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보고 싶은 사람들/(살전 2:17-20)

미션(cmc) 2013. 2. 5. 17:44

보고 싶은 사람들
(살전 2:17-20)

(살전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 2: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우리가 육신적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나는 홀로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서 부모님과 식구들과 더불어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게 됩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가족이나 부모님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했던 청년도 입대를 하게 되면 제일 먼저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고 가족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단순히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마치 유모와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사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어서 황금히 데살로니가를 빠져 나온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채 전하지 못한 복음을 밤을 지새우면서라도 실컷 전하고 싶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은 더욱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보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1. 바울을 끊임없이 감사하게 하는 교회
바울 사도가 비록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어떻게 해소하였을까요?

1)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 중에 하나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믿음을 생각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 하였습니다.
[살전 1:2]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여기서 ‘쉬지 않고’라는 단어가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끊임없이’라는 말고 같은 단어로 계속적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 사도의 그같은 마음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음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여기서 ‘끊임없이’라는 말(ajdialeivptw")은 사도 바울이 평소 마음으로 사모하는 성도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하였음을 뜻합니다.
바울 사도가 그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끊임없이 감사하며 기도하는 까닭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바울 사도의 사랑을 받을 만한 긍정적인 믿음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주를 위해서 무슨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마음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아름답게 믿음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바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여 아름다운 신앙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달리 어제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음으로 읽고, 듣고, 받는 자에게는 동일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1)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를 버리고 회개하게 하고,
2) 구원의 확신을 갖고 말씀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게 하고.
3) 상한 마음과 병든 육체를 치유하여 건강하게 하고.
4) 마음에 근심과 염려를 몰아내어 기쁨이 가득하게 하고,
5)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저와 같은 목회자들도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눈을 마주치고 귀를 쫑긋 세우고 아멘으로 받으며,
2)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3) 점점 믿음이 자라서 기도를 받던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사랑을 받기만 하던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모습은 목사로 하여금 목회의 보람을 느끼고 감사하게 하게 합니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농부가 땀 흘려 뿌린 씨가 싹이 나서 잘 자라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처럼, 부모가 자식을 위해 수고하지만 공부를 잘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과 보람을 갖는 것처럼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기도하게 하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2. 핍박과 고난을 묵묵히 이기는 교회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에만 복음을 전하고 쫓겨난 것은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쫓겨난 후에도 유대교인들이 여전히 교회를 핍박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성경에서 유대교인들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극렬히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죄악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살전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살전 2: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1)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보내신 의로운 선지자들을 무참하게 죽였으며,
2) 바울과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핍박하였으며,
3) 고루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오만하게 이방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유대인들이 바울이 떠난 후에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핍박한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하였습니다.
(살전 2: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본받은 자“라는 말(mimhthv")은 바울을 비롯하여 기독교 초창기에 교회가 박해를 받은 것과 동일한 고난을 받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은 마치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부터 핍박을 받은 것과 같은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핍박에 대해서도 얼마나 잘 견디고 이기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핍박이 있을 것을 미리 경고하신 것처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이 고난입니다.
[요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그러한 고난이 제자들에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게 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의 면역력을 키워 더 큰 시련을 극복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 화 1
예전에는 요즘과 같은 소아과 병원이나 약국이 없었습니다. 의료시설이 전무하다시피한 시절에 아기가 질병에 걸리게 되면 잘 낫지를 않고 오래 동안 고생을 하거나 아니면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일이 되고 돌이 되면 친지를 불러 잔치를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아기들은 모태에서부터 엄마의 면역력을 가지고 태어나 100일 정도 생활하면서 자기 면역력을 키우는데 그 고비가 100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0일을 넘기면 의료 시설이 전무하던 시절에는 100일 잔치를 하는데 백설기를 만들어 100사람에게 나누며 기쁨을 나누는 유래가 100일 돌잔치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반드시 넘어야 할 백일과 돌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마치 필수과목처럼 찾아오는 고난과 시련과 유혹입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슬람 사람들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바울사도처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예 화 2
