조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들짐승들을 인간처럼 우리에 키우지 않으시고 들판에서 가장 자유롭게 각기 특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먹이사슬을 정하시고 그 개체수를 조절해 나가게 하시는 것도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욥에게 각가지 동물들을 열거하시면서 하나님이 그와 같이 하게 하시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2) 또 하나는 인간이 사육하는 말은 본래 야생마였는데 인간이 그것을 포획하여 길들여서 전쟁터에서 요즘으로 말하면 기갑 부대처럼 최강의 군대로 무장하는데 말은 가장 필수품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을 만드실 때 활달함과 용맹스러운 야성을 가지게 하셨기 때문이고 인간이 그같은 야생마를 충분히 길을 들여 전쟁터에서 주인을 위해 용맹스럽게 싸울 수 있게 하신 것도 신비로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욥 39:19-25)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3)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24)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25)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3) 그것만이 아닙니다. 독수리는 매서운 눈과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크고 힘센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상승기류를 타고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가서 멀리 넓게 먹이 감을 찾습니다.
호랑이와 사자가 백수의 제왕이라면 강한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독수리는 하늘의 왕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어떠한 짐승이나 사람도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자신과 새끼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높은 낭떠러지와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둥지를 틉니다.
그것만 아닙니다. 창공을 휘젓고 날아다닐 수 있는 넓은 날개를 주셨습니다. 또한 사냥하기에 좋은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가지만 아무리 멀리 있는 것이라도 먹이를 정확히 식별하고 쏜살같이 내리 꽂아 먹이 감을 낚아채서 하늘 높이 올라 둥지로 가지고 갑니다.
(욥 39:27-29)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4) 창조주 하나님은 욥을 지으신 것처럼 만물을 지으시는 가운데 소같이 풀을 먹지만 그 힘이 엄청난 베헤못이라는 하마를 지으신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연잎 아래서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그것을 손으로 잡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욥 40: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은 목동 한 사람 없이 그 모든 짐승들을 먹이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 40:20) 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만일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야생 사육하고 관리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인력과 돈이 필요할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고, 묵묵히 계신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을 유의하여 보고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여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성경 말씀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세로 듣거나 읽지 말고, 마음을 정제하고, 귀 기울여 듣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져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3.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욥
오늘 성경 본문인 욥 40장은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욥에게 말씀입니다.
(욥 40:1-2)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욥을 가리켜 ‘트집 잡는 자’라고 하셨는데 이 말(r/SyI 잇소르) )은
‘훈계자, 책망자, 교정자, 흠잡는 자’ 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욥이 묵묵히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을 때는 욥을 가리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 1:1)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욥을 사랑하셔서 그를 참소하는 사단 앞에서 높이 자랑하셨으며 그의 신앙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높이시기 위해 사단의 시험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친구들에게 온갖 말들로 아는 체 하고, 깨끗한 체 하고,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소리를 귀담아 다 들으신 후에는 ‘트집자는 자’라고 재평가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처럼 욥을 싸잡아 비난하고 정죄하시는 대신 깨우쳐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고 욥으로 하여금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교만한 욥을 계속해서 추궁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욥에게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큰 배려입니다. 우리가 비록 보잘것없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무시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욥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대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벌써 세상에서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누구보다 우리를 속속들이 다 잘 아시면서도 강압적으로 회개를 촉구하지 않으시고, 욥에게처럼 자연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시고,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친히 말씀으로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욥과 같은 회개와 고백과 결단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난날의 나와 오늘의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를 하고 계실까요?
1) 지난날에는 트집 잡던 자였으나 지금은 온전한 자라로 변화되었는지?
2) 지난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트집 접자는 자로 전혀 변화가 없는지?
3) 지난날에는 욥처럼 온전한 자였으나 지금은 트집 잡는 자로 변질 되었는지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고, 기대하셨고, 칭찬하셨던 욥이 친구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서 그에 대해 맞서서 반박하고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하여 억지를 부리는 많은 말을 하였을 때 하나님의 평가는 ‘트집잡는 자’라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신앙의 연조가 더 해지고, 나이를 먹고, 더 많은 고난을 경험하면서 나의 신앙은 점점 더 좋게 변화되어가고 있는지? 전혀 변화가 알아나지 않고 있는지? 아니면 점점 더 나쁜 모습으로 변질되어 가는지? 한번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시고 욥의 삶을 지켜보시며, 욥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만 계시던 하나님이 친히 임재 하셔서 욥의 아픈 부분을 지적하셨을 때 욥은 그동안 친구들에게 보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동안 욥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었지만 여러 친구들에게 좋지 못한 평가를 들을 때마다 그것을 거부하고 반박하기에 급급하면서 점점 더 트집 잡는 자로 변질되어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욥에게 임재하셔서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을 때 이전과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보면서도 참으로 지혜로우시며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친히 임재하여 그 자연 만물에 감춰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우침 받고 난 후에 비로소 자신의 미천함과 약한 것을 실감하게 되면서 정반대로 더욱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가를 고백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와 같은 욥의 고백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욥은 하나님께서 열거하신 질문들을 단 하나도 답변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한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욥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라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러한 욥은 하나님께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2) 욥은 그동안 친구들 앞에서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단 하나도 시인하지 않고 결백만을 고집하며 변명으로 일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 즉‘ 이라고 솔직하게 자신의 죄와 허물을 시인하였습니다.
3)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과거의 잘못된 모습을 깨닫고 난 다음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니아’ 라고 새로운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주 깨닫기는 하면서도 막상 실생활에서 그것을 적용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동안 친구들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했던 욥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당신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라”고 장을 열어 주셨습니다.
(욥 40: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무지와 연약함을 깨닫고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 채 침묵하기로 결단하였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당신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위엄차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습으로 욥에게 임재하여 말씀하시는 까닭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크신 하나님이신가를 깨우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욥 40:9)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하나님은 그동안 욥이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를 바로 알지 못한 채 친구들 앞에서 교만한 말을 쏟아 냈던 것을 회개하며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고, 묵묵히 계신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이 사모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귀 기울여 듣고, 믿고, 깨닫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설령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깨달음의 은혜를 구할지언정 마치 하나님이 불의하시고 불공평하신 분처럼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습 3:5)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과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특별히 계시하여 주신 성경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선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습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과 친히 임재하셔서 말씀으로만 깨우쳐 주셨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한 가지 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연 만물만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계시로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구원의 계시를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하여 그를 믿는 자들마다 구원을 얻는 놀라운 복을 받게 하신 것은 욥보다 더 큰 은혜와 복을 받은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는 신앙입니다.
과연 세상에서 하나님과 변론하여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어느 누구입니가?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될 때 더더욱 침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자신의 미천함과 함께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알게 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침묵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정작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말씀은 단 한마디도 없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침묵하고 좀 더 겸손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임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시 39:9)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지한 자인가를 깨닫고 욥처럼 겸손히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시는 일과 하실 일에 대해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자세를 늘 유지하기를 힘쓰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성품을 닮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설 교 > 이규왕목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소중한 약속/(창 3:11-17) (0) | 2012.12.23 |
---|---|
인생 마지막 때에 받은 복/(욥 42:12-17) (0) | 2012.12.23 |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눅 17:11-19) (0) | 2012.11.19 |
헛수고가 아닙니다/(눅 5:1-6) (0) | 2012.11.02 |
성령을 사모하는 사람들 /(행 1:4-5) (0) | 2012.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