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눅 24: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눅 24: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눅 24: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눅 24: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사람이 물을 찾는 것은 목이 마르기 때문이라면 사람들이 행복을 원하는 것은 행복에 목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과 평화가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사람 사는 것이 경제문제, 가정 문제, 건강문제, 인간관계 등등 다 같은 배를 타고 가기 때문에 무슨 종교를 믿든지 세상을 사노라면 마음에 평화를 잃어버리고 도리어 원치 않는 불안이나 근심이나 원망이나 불평을 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그 마음에 평화를 회복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풀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그러한 고민을 하고 살아가는 있는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원하는 행복을 상실한 채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지 그 답을 가르쳐 주는 행복의 나침반입니다.
1. 행복의 메뉴얼
우리가 가전제품을 사게 되면 구조와 사용방법을 가르쳐 주는 매뉴얼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성경이라는 매뉴얼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마치 고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면서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행복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누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행복의 매뉴얼입니다.
(시 1:1) “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 1:2) “그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시 1:3)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시 1:4) “나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시 1:5) “그러므로 나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을 견뎌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인들은 착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시 1:6)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여호와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악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임을 깨우쳐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행복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의 행복은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하고, 이기적이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가능하다는 행복의 매뉴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4)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마 5:6)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만족할 것이다.” (마 5:7)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가리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고 저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많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그 같은 행복의 매뉴얼이 좋기는 하지만 그 대로 살면 고난이 따르고 죽음이 오지 않을까 하는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 약점을 아시고 이렇게 격려하신 것입니다.
(마 5:10)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11) “나의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 너희는 행복하다.” (마 5:12) “그럴 때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이같이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이 시대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더 어려워질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요?
2. 예수님의 제자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도 크게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시고 골고다 십자가를 향해 끝까지 묵묵히 나아가게 하신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신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눅 24: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여기서 ‘하리라’는 말(dei)은 ‘반드시 -해야 한다. 필요하다’는 말로 강제적으로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부활의 필연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 여러 곳에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수한 가죽 채찍질을 당하고, 사형수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십자가에 못 박혀 물과 피를 다 쏟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만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 후 불과 사흘 만 지나게 되면 그 모든 십자가의 아픔을 다 씻고도 남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더불어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만을 보면, 십자가만을 생각하며 절망이요 슬픔이요 불행같이 생각되지만 그 십자가 고난이 큰 것만큼 사흘 후에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될 찬란한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면 십자가 고난도 참을 수 있고 십자가 고난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의 초점을 어디에다 맞추는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하나는 초점이 흐릿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동일 선상에 있습니다. 다만 사흘이라는 간격을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어디다 초점을 맞추는가가 중요합니다.
1) 예수님은 초점을 부활에다 맞추셨기 때문에 십자가도 개의치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서 ‘개의치’라는 말(katafronevw)은 ‘경히 여기다, 멸시하다’라는 뜻으로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멸시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2) 그러나 제자들은 초점을 십자가 고난에다만 맞추고 약속하신 대로 부활을 잊어버렸습니다.
(요 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서 ‘알지 못하더라’는 말(ei[dw)은 ‘보다, 지각하다, 느끼다, 주목하다, 알아채다, 관찰하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실 있었지만 제자들은 십자가에 앞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3. 행복한 제자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첫 부활절 이른 새벽 예수님이 장사된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남자도 여자들이었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이유는 예수께서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 살아나리라 고 하신 말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서 악취가 나는 것을 방지하는 향품을 사전에 준비해 두었다가 그것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그 여인들 역시 부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무덤에 장사한 사흘이 된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드려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의 믿음은 과연 좋은 믿음이었을까요? 예수님을 장사했던 무덤 문은 누군가에 의해서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이 굴려 옮겨져서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무덤 안에 들어가서 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그곳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눅 24: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러자 여인들의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근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1) 불신앙의 결과
주님이 부활하신 가장 기쁘고 복된 날 그들은 가장 슬픈 불행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눅 24: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 (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는다고 무덤 앞에서 슬퍼한다고 결코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열정보다 바른 이해와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부활에 대해 어떤 자세를 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전해주는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눅 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기서 ‘허탄한 듯’이라는 말(lh'ro")은 ‘잡담, 어리석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찾아 오셔서 그들과 동행하고 계시는대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들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눅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여기서 ‘슬픈 빛’이란 말(skuqrwpov")은 ‘의기 소침하여 비참함과 슬픔과 우울한 마음을 가지고 심각해 하는 눈빛’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결코 행복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외면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영적 퇴보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 부활신앙의 회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에게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과 친히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치료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을 행복한 제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성경에서 부활에 대해 약속의 말씀들을 하나하나 풀어 가르치셨습니다.
가) 그 결과 그들의 눈이 밝아지게 되면서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나) 그 결과 냉랭하기만 하던 제자들의 마음이 마치 용광로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다) 그 결과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라) 그 결과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여 그들을 떠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여 성전에 모여 기쁘게 찬송하며 예배하는 행복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눅 24: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마) 마침내 약속하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을 때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부활의 증인이 되어 행복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물론 부활의 증인의 삶이 편하고 존경받고 대접받는 삶이 아니라 고난의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고난당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설령 생명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그들도 주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이 부활절 아침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물어보시는 주님 앞에 “아멘”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물붓듯이 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롬 8:38)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죽음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생명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옥의 모든 세력을 다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멀리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 대한 우리의 염려도 내일에 대한 우리의 공포도”(롬 8:39) “또는 하늘 높이 올라가거나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거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설 교 > 이규왕목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공동체/(살전 5: 6-11) (0) | 2013.04.23 |
---|---|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살전 4:13-18) (0) | 2013.04.23 |
나귀 새끼를 타신 왕의 입성/(요 12:12-15) (0) | 2013.03.26 |
하나님이 가르치신 사랑/(살전 4:9-12) (0) | 2013.03.11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살전 4:1-6) (0) | 2013.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