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하나님이 가르치신 사랑/(살전 4:9-12)

미션(cmc) 2013. 3. 11. 11:12

하나님이 가르치신 사랑
(살전 4:9-12)

(살전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2)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영적으로 무지한 우리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기 전에는 내가 상당히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인 줄 착각하고 교만하기 그지없던 사람이었으나, 성경을 읽고 듣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분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고 비로소 겸손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성경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이것만은 반드시 알고 실천해야 할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을 통해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이시기 때문에 성경의 계시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설령 아이큐와 학벌이 높고 인생 경험이 많아도 그것만으로 ‘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셨으며, 무엇을 하실 것인지?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그와 같은 것들을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여 주십니다.

1) 사람마다 이름이 있고 개성에 걸 맞는 별명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이름이 있고 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고, 별명은 ‘사랑’입니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2)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시기 위해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12: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5) 예수님은 십자가로서 그 두 가지 사랑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삶을 닮고 배우는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총체적인 상징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자기희생, 자기 부인과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두 가지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이처럼 모여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만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할 가족과 교우는 물론 나와 무관한 이웃과 심지어 나를 미워하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2. 가르치심에 순종하는 교회
하나님의 그와 같은 가르치심을 가장 잘 순종한 교회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라고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 성도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을 때에는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어두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전해 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믿게 되었고 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임을 깨닫고 믿고 난 후에는 온갖 우상과 죄악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모진 환란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본받아 자기들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함으로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여러 교회들에게 본이 되는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살전 1:6,7)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 사랑에 대해서 더 이상 강조할 것이 없고 오히려 칭찬을 하고 자랑을 할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와 같은 사랑의 실천이 단순히 인간적인 연민이나 동정심에서 유발된 이웃 사랑이 아니라, 그와 같은 범주를 벗어나서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초월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살전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가르치심’이라는 말(qeodivdakto")은 성경 여기에만 딱 한번 나오는 것으로 성경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뜻합니다.
또한 가르치심을 ‘받아’라는 말(ejste)은 ‘너는 무엇 무엇이다’라는 뜻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르치심대로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함이라’는 말(ajgapa'/n)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원하여 현재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같은 형제 사랑은 대내적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내 교회를 뛰어넘어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어려운 다른 교회의 형제들에게까지 사랑의 손길을 펼쳤다는 점입니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골육친척의 담을 뛰어 넘어 주안에서 믿음의 형제들까지 사랑할 뿐 아니라 자기 교회를 뛰어넘어 지역 교회의 형제들까지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마치 자식에 대한 기대가 한이 없는 부모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마치 달리는 경주 말에 기수가 채찍질을 하며 몰아내는 것처럼 ‘더욱 더 그렇게 행하라’고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살전 4: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여기서 ‘권하노니’라는 말(parakalevw)은 ‘소원하다, 권하다, 격려하다, 애원하다, 간구하다’는 뜻으로 거절할 수 없도록 간곡하게 부탁하는 말입니다. 흔히 ‘형제’라는 말은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혈육의 관계를 뜻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기 교회를 넘어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라고 하고,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은 혈육의 관계가 아닌 주 안에서 십자가의 보혈로 맺어진 ‘믿음의 형제’를 뜻합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은 대로 대내적으로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온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랑을 행함으로 본을 보였다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형제 사랑이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다른 교회들의 모범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3. 본받는 교회와 성도
당시 마게도니아 지방에는 데살로니가 교회 외에도 빌립보 교회와 베뢰아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마게도니아 지방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다른 교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건데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게도니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는 좋은 일을 본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이를 보고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며 옥중에 있는 바울을 위해 위로의 사절을 보내고 위로금을 모아 힘써 도왔습니다(빌 4:10-19).
뿐만 아니라 마게도니아 교회들이 어려운 중에서도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사랑의 모범을 보인 것도 알고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 사랑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몸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가페 사랑만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필라델피아의 사랑까지도 말입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부정하고 형제에게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시련을 넉넉히 오히려 허다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제사장들까지 개종하여 교회로 모여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이기적인 모든 생각을 버리고 먼저 형제와 교회를 사랑해야겠습니다.
마치 나무가 처음 자랄 때는 위를 향해 자라 올라가지만 점점 자라면서 넓게 퍼져 그늘을 만들어 가듯이, 우리 성도들도 믿음이 점차 자라면서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수평적으로 형제 사랑의 대상의 범위를 더욱 넓혀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사랑해서는 안 되는 자기 사랑이라는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 남을 도우며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석가 J. Denney 는 ‘형제 사랑이야 말로 교회의 참된 증표’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 증표를 잃어버렸는지 팔아먹었는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상당수의 교회와 성도들이 교회와 교단과 교파와 지역과 나라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개인주의, 개 교회주의, 개 교파주의에 빠져서 분열과 분쟁으로 갈갈이 찢어지는 동안, 기독교의 최대의 걸림돌인 이단들과 이슬람 세력들은 모든 벽들을 허물고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 기독교를 집중공격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이 바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형제사랑의 실천이라는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나 의인이 아니라 죄인까지, 제자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으로 품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본받는 다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닫는 사람은 비로소 형제의 폭을 더욱 넓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그것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이유요, 그것이 아직 나를 부르시지 않고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미루어 보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깨닫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내부적으로 교인들끼리는 물론 외부적으로 지역 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에게까지 사랑을 나눈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제사랑은 먼저 마땅히 사랑해야 할 부모형제 골육친척이 서로 사랑하고 우애 있게 지내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원망하고 비방하고 모함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협력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3) 한 교회 교인들끼리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교회와 교회, 교단과 교단, 지역과 나라의 벽을 허물고 예수 안에서 한 형제로 알고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4) 더 나아가서 한국 교회의 이름으로 세계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피부색과 언어가 다를지라도 형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땅히 사랑해야 할 골육친척과 교우들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게 손해와 불행과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요일 3:14-16) 16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2)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곧 형제를 살인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3)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4)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히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형제 사랑을 나부터 아니 나만이라도, 우리 교회만이라도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 같은 실천해야만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이웃이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오늘 성경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형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