미국 오픈도어스가 발표한 `2013 월드워치 리스트'에 따르면 50개 종교박해국 리스트에서 북한이 11년 연속 `선두'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기독교 박해 정도를 점수로 환산할 때 북한은 100점 만점에 87점을 기록해, 2위 박해국인 사우디아라비아(75점), 그 다음이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소말리아, 몰다브, 말디, 이란, 예멘, 에리트리아, 시리아, 수단,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에디오피아, 우주베키스탄, 리비아, 라오스 등입니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장 살기 힘든 나라"라면서 "얼마 남지 않은 공산국가 가운데 하나인 북한은 어떤 종류의 종교도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체포, 구금, 고문을 당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공개 처형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서 "15호 정치범 수용소에는 6천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이 구금돼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아울러 "중국으로 탈출해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강제 송환당한 북한 주민들은 수감, 처형 등의 위험에 빠진다"면서 "또 탈북자를 돕는 기독교인들은 살해당하기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초기에 많은 박해를 받았고 그에 굴하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한국교회의 부흥은 앞서간 성도들의 그와 같은 핍박이 교회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남한에는 기독교 핍박이 없을까요? 엄청난 안티기독교와 점차 목조이고 있는 반기독교적인 사상들이 점점 기독교의 전도의 자유를 제한하고, 주일 성수를 하지 못하게 하고, 특별히 미래의 교회의 꿈나무들이 기독학생들을 주일날에도 등교를 시키기 때문에 신앙의 종자 씨들이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서 오늘의 기성세대와 교회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청소년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만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신앙의 자유가 너무 많아서 우리의 신앙을 방만하고 안일하게 만들기 때문에 유혹과 시험을 잘 이기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3. 기쁨과 자랑과 영광의 면류관인 교회
유대인들은 바울의 일행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정치적인 술수를 써서 바울의 일행을 정치범으로 몰았습니다.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장터에서 깡패들을 동원하여 떼를 지어 다니면서 그 도시를 소란케 하고 바울과 실라를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을 덮쳤으나 사람들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야손과 신자 몇 사람을 당국자들에게 끌고 가서 세상을 온통 소란케 하는 사람들이 이 곳에도 왔는데 야손이 그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로마 황제를 거역하고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군중들과 그 도시 당국자들은 이 말을 듣고 소동하였습니다. 당국자들은 야손과 다른 신자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더 오래 머무는 것은 선한 의도로 바울의 일행을 맞아준 야손을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야손이 원하는대로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행 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여기서 ‘보내니’라는 말(ejkpevmpw)은 행 13:4에서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였을 때 사용된 단어로 신약에서는 두 곳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실라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베뢰아로 파송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상처를 받았지만 베뢰아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큰 성과를 이루기고 하였습니다.
(행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문제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에게 이 정보가 들어가자 핍박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무리를 움직여 베뢰아까지 원정을 가서 소동을 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베뢰아를 떠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의 박해는 매우 집요하였습니다.‘
(행 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여기서 ‘소동하게’라는 말(taravssw)은 ‘함께 뒤흔들다, 분기시키다, 어지럽히다, 불안하게 하다’는 뜻의 동분사 현재 능동태(taravssonte")로 바울의 일행이 베뢰아를 떠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계속하여 핍박을 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환난 중에서도 믿음이 건강하게 잘 자라나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으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마음으로 늘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1) 바울이 어쩔 수 없이 데살로니가를 떠났지만 정작 떠난 것은 얼굴이지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를 떠나온 것이 마음에 걸려서 여러 번 다시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려고 열정을 다해 힘썼다는 것입니다.
(살전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여기서 ‘떠난 것은’이라는 말(ajporfanivzw()은 ‘부모를 잃다’라는 뜻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것은 자의가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얼굴을 서로 볼 수 없을지라도 마음만은 데살로니가를 떠나지 않고 그리워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여러 번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려고 시도하였지만 사단이 이를 방해하고 길을 막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지 못했다고 변명을 하였습니다.
(살전 2: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여기서 ‘막았도다’라는 말()은 ‘방해하다, 훼방을 놓다, 끼어들다’라는 뜻으로 본래는 군사용어로 추격하는 적의 길을 차단하거나 방해할 때에 사용된 용어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단이 어떻게 사도 바울의 길을 막았을까요? 그것은 바울 사도가 가려고 하는 길목의 다리를 끊었다는 말이 아니라 핍박자들을 동원하여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통해서, 인간의 제도를 통해서, 무신론 문화를, 타종교를 통해서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3) 바울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지금 바울의 일행이 복음 전도를 위해 온갖 수고를 하지만 장차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아름다운 신앙은 바울에게 있어서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다시 만나는 일이 어려울수록 더욱 더 보고 싶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부를 누리며 살았는지,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의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었는지,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살았는지,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며 충성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장차 주님 앞에서 자랑과 기쁨과 상급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러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1) 영적인 가족인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가족도 오래 동안 헤어져 있으면 사랑이 식어지지만 신앙 공동체인 교회 식구들이 서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할 때 육신의 가족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참 사랑을 나누며 보고 싶은 사람들이 됩니다.

2)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저절로 정이 들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교회를 출석한지 오래지 않아도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듣고 순종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면적으로 역사하여 죄를 회개하게 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때 그 모습을 보는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서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3) 새 신자를 전도하고, 셀과 구역에서 믿음이 연약하고 가난한 성도를 붙들어 주고, 믿음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는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교회를 섬기고 구역과 셀과 전도회를 섬기는 가운데 우리들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믿음이 성숙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는 사소한 이해관계나 이견 때문에 아옹다옹하면서 살지만, 일단 교회에 나온 후 성도들 간에는 그러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주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보고 싶어 하는 영적인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만나면 반갑고, 헤어져 있으면 궁금하고, 보고 싶은 사이가 되어야만 진정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음 생활을 할 때 장차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주님 앞에서 자랑하고 기뻐하고 상받을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