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사람들
(살전 3:1-7)
(살전 3:1-7)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설 명절을 맞이한 우리 성도들이 지난 한 해에도 불경기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교회를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일이 자유롭지 못함으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옛 속담에 ‘내 코가 석자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돌아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과거에 ‘이웃은 사촌이다’라고 말했던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때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려울 지라도 옛날보다는 훨씬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은 고사하고 마땅히 돌아보아야 할 가족이나 친지간에도 갈등이 심하고 오직 나만 아는 이기주의가 보편화 된지가 오랩니다.
세상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우리들의 신앙은 거룩한 공회로 하나님께 수직적으로 예배를 잘 드리는 것으로 다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같은 지역에 사는 구역 식구나 셀 식구들끼리, 전도회원들끼리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위로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사도 바울의 처지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에 혼자 다니시지 않으시고 열두 제자들과 더불어 최소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라도 대동하셨고, 제자들을 전도 훈련시키실 때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일이삼차 선교 여행을 할 때 항상 혼자서가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바나바, 그 외에 마가 요한, 의사 누가,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핍박과 복음전도 훼방으로 인해 데살로니가에서도 베뢰아에서도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바다까지 가게 해서 배를 타고 건너 아테네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그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머물게 하고 자기는 아데네로 건너가면서 속이 아데네로 오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행 17: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행 17: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물론 온갖 우상과 무신론 철학의 도시 아데네에서 복음 전도는 쉽지 않았습니다. 기대와 달리 성과가 미미하여 바울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아데네에서 바울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의 그리스의 아덴에서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누군가의 도움과 위로가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살전 3: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여기서 ‘궁핍’이라는 말(ajnagkh)은 단순히 배고픈 상태가 아니라 외부적인 ‘압박으로 인해 육신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죽을 지경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환난’이라는 말(qlivyi")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과 동일한 고난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의 처지가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고통을 돌아볼 마음이 여유가 없는 상태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이 아데네에서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믿음의 아들 디모데의 도움이 무엇보다 절실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참다못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위로와 격려의 사절로 데살로니가에 보낸 것입니다.
(살전 3:1)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여기서 ‘참다못하여’라는 말(stevgw)은 더 이상 제지가 되지 않는 현재진행 상태를 뜻하며, ‘머물기를’이라는 말(kataleivpw)은 '뒤에 남겨둔다‘는 뜻이고, ’좋게 생각하고‘라는 말(eujdokevw)은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으로 억지로가 아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처지가 물론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처지를 더 안타깝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또한 ‘굳건하게’라는 말(sthrivzw)은 마치 주택단지나 도로 공사를 하면서 새로운 나무들을 이식할 때 버팀목을 세워 지지해주는 것처럼 '고정해주다, 강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바울이 예고한 일이지만 핍박이 현실이 되었을 때 믿음이 연약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혹시 주를 부인하지는 않을까? 순교를 당하는 않을까? 온갖 걱정과 염려가 앞섰습니다.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여기서 ‘미리 말하였는데’라는 말(prolevgw)은 한번만이 아님을 뜻하는 미완료 동사로 바울의 예고가 적중한 것입니다.
물론 디모데가 바울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와 같은 핍박을 당하는 것을 생각하니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핍박으로 인해 신앙이 요동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고, 위로하게 하기 위해 디모데를 파송했다는 것입니다.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여기서 ‘헛되게’라는 말(kenov")은 ‘문자적으로는 ’공허한, 텅빈, 허무맹랑한’이라는 뜻으로 그동안 사도 바울이 수고한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을 뜻합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보낸 것은 자기에게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디모데를 보낸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니, 나눔이니’ 하는 말은 나에게 불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눈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을 절제하고 희생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2. 바울에게 되돌아온 복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핍박으로 상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낸 것은 큰 희생이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바울은 희생만하고 손해만 보았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디모데가 주어진 미션을 다 마치고 바울에게 돌아와서 들려준 소식이 도리어 사도 바울에게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여기서 디모데가 전해 준 ‘사랑의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동안 데살로니가 교회와 사도 바울을 이간하는 사람들의 말 때문에 생긴 오해를 디모데가 가서 풀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핍박 중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견고해진 신앙의 소식은 무엇보다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몹시도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바울을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여기서 ‘위로’라는 말(parakalevw)은 ‘~곁에’ 라는 말과 ‘부르다’ 는 두 말의 합성어로 '자기 곁으로 부르다'라는 뜻으로 '다정하게 곁에서 권고하고 격려하고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위대한 사도이지만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의기소침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외로워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우리와 똑같은 성품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이 지금 아덴에서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다는 것은 누구에겐가 위로와 도움이 절실한 상태임을 뜻합니다.
그런 심정의 바울 사도에게 디모데가 전해준 데살로니가 교회 소식은 바울을 다시 매우 기쁘게 하였고 신나게 하였고 큰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디모데가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계속 붙들어 두었다면 육체적으로 조금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처럼 큰 위로를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인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던 것이 결과적으로 손해가 아니라 도리어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히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위로는 인간의 상황을 바꾸어, 슬픔을 기쁨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위로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1)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2) 노아 홍수 심판 후에 언약의 무지개로 노아를 위로하시고
3)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을 약속하시고,
4)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시고,
5)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위로로 말미암아 큰 구원을 얻었고, 주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위로를 베풀어 주신 것은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위로가 필요한 또 다른 이웃을 위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물론 남을 위로한다는 것이 말하기는 쉽지만 나를 내려놓아야 하고 내가 죽어야 하고 나를 희생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고 도리어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로하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1) 어린자녀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부모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도 자식들로부터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2) 가난하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서민들에게 지도자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것처럼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에게도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며 또한 내 곁에 있는 사람도 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 화2
한기총 지도자들의 소록도 방문이야기-84세 유인석 할아버지의 기도. 71년전에 소록도에 들어왔으나 목사님들을 위해 기도.
소록도 병원 의료부장 오동찬(45)-많은 사람이 소록도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왔다가 힘을 얻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신앙의 뿌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인사말 ‘예수 믿으시지요. 힘을 냅시다. 장신심 권사(77) “밝게 사셔요, 예수가 힘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살이가 힘이 듭니까? 신앙생활이 힘이 듭니까? 누가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 줄 것인가? 를 찾지 말고,
1) 누가 나의 도움이 필요한가? 내가 이렇게 힘이 드는데 나보다 어려운 사람은 얼마나 더 힘이 들것인가? 내가 도울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을 내 주변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진정으로 나를 도울 수 있고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멀리가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위로와 격려는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원망과 불평과 비난과 정죄와 고소와 고발만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왠지 곁에 낯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불안하고, 누군가 친절하면 의심부터 하게 되는 불신풍조가 만연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제자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성령을 닮아 바울 사도를 닮아 남을 위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병주고 약주는 존재이지만 영원한 위로 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람을 통해서 위로하신답니다.
(고후 7: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것은 비단 물질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아프고 상한 마음을 누구에겐가 위로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내가 주님으로 받은 위로를 나누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보다 먼저 남을 배려하고, 베풀고, 위로하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결국 내가 잘되는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반드시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벧전 3:8-13) “이제 여러분 모두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한 식구처럼 서로 융화를 이루십시오.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손해를 입었다고 해서 보복을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친절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기를 기도하십시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베풀고 위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남에게 양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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