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새끼를 타신 왕의 입성
(요 12:12-15)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한 해를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그 해가 지나가기 전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기념일이나 국경일과 같은 특별한 날들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일 년의 특별한 행사를 가르치는 교회력 가운데 크게 두 가지는 예수님의 탄생을 대망하는 마음으로 네 주간을 지키는 대강절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네 주간 동안 기리는 사순절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은 그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고난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주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 큰 무리들이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흔들면 호산나 소리쳐 환호했던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은 고난주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심으로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기까지 전 생애가 다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한 주간을 특별히 고난주간이라고 일컫는 까닭은 예수님이 일생동안 당하신 고난가운데 가장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연이어 부활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의 무슨 과오 때문이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들의 음모와 술수 때문도 아니라 알고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다 아셨으면서도 묵묵히 그 고난을 당하셨다는 점에 있어서 오늘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처럼 나 자신의 과오나 실수 때문이 아니며, 순전히 하나님의 계획된 고난이며, 그것을 내가 미리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그 고난을 받아 드렸을까요?
물론 대부분이 억울하게 생각할 것이며, 할 수만 있으면 그 고난을 피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만도 고난이요, 매 순간마다 고난의 연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강도 높은 십자가 고난이 계획되었음을 미리 다 아셨으면서 그것을 피하지 않으신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고난 예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고난이 힘들게 느껴지는 동일한 육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큰가를 이미 다 아셨지만 몸소 그것을 경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연약함’이라는 말(ajsqevneia)은 ‘무력함, 약함, 힘없음’이라는 뜻과 더불어 육체의 약함 즉 질병을 의미하는 말이며, ‘체휼하지’라는 말(sumpaqevw)은 ‘동정심을 갖다, 함께 고생하다, -와 같은 것을 겪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특별한 몸으로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육체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고난, 우리들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을 모두 다 총체적인 고난을 겪으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 목적도, 또 나름대로 종교에 심취를 하는 목적도 결국은 고난을 피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 고난의 정점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고난과 죽음에서부터의 도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더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또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지 않게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방법은 사람들의 그와 같은 심리를 분석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만 하면 고난이 없고 행복만 있으며, 죽음이 없고 영생만 있다고 하셨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무리들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싫어하는 고난이 있을 것을 전제하셨습니다.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자기 십자가’는 나무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믿음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을 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배와 그물과 부모와 형제를 다 버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당하실 될 십자가 고난을 세 번씩이나 거듭해서 예고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께서 비로소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16:21-28).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라가셔서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하신 후 제자들에게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눅9:44-45).
(눅 9: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세 번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며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여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막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막 10: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채찍질은 만일 우리가 단 한 번만 맞는다고 해도 살점이 묻어날 정도의 가혹한 채찍질을 혼절할 정도로 수없이 맞게 되실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 마침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되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까지 다 아셨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그와 같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미리 알게 되었다면 그래도 예루살렘으로 자청하여 올라가 묵묵히 그 고난을 자청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이 순전히 모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그와 같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극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셨다면 그 만한 이유와 명분과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이 감을 찾듯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칼을 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개의치 아니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게 한 가치와 명분은 무엇이었을까요?
2. 하나님의 뜻에 최선의 순종
예수님께서 아직 경험하지 않으시고도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어떤 고난을 당하게 될지를 미리 다 아신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미래를 환히 꿰뚫어 보시는 예언자의 안목을 가지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당하실 고난을 예고하신 것은 이미 구약 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경에 미리 예언하신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의 부모는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지만 메시아는 베들레헴 말구유위에 태어나실 것을 옛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대로 결국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2)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어떤 고난을 당하고 어떻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도 옛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거부하거나 지체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이사야선지는 주전 736 년경 소명을 받고 40 여년 간 활동한 최고의 선지자로 예수님의 탄생에서 죽으심까지를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상세하게 예언하는 가운데 메시아의 고난도 사 53장에 예언하였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메시아가 당하게 되는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으로 인해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이사야의 예언대로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을 맞게 되실 것을 미리 다 아시고 예언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시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우리의 평화와 회복을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세계가 어떤 곳입니까?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고, 내가 편하기 위해 남을 괴롭히고, 내가 부요하기 위해 남의 것을 강탈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오신 후에도 인간 세계는 늘 그러했고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것을 뒤엎고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대신 죽고, 남을 편하게 하기 위해 내가 희생을 하며, 남을 부요하기 위해 내가 가난해지는 길을 걸으신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을 때 지칭한 말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계시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머리 위 죄 패에 기록한 죄명은 살인이나 절도가 아니라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라고 기록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결코 우연히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하나하나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이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이유는 당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시는 왕의 죽음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대부분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아내고 파리 목숨처럼 하찮게 여기는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이는 자기 백성의 평강을 위해 대신 죽음의 길을 택하셨다는 것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러므로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환하게 다 내어다 보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것은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미리 다 아셨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배워야 할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가를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잘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히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셨던 발걸음과는 차원이 다른 만왕의 왕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당당하게 입성하신 승리의 입성이었습니다.
