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기도
(살전 3:8-13)
(살전 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살전 3: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살전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3: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살전 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살전 3: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부의 기쁨은 고기를 배에 가득히 담아 가지고 항구로 돌아오는 만선의 축복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배도, 그물도, 기술도 좋아야 하고 물때도 맞아야 하지만 아무리 고기를 많이 잡는다고 할지라도 그물에 구멍이 나 있으면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부는 바다에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고 난 다음 육지에 올라와서는 반드시 그물을 씻고 혹시 구멍이 난 곳이 없는지 수선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에도 그들이 하고 있었던 일이 바로 그물을 깁는 모습이었습니다.
(마 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여기서 ‘그물 깁는’이라는 말(katartivzw)은 ‘준비하다, 회복하다, 완전하게 하다’라는 뜻의 현재 진행형인 동분사 현재 능동형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계속해서 반복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도록, 열심히, 충성스럽게 할지라도, 주일마다 날마다 시간마다 우리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지 못하다면 그 신앙은 빈 그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신앙의 그물코가 빠져 구멍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도 광풍이 분다고 할지라도 고기를 배에 가득히 실코 항구로 돌아오는 어부의 마음에는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것처럼, 아무리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것은 영적 만선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와 같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을 통해서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사도 바울의 근심과 기쁨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광신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것이 곧 내가 바르게 사는 길이며 진정 나 자신을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한 마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에 기록된 말씀처럼 만사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 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한다면 그 답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막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어느 곳보다 가장 확실한 답을 주는 성경말씀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지만 사도 바울도 막상 그렇게 살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는데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아테네에서와 같이 열심히 복음을 전했으나 열매가 미미할 때였습니다.
더구나 거짓 선지자들과 유대주의 자들이 바울을 모함하고 이간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약화시킨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욱 더 바울을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바울이 지금까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을 더욱 더 근심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평소에 바울 사도는 여러 교회와 성도들에 은혜와 평강을 빌며 축복과 위로를 주면서 살아온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위로를 받는 것이 절실한 처지였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에게 큰 위로를 준 사람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바울 사도가 걱정을 하고 염려하였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긍정적인 믿음의 소식이었습니다.
(살전 3: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화해의 사절로 바울에게 전해 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믿음이 견고하게 서있다는 것과 바울 못지않게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은 그동안 바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들을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게 하고 바울에게 큰 위로와 활력을 쏟아 부어 주었음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살전 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여기서 ‘굳게 선즉’이라는 말(sthvkw)은 지속적으로 확고하게 버리고 서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살리라’는 말(zavw)은 병든 자가 회복되어 건강하게 남을 생을 살아가는 것과 초자연적인 생명으로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동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 마음이 심히 약해졌었으나, 이제 새 힘을 얻었음을 쉽게 번역한 성경을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전 3:8)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기만 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도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모든 환난과 역경 중에서도 확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만큼 목회자에게 보람과 활력소를 불어 넣어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의 간절한 기도와 소원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통해서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환난 중에도 요동하지 않고 믿음으로 굳건히 서있다는 긍정적인 바울에게 단지 마음에 위안만을 준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동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 때문에 마음에 기쁨이 없었는데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회복되었습니다.
(살전 3: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여기서 ‘보답할까“라는 말(ajntapodivdwmi)은 ’되돌려 주다, 보상하다‘라는 뜻으로 사도 바울은 그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그 은혜를 어떻게 하나님께 갚을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기쁨은 자기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쁨의 참된 근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합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와의 불편한 관계가 해소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회복하고 난 다음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하는 염려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바울의 처지로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물질도 없었고,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만나기를 소원해도 만나기 어려운 많은 장애물과 사단의 훼방으로 인해 오고갈 수 없을 때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살전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주야’라는 말은 단순히 밤과 낮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라는 말이며, ‘심히’라는 말은 ‘한도를 넘어서 더 많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지만 멀리서나마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그와 같이 성숙한 수준에 이르기를 위해서 주야로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은 그렇게도 갈망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과의 만남을 하나님의 섭리의 손에 위탁하여 그분이 확실하게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기도는 즉시 응답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은 5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바울에게 다시 마게도냐를 방문할 수 있도록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때 바울 사도는 더욱 기쁨과 감사가 넘쳤을 것입니다.
3. 바울 사도의 기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와의 불편한 관계가 해소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회복하고 난 다음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하는 염려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바울의 처지로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물질도 없었고,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만나기를 소원해도 만나기 어려운 많은 장애물과 사단의 훼방으로 인해 오고갈 수 없을 때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살전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주야’라는 말은 단순히 밤과 낮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라는 말이며, ‘심히’라는 말은 ‘한도를 넘어서 더 많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마치 고린도교회처럼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흔히 경마장에서 기수가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까닭은 더 잘 달려서 일등을 하기 위함인 것처럼 더욱 성숙한 믿음을 위한 노파심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치 자라는 어린아이처럼 인격적인 것으로 아무리 성숙하다고 할지라도 성인에 이르도록 어린아이가 계속해서 자라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믿음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나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갓 태어난 어린 아기가 백일이 지나고 돌을 맞을 때까지 각종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있어서 그것을 이겨내야만 하는 것처럼 많은 시험과 유혹과 핍박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와 같은 시험과 유혹에서도 능히 이기게 하는 영적인 항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좋다고 해서 안심하지 않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무엇보다 십자가 사랑을 잊지 않기를 하나님께 주야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살전 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여기서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한 바울의 기도를 보면 바울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발원하여 온 성도들의 심령에 스며들어
1)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를 깨닫고 믿고 감격하며,
2)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도들 간에 피차 나누며,
3) 그 사랑이 널리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흘러넘치게 하는 강물 같은 사랑이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목적이요, 지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교회에 모이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이요, 장차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실 심판의 잣대이기도 합니다.
(살전 3: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삶이란 미래의 환상이나 종말의 시기에 초점을 두어 현재의 삶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성실하게 삼으로써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조금도 흠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재림을 가장 잘 준비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살전 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라는 말씀처럼 예수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도 우리들처럼 기도가 부족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 기도를 많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가 잘못되었을 때 그와 같이 염려하고 근심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와 같은 사람이 그 정도였다면 오늘 우리는 더 말할 것이 없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잘못된 관계를 수년 동안, 수십 년 동안 방치한 상태에서 형식적인 예배를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몹시 싫어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예배와 더불어 악을 행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다면 그것보다 더 허망한 일, 불행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먼저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토록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다가 보면 우리의 신앙의 그물이 찢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쁨이 없고 구원의 감격을 상실한 채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마지못해서 반복할 때가 자주 있을 것입니다.
만일 지금 나의 영적인 상태가 그와 같다면 무엇보다 먼저 나의 신앙의 그물을 깁는 일이 가장 시급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비난하고 험담하고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이제는 서로 위로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회복하는 그물 깁는 일이 반드시 동반되어야만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신앙생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기도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없는 삶은 아무리 선할지라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단순한 윤리 도덕에 불과합니다.
정반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없는 신앙고백은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적인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땅에서 풀어야 할 것은 땅에서 푸는 노력이 따라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관계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기서 ‘화목하고’라는 말(diallavssw)은 잘못된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지 말고 새로운 관계로 빨리 ‘변경하라, 구별하라, 바꾸라, 화해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일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하고, 하나님이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오늘 성경의 바울 사도처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기도와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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