3. 나귀새끼를 타신 왕
예전에는 왕이 입성을 할 때는 백마나 황금마차를 타고 수많은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입성하였던 것처럼, 요즘의 왕은 최고급 방탄차를 타고 수 많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입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백마나 황금마차는 아닐 지라도 최소한 그 흔한 말 정도는 타시고 입성을 하셨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만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은 고사하고 나귀 중에도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당당하게 들어가셨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청와대를 들어가면서 가장 작은 경차를 타고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고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 12:14, 15)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이 너무 가난하셨기 때문에 나귀 새끼조차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라 벳바게 마을에서 생전 처음보는 사람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소리에 주인이 순순히 내어주었기 때문이라면, 주님은 나귀 새끼만이 아니라 왕이 타는 백마도 그렇게 얻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지 않고 구태여 나귀새끼를 빌려 타고 입성하신 것은 그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그 뜻에 순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약속의 예언 가운데 당신의 백성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만왕의 왕은 백마나 황금마차가 아니라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는 분으로 예언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와 동시대의 인물로 바벨론에서 태어나 스룹바벨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전 건축에 힘을 쏟은 인물로 이같이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사사로운 여행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은 겸손하신 왕으로 입성을 하시는 것을 만방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으로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처럼 마지막 여정을 겸손하신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물론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외모는 위엄은 고사하고 초라하게 보이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끝까지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예수님은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겸손한 왕으로 입성하신 후 예언하신 대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화려한 군말을 타시고 수 많은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로마 주둔군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의 입성은 전쟁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왕 중에 왕이시면서 세상의 군왕들과 달리 겸손하신 왕이시며,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샬롬‘ 즉 평화라는 뜻이지만 실상 예루살렘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었습니다.
1)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의 총독이 실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식민지의 수도였으며,
2) 종교적으로는 전통을 따라 삼대 절기를 지키고 매일 번제물이 드려지고 있었지만 죄와 억압과 주림에서 자유를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진정한 평화를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겸손한 왕이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불의한 자들의 모함과 불공평한 재판을 받으시면서도 마치 제물로 드려지는 어린양처럼 묵묵히 십자가 제단의 제물이 되심으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이루신 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이며, 예수님이 왜 나귀새끼를 타시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 오해하고 마치 왕의 입성을 환영하듯이 종려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길에 펴며 '지금 구원하소서' 라는 뜻의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한 것입니다.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잘못된 열정에 빠져 소리쳐 환영하였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나자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치는 폭도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진정한 신앙은 열정이기 전에 바른 이해와 바른 믿음이 전제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 론
예수님이 겸손하신 평화의 왕으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 아침 우리는 이 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깨우쳐 줄까요?
(요 12:12-13)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가리켜 환호하는 사람들은 크게 세 종류의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1) 목적이 없이 따르는 사람들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남들이 소리질러 환영하니까 덩달아서 소리 지르는, 대세에 끼어든 사람들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가장 바람직스럽지 못한 성도의 전형이라 하겠습니다.
2) 목적이 이기적인 사람들
주님을 환영하는 무리들 중에는 이기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기심은 오늘도 교회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무려고하하는 사탄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예수 앞으로 나오는 목적이 육신적인 것, 세상적인 것인 사람들은 결코 바람직한 결과들을 기대할 수가 엇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은 예수께 대해 취하는 입장과 태도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데, 그분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법칙에 대해 전혀 어떤 예외 규정도 만들어 두시지 않으셨으므로 예수를 거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 중에 나는 누구인가? 오늘 이 시대에도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나의 마음에도 우리 가정에도 이 민족과 나라에도, 한국 교회에도 다시 입성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께서 전쟁시에 타는 동물인 말이 아니라 평화 시에 타는 동물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은 그분이 평화의 왕이심을 잘 교훈하여 줍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적어도 다음 세 가지 평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인류는 죄와 허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평화가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2) 이웃과의 평화입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뤘으며, 지금도 민족, 언어, 이념 등으로 인한 대립과 반목, 불화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3) 자신과의 평화입니다.
두려움이나 불안은 인생의 많은 에너지들을 헛되이 낭비하게 만드는데, 예수 안에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 영혼의 평화를 언제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걸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평화의 왕 예수를 소리 높여 찬양하고 감사하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북한의 도발의 위협이 갈수록 점점 더 해지는 민족의 현실에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셔서 이 나라의 평화가 유지되는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고난주간을 특별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설 교 > 이규왕목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살전 4:13-18) (0) | 2013.04.23 |
---|---|
행복한 그리스도인들/(눅 24:44-53) (0) | 2013.04.03 |
하나님이 가르치신 사랑/(살전 4:9-12) (0) | 2013.03.11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살전 4:1-6) (0) | 2013.02.26 |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기도/(살전 3:8-13) (0) | 2013.02.26